Chapter 239
“진열을 갖춰라! 바라보지 말고 육감으로 인식하고 상대해!”
“하지만 대장님 눈을 감아도···!”
서큐버스의 매혹이란 결국은 악성 정보의 확산· 미친 마법사가 그들에게만 먹히는 페로몬을 만들어 뿌렸듯 유리 랜스터 역시 눈을 감아도 스미는 관능을 뿌리고 있었다·
“당신들은 미덕을 대신하여 쾌락과 즐거움을 좇고 있는데 어떻게 제게서 눈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건실한 성기사도 아닌 주제에·
서서히 쌓인다· 저들의 마음에 없던 감정이 찰랑이며 차오른다·
등장만으로도 말살대원들을 노예로 부렸던 서큐버스 여왕의 능력과는 비할 바가 아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리 랜스터는 손가락을 튕겼다·
“『흑(黑) : 본망소산(本望燒散)』·”
“큭 크아아아악?!”
“뭐 뭐가 일어난 거지· 우화 능력인가?!”
콰앙──!!
정신방벽이 허술하여 감정이 쌓이는 속도가 빨랐던 몇몇이 체내로부터 갑작스럽게 일어난 폭발에 휘말려 비명을 지른다· 코와 입에서 검은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낸다·
미친 마법사처럼 강력한 정신방벽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언젠가는 터진다· 그녀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성기사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시간제 폭탄 목걸이가 채워진 셈이다· 성기사들도 그 사실을 깨달아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유리 랜스터를 죽이기 위해 돌진했다·
한 명의 여인을 상대하기 위해 서른 명이 포위하며 달려든다·
“시간을 끌면 폭발한다· 그 전에 죽여야 해!”
“옳은 판단이라고는 볼 수 없겠군요· 미마가 염려한 것은 제가 당신들에게 당할까 봐가 아니라··· 놓칠까 봐입니다·”
손과 발·
종족의 힘을 쓰지 않으려 그녀가 택한 것은 사지육신을 움직여 적들을 타격하는 원초적인 무술· 서큐버스의 힘을 사용했다고 한들 그 단련은 여전히 남아 있기에·
스슥 빡!
휘둘러지는 칼을 손등으로 흘리고 턱에 한 방·
땅에 바짝 붙다시피 자세를 낮추어 발을 걸고 올라오면서 머리에 돌려차기를 꽂고·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창날을 피하고·
차르르르륵──!
사슬을 휘감아 당겨 성기사 하나를 꽁꽁 묶어 인간 방패로 삼아 대검을 대신 받아내기까지 3초·
성기사들은 그녀에게 흠집 하나 내지 못했고 그녀는 벌써 셋을 쓰러트렸다· 유리 랜스터는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들이 제게 집중하는 한 연달아 서른 번 싸워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콰앙 콰아앙──!!
“커으윽···!”
감정은 여전히 차오르고 있다· 터진다· 성기사들 사이에서 속속들이 그 피해자가 생겨나고 있다· 어서 저 서큐버스를 잡아 싸움을 끝내야 하는데····
“오십시오·”
“·······”
하지만 사납게 날뛰는 늑대를 도저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성기사들은 전투의 초입에서 패배를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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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성검이라 이거지?”
“어 엄청 파직 거리고 있어· 신성력으로!”
성검은 주변에 섬뜩한 뇌광을 뿌리는 모습으로 바위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주변은 쑥대밭이다· 떨어진 『신벌』에 의하여 지면은 새까맣게 녹아 그슬려 있다·
검이 꽂힌 바위는 멀쩡한 걸 보면 저것 또한 성검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보관용 금고 비슷한 역할일지도·
파지직 파직!
성검은 독이 바짝 오른 게 손대는 놈들은 누구든 신성한 튀김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벼르는 것 같다·
저거에 접촉해야 한다 이거지····
“악신쨩·”
“왜·”
“네 털을 좀 뽑아야겠다· 비늘 생산해·”
“내가 닭이냐···?”
악신쨩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상황의 중대함은 알고 있었던 만큼 순순히 용린을 뽑아주었다· 나는 그 용린 조각을 빨간맛 공작의 인형들 이마빡에 박았다·
“·······”
이걸로 생체 피뢰침 완성이다· 아슬아슬할 때마다 이 녀석들을 희생시켜서 여신의 어그로를 끈다·
“『여신을 지키는 세 마리의 개』!”
“『······』·”
타라와 니오레도 준비를 마쳤다· 금빛의 방패가 나타나 우산처럼 허공에 펼쳐지고 그 위에 검은색 점막이 덧씌워졌다·
그리고 유나는·
“경계의 저편 사람의 꿈이 닿아 비로소 만들어진 이데아 무한한 그곳으로부터 내가 바라는 어떤 것을 건져 올리려 하니· 거울면에 거듭 묻노라· 그곳에 있는가? 정말로 그곳에 있는가?”
휘몰아치는 마력 폭풍 속에서 장난 아니게 긴 영창을 준비 중이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영창 구절이다· 마력이 체내에서 움직이고 배열되는 방식 또한 다분히 특이하다· 내가 모르던 새로운 학파라도 되는 걸까·
어쩌면 이제는 사라졌다던 자색 마탑의 반쪽· 소환 학파일지도·
베네트는 『호원』을 뽑아들고 준비했다·
나는 성검으로 다가가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다들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버티고 빠져· 고집부리다가 신성력에 튀겨지면 안 돼· 목숨을 소중히 해야지· 빨간맛 빼고·”
“···부탁한다 마법사·”
너무 분위기가 무겁나 싶어서 나는 잔뜩 으스대며 농담을 던졌다·
“내가 도시를 구하고 나면 너희들 내 초상화 크게 프린트해서 걸어줘야 돼· 영웅 대접 거하게 해 달라고· 금은보화와 산해진미도 바치면 좋겠어·”
“·······”
베네트가 무척이나 짠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쓸데없이 비장한 것보다는 이 정도 느낌이 편하다· 나는 심호흡 한 번 하고 성검으로 손을 가져가···
쥐었다·
────·
정신이 들었다·
전신마취를 당해본 적 있는가? 방금은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인지조차 못 하고 의식이 날아갔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시간-체크 모듈에 따르면 내가 정신을 잃은 시간은 1초 남짓이었다· 내 의식은 긴급-의식-재가동 모듈에 의해서 회복되었으며 체내로 신성력이 침투중인 상황이다·
화끈하시군·
여신에 의한 역-해킹이다· 번개처럼 빠지직거리는 거친 신성력이 내 몸을 헤집으면서 스캔을 때리고 있었다· 이미 목 아래로는 모조리 뚫렸고 신성력 다발이 목 위로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성검을 뽑으려는 이들은 이렇게 몸수색을 당하는 건가? 추기경파의 용사 후보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을 거친다면 악신쨩의 용린은 당연히 들켰겠지·
나도 똑같은 꼴이 될 수는 없다·
방어는 모듈에게 맡긴다· 내 정신방벽의 교활함을 믿는다· 사실 그 외에 달리 방도도 없었다· 힘싸움으로 밀고 들어가면 내가 결국 지니까·
활로는 여신이 내 몸을 전부 읽어 들이기 전에 해킹을 완료하는 것뿐·
“그곳에 있다면 나를 보라· 내가 거울 너머의 너를 바라보니 너 또한 나를 바라보라· 우리가 손을 겹쳐 끝내는 서로가 서로를 건져낼 때를 위하여·”
잔잔하게 들려오는 마탑주의 영창을 백색소음 삼아서 집중한다·
끄그극·
피부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어 성검 손잡이를 잡는다· 저 아득한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널찍한 관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내 예측대로 성검은 여신의 단말기가 맞았다·
해킹하자· 정보를 날카롭게 갈아 던진다·
널찍하고 쾌적한 길이 뚫려 있으니 조금만 마력을 불어넣어도 쭉쭉 나아간다· 벌써 여신의 ‘표면’에 닿았다·
『신벌』로부터 역산했던 것과 비교하면 골목길과 하이패스 정도로 차이가 난다·
표면을 갉아내고 안으로 들어간다· 식물이 뿌리를 뻗듯이 세밀하게 여러 갈래로 나누어 퍼뜨린다· 나는 넓게 탐색해야 한다·
더럽게 커다란 여신으로부터 ‘관리자 정화 단계’를 컨트롤하는 부분을 찾아야 하니까·
그때·
머리카락이 단번에 꼿꼿하게 서고 피부가 장난 아니게 따끔거렸다· 그리고 여신의 내부로부터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경고 : 외부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접근을 감지했습니다·]
[경고 : 1단계 요격을 개시합니다·]
찰칵찰칵찰칵·
“···온다!”
콰아아아아아──!!
세례라도 하듯이 내 머리 위로 빛의 폭포가 쏟아졌다· 폭포는 타라와 니오레의 우산에 막혀 좌우로 갈라졌다· 나는 빛으로 만든 커튼의 안쪽에 서 있다·
낭만적인 문장이었지만 저 아름다운 빛이 담고 있을 열량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신벌』의 몇 줄기는 빨간맛 공작의 인형으로 분산되어 꽂혔다· 조금씩 위력을 분산해 주고 있다· 데려오길 잘한 것 같다·
으지직·
내 머리 위를 가리는 방패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몇 초면 작살날 것 같은데· 아니야 불안해하지 말자· 믿자· 밖에서 막아 줄 거라고 믿자·
그때 밖에서 이를 갈아붙이는 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신벌』이라면· 여신은 이렇게나 분노할 수 있었다는 거야···?”
자신의 부모가 죽을 때에는 묵인했으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신벌』을 내리는 여신이 가증스러워 보였던 것 같다·
빛의 커튼 너머에서 타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아른거리더니· 마검으로 보이는 길쭉한 그림자를 쥐고는 이쪽으로···?
푸욱──!
나는 내 앞에 돋아난 칼날에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칼끝은 내 코앞으로부터 30센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마검으로부터 『회한만극』의 가시 줄기가 돋아난다·
“무심할 거라면 끝까지 무심해야지──!!”
타라는 여신의『신벌』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충당한 신성력을 그대로 신성 마법으로 전환하여 방패의 강도를 높였다·
균형이 맞아떨어졌다· 여전히 으직거리는 소리는 나서 오싹오싹하지만 방패가 부서지는 속도보다 회복 속도가 더 크다·
해킹을 계속한다····
수백 년에 달하는 여신교의 기록? 넘긴다· 필요 없는 정보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영초 영약들의 위치를 기록한 지도 데이터? 조금 탐이 나기는 하지만 여기에 쓸 리소스는 없다·
역대 성녀의 신체 데이터 모델링? 아냐 흔들리지 말자· 진짜로· 아무리 과거 성녀의 복장이 화끈했다고는 해도···!
[경고 : 2단계 요격을 개시합니다·]
으직·
단번에 방패의 중심이 움푹 들어가 버렸다· 빛기둥의 굵기는 그대로이지만 그 밀도가 세 배 이상 올랐다· 치솟은 광량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다·
『회한만극』의 가시덩굴도 흡수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불타서 사라져간다·
그때 베네트가 나섰다·
“지키기를 바랐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군·”
『호원』 마음이 다하지 않는 한 부러지지 않는 검에 변화가 일었다·
그 칼날이 은은한 빛을 내자 부러지지 않는 성질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방패에도 타라의 우화에도 깃든다·
신성 방패는 형편없이 우그러졌지만 아슬아슬한 채로도 부서지지 않는다· 그 내구도를 베네트의 마음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신이라고 하더라도── 내 마음을 꺾을 수는 없을 거다!”
든든하다· 어떻게 이렇게 잘 컸을까· 내가 다 뿌듯하군·
해킹을 계속한다····
여신의 저항을 뚫고 나간다· 방패를 올리면 우회하고 숨기면 찾아내어 교활한 사냥꾼처럼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댄다·
크라운홀의 기원과 황족 혈통의 비밀· 포기한다·
인지로 힘을 얻는 존재들에 대한 능동적 대처법· 아깝다· 포기한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적에 대하여· 젠장 포기한다· 나중에 두고 보자·
그리고 마침내 여신의 『판단 기관』에 닿았다·
즉시 반응이 있었다·
[경고 : 3단계 요격을 개시합니다·]
잠시 빛줄기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해가 떴다·
가짜 낮에는 해가 없었을 텐데 비로소 태양이 생겼다· 이제 저 태양으로 때릴 생각인가 보다· 앞으로 조금인데···!
“거울 너머에는 북쪽을 수호하는 신묘하고도 거대한 거북을 닮은 환상의 동물이 있다 하더라· 환상으로부터 오라 『현무(玄武)』·”
···유나의 영창이 끝났다!
쩌저적· 쩌적·
허공에 틈이 벌어지며 건물 하나쯤은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거북이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걸음 한 번에 땅이 울린다·
저런 걸 소환할 수 있었던 건가!
유나는 현무라 불렀지만 생김새는 애매하다· 군데군데 독수리나 하마의 모습도 섞여 있는 듯했다·
손님이 치즈버거를 주문하자 없는 재료로 어떻게든 구색을 갖추어 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나는 거기에 더하여·
“번제승화(燔祭昇華) -『환상계(幻想界) : 개문(開門)』·”
쩌저저저적──!
허공에 열린 균열에 획이 하나 더 생겼다·
자탑주의 배후에는 십자의 균열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대의 공간 전체를 뒤덮으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애매하던 현무는 비로소 뱀과 거북을 닮은 내 고향의 이야기 속 그대로의 모습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태양이 떨어진다·
자색 마탑주와 여신의 격돌 나는 그 장면을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직전에 여신의 『판단 기관』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그러자·
내 의식은 여신의 내부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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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할 수 없는 공간이다· 새까만 곳에 푸르른 줄이 너울거리고 정보의 파편들이 둥둥 떠다니는 수조다· 우주를 닮기도 했고 옷장 안쪽을 닮기도 했다·
여신의 의지가 다이렉트로 내 머릿속에 전해졌다·
[판단 :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개체’와 유사하나 분명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 성격 유형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
[출력 : ‘악질이지만 사람은 착하다’·]
“·······”
차이를 알아준 건가? 아니면····
‘그것’에게 휘둘려서 누군가를 파멸로 몰아넣어 본 적이 없으니까· 전과도 범행 사실도 없으니 벌을 내리지 않는 걸까·
적대는 아니다· 이걸로 좋다·
“이름은?”
[응답 : 본 기기의 이름은 세계안정화기구 입니다·]
대화도 통한다· 생각했던 방식이랑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건 기회가 왔다· 여신의 마음을 바꿀 기회가 말이다·
어째서 도시를 지우려고 하느냐 물었다·
여신은 그 이유에 대해서 상세히 풀어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이며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신’을 바꿀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고·
다만 세 관리자가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다가·
[기록 : 악룡에 의한 피해 사실·]
여신의 대적 그녀가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존재· ‘그것’의 흔적이 감지되었기 때문에· 보안 취약점을 이용해서 ‘여신’ 자체를 뒤틀어버릴까 염려되어 말소를 택했다고 한다·
나는 조곤조곤 설득했다·
“너무 극단적이지 않아? 통계가 잘못되었거나 가중치를 잘못 잡은 것 같은데·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면··· 그만한 수의 무고한 사람들도 죽어·”
[응답 : 더 나아질 여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단은 타락했고 기존 시민들은 타락한 교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부패가 심화할 전망이라면 모두 도려내는 것이 안전합니다·]
“자정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집단은 썩지· 하지만 봐· 『개혁파』가 등장했고 베네트가 열심히 발로 뛰고 있다고· 교단은 나아지는 중이었어· 약간 소란스러웠던 건··· 진통이었지·”
[응답 :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위험합니다·]
정황상 악룡 = ‘그것’인 모양인데·
‘그것’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걸까· 하여간 내 인생에 아주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이 커다란 여신조차도 ‘욕망’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기계장치가 인간을 위하는 듯 보여서·
“너는 오류가 심해· 부분적으로는 망가졌지·”
[응답 : 동의합니다·]
“하지만 핵심 가치는 훼손되지 않은 거잖아· 너는 인간이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어· 그리고 마침··· 나한테는 데이터가 있거든· 신과 마법이 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야·”
[-·]
지구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한 정보들이다· 그곳에는 신과 마법이 없었지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치열한 생각이 있었다·
이거라면 네가 앞으로 인간을 보살필 때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거래를 제안했다·
[질문 :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처벌 수위를 좀 낮춰 줘· 무고한 사람들은 죽이지 말고 잘못한 녀석들만 벌을 주자· 개 같은 놈들한테서는 신성력을 뺏고 우리들이 교단을 바로잡고 깨끗하게 만들 수 있게 조금만 기다려 줘·”
[오류 : 본 기기는 규율에 따라야 합니다· 해당 요구는 337개의 규율과 충돌합니다·]
인간을 위해 기계처럼 동작하기로 했으니 그 근본 원리만큼은 어길 수 없다· 추기경들이 멋대로 쌓아 둔 악법이라도 맘대로 잘라낼 수는 없다·
[그러니·]
여신은 자신의 핵심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우회책을 제시했다·
[1· 용사선발대회에 참여한 모든 ‘용사 후보’를 대륙의 무작위 좌표로 추방한다· 여기에는 대회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이들 또한 일부 포함된다·]
[2· 신성도시 트럼펫홀의 격리 상태를 일정 기간 유지한다·]
분탕충들을 모조리 내쫒고 네가 말하는 그 ‘자정 작용’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납득하고 거래를 성사시켰다·
1번 조항 때문이다·
베네트 북부대공의 대전사 시셀 이런 사람들은 대륙 어딘가로 사출되어 버리겠지만···
간접 관여도 인정한다고 하니까· 동시에 나 빨간맛 공작 추기경 늙다리들도 쫒겨날 것이다·
하지만 아예 관여 자체를 안 한 사람들· 했더라도 여신이 리스트에 넣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고 애매한 사람들은 도시에 남는다·
예컨대 유나 유리·
그리고 내가 ‘용사선발대회’를 진두지휘하느라 모든 작업을 날로 먹었던 『개혁파』 인원들·
적들은 모조리 쫒겨나고 우리 세력의 핵심은 남아 있다· 그러면 순식간에 교단을 차지하고 권력 중추로 우뚝 서는 것도 꿈이 아니다·
[응답 : 약속은 맺어졌습니다·]
좋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됐다·
[경고 : 해당 인물들에 대하여 『강제 추방』이 실행됩니다· 시셀 유렌스토 안피르 베네트 힐튼 솔 레누스 울베인···]
랜덤 좌표 사출이라·
이것도 괜찮다· 나는 어디 산골 오지로 날아가더라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내가 누구냐 무려 우화랑도 맞짱 떠서 이기는 강력한 환상 마법사가 아닌가·
그냥 악신쨩이 겪었던 걸 나도 잠깐 겪게 되는 거다·
의도치 않은 휴가를 갖게 되는 거지· 어디든 떨어지고 나면 근처의 마탑으로 달려가서 유나한테 나 잘 지내요 연락 한 통 넣고·
느긋하게 아카데미로 돌아가기만 하면 끝이다· 그쯤이면 『개혁파』는 교단을 전부 먹어 치우고 새로 성녀랑 용사도 뽑아서 잘살고 있겠지·
[경고 : 카렌 송곳 발도술의 케이 몬쉘 노인 검사 소이온···]
“······?”
잠깐만·
저거 전부 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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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눈을 뜨니 나는 유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이 일어났·”
“비상-!!”
“으에에···?!”
이럴 때가 아니다· 구닥다리 AI 빈 깡통 여신이 내 위장 신분들을 개별 카운트를 조져버렸다· 등골이 오싹하고 혀가 바짝 마른다·
대상 지정····
『강제 추방』의 대상 지정이 한 사람을 여러 번 지목한다면·
희망편은 이거다· 내가 서른 몇 번 정도 텔레포트를 당하는 거· 그러면 심한 멀미로 속 좀 뒤집히고 며칠 앓는 정도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절망편은·
“···흐아아아아아아!!”
“왜 왜 뭔데?! 가 갑자기 으엣?! 너 몸이 여러 조각으로 빛나···!!”
그래·
내가 여러 조각으로 찢겨서 사방으로 날아가는 거다·
이건 여신조차 속인 내 재능에 감탄해야 하는 거냐 아니면 이것도 파악 못 하고 나를 30갈죽을 내버리려는 여신의 무능함을 탓해야 하는 거냐···?
다 좋게좋게 잘 끝났구만 왜 또 마지막에!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고 유나의 승화가 아직 유지 중이라는 걸 체크했다· 이거다· 이거면 살 수 있다·
“자 잘 들어요· 마탑주님 아니 유나!”
“으 으응!”
“제가 수십 등분이 나서 대륙 전체로 흩어질 건데 놀라지는 말고····”
“그걸 어떻게 안 놀라?!”
유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허옇게 질려버렸다· 나는 유나의 뺨을 주무르면서 다독이고 겸사겸사 내 마음도 다독이면서·
“죽는 거 아니니까 날 찾아줘요! 미니 미친 마법사들을 모두 찾아서 조립해 줘! 나 마탑주님 믿어요!”
“대 대체 뭘 당한 거고 뭘 하려는 건데?!”
“종족 변경!”
그래·
수십 조각으로 찢겨도 안 죽는 방법이 있다· 내 몸을 정보로 바꿔버리는 거다· 서큐버스들처럼 정보생명체가 되어서 생존을 노린다···!
유나의 승화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리니까· 그렇기에 가능하다· 할 수 있다· 나는 내 몸을 구성하는 것들을 다급히 데이터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번쩍 번쩍──!
이제 곧 『강제 추방』이 발동하겠다고 경고하는 마냥 몸에서 깜빡이는 빛이 강해진다· 흘깃 눈치를 보니 베네트네도 놀라서 뒤집어지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입을 털었다·
“용사 싹 다 추방! 추기경파도! 대륙 랜덤 텔레포트! 신성도시 무주공산! 개혁파로 먹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진짜 죽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악신쨩처럼 유기하지 말고 날 찾아줘요· 유나도 유리도 사랑해! 이따 봐!”
“헤엑···!!”
이게 사망 플래그인지 말 그대로인지 헷갈려서 좋아해야 하나 혼절해야 하나 고민중인 유나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나는 수십 등분의 미친 마법사가 되어 대륙 전역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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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대규모 실종 사태에 더불어 수십 개의 빛으로 쪼개진 미친 마법사가 저 하늘 사방으로 흩어져버리고 난 뒤에· 유나는 잔뜩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죽었을까 싶어서 심란한 건 아니었다· 그가 유언을 남긴다면 좀 더 구질구질했을 것 같았으니까· 죽은 게 아니라고 했으니 살았을 거다·
그가 어떤 판단을 했는지는 대충 눈치를 챘다· 몸의 정보화를 눈으로 보았으니까 정말로 말 그대로 흩어진 걸 주워 모으면 다시 조립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
“·······”
그가 사라진 자리에·
엄청나게 젊어진── 신장이 반으로 줄어 쪼꼬매진 소년 미마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도 생김새도 여전하지만·
어쩐지 붉은 눈동자가 불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음습함도 없다· 보는 사람마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무한한 평온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유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너는 누구니?”
“내 이름은 『약속』이야· 나한테는 네가 구면이지만 너는 내가 처음이려나··· 반가워· 네가 한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소개하면 이야기가 빠를 것 같네·”
소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의 『모듈』이야· 분신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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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율리우스 대공가 저택·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아하하 으음··· 어쩌다 보니 라고밖엔· 저는 『하트』라고 하는데 혹시 시종 필요하지 않으세요?”
멘탈케어 및 상담 모듈· 자칭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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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삼림 어딘가·
“나는 여신에 의해서 날려진 건가· 어떻게 된 거지 미친 마법사? 그리고 그 꼴은 또 뭐냐·”
“큭큭··· 글쎄요· 저도 참 흥미롭습니다 베네트· 여기에 대해서 대답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확실하지 않은 추측을 입에 담는 건 좋아하지 않는지라·”
“···세 배쯤 수상해졌군· 이제는 정말로 맛이 갔나?”
수상함 및 연출 모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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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수도 크라운홀 유명 디저트 카페·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김루루 너도 혹시 저게 보-”
“뭉개야!!”
“어 음··· 바 반갑다몽! 잘 지냈냐몽!”
보안 및 검거 모듈· 타칭 뭉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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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오솔길·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탑이 어디라고요?”
“적탑이유·”
“혹시 좀 얻어 탈 수 있을까요· 제가 원래는 대단한 마법사인데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가지고 마법이 잘 안 나가네···?”
30분할쯤 되어 대륙 전역에 자신의 분신이 떨어져 버린 탓에 본인의 스펙도 상당히 떨어져버린 본체·
적탑 근처에 불시착·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이 프렌즈 내일 뵙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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