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7
117화
겨울이의 말이 끝나고 강당에는 침묵이 자리했다·
““···””
막상 말을 꺼낸 매니저들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겨울이의 말에 대표로 나서서 반박하는 것에 위험성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 겨울이가 나아가 연습생들이 무기로 내건 팬들을 위한다는 말은 생중계가 진행 중인 이 자리에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야 팬들을 위한다는 논리보다 여론을 휘어잡을 말은 없었으니까·
물론 기획사의 입장에서는 지금 연습생들의 행동을 문제 삼아 걸고넘어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자리에서가 아니다·
그건 당장 그런 시도를 하다가 대차게 무너져 버린 은갈치 매니저를 보기만 해도 알 수가 있었다·
소속사가 방침을 정한 상태였다면 그런 말이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속사들 대부분은 지금 벌어진 이 갑작스러운 혁명 소동에 상황을 전부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물론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지금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입장을 정할 수 있기는 할 것이다· 어쩌면 기획사의 상부와 투표조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사람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방침을 정하고 자신이 의견을 밝힐 만큼의 지위를 가진 사람 자체가 몇 없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은 대부분 이런 현장에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사례를 벗어나는 별개의 존재도 있었다· 바로 다년간의 경험과 경력 실적을 지녀 업계에서 인정받으면서도 현장을 고집하는 적유송 매니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적유송이 생각의 정리를 마쳤는지 강당을 채운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연습생분들의 생각은 잘 이해했습니다· 저희도 지금 소녀 100이 가지고 있는 논란을 잘 알고 있고요· 그 때문에 여러분들이 보이는 지금의 모습이 팬 분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게 만들려는 책임감의 발로라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는 조심스러운 기색을 담으면서도 단호함을 담은 시선으로 말했다·
“저 또한 매니저로서 긴 경력 동안 연습생분들에게 프로의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에 와서 이 행동을 비판한다는 것은 단순히 매니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같이 프로라는 이름을 매단 직장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겠지요· 제 옆에 계시는 매니저분들도 저마다 생각과 입장을 다양하게 가지고 계시지만 이 부분만은 동의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매니저들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저런 그의 생각과 진중한 태도에 동감하기에 온갖 기획사가 뒤섞인 이 강당에서 대표로 발언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섣부른 판단이 아닌지 의구심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적유송은 이번에 타 매니저들과 선을 그어 자신을 강조하고는 말했다·
“의견을 밝히기에 앞서 상황을 정리하겠습니다· 얼마 전 오유리 연습생의 공론화와 익명의 네티즌이 남긴 알선 기록으로 지금 소녀 100은 투표조작 의혹이라는 전례 없는 파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투표조작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유의미한 의심을 받고있는 상태이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입니다· 확정이 아니에요·”
맞는 말이다· 지금 소녀 100을 둘러싼 논란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의혹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나의 의도된 바였다· 아슬아슬하게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증거만 선별해서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소녀 100에서는 이미 투표조작은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고 무분별한 루머의 살포에 대하여 법적인 대처를 하겠다는 의견 또한 더했습니다· 거기에 공론화를 한 오유리 연습생을 불러서 오해와 섣부른 의심으로 소녀 100의 신뢰성을 떨어트린 데에 사죄까지 시켰지요· 그 과정에서 연습생에게 강제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있지만 일단은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나의 주도 아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김선예에게 심어 놓은 독이기도 하였다·
김선예는 의문의 폭로자가 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도 어 이상의 의혹이나 폭로는 없다고 가정하고 ‘투표조작은 없었다·’라는 강경한 노선을 취하게 만든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런 강경한 노선은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더 강한 역풍이 불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그걸 위한 설계였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 연습생분들께서 소녀 100이 투표조작이라고 단언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로 이것은 섣부른 행동이 아니었다·
“이건 팬분들을 실망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여러분들의 의지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저 또한 공통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이런 방식이 아닌 소속사의 방침과 함께 조금 더 천천히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천천히 이루어져야 할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달려야만 한다· 연습생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공통된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이 사회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 여론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절대로 이 같은 반향을 끌어내지 못할 테니까·
지지부진한 공방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 소동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파도가 되어야만 한다·
그 생각을 담아 나는 적유송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 수연 씨 준비한 증거 지금 풀어주세요·
그 메시지를 보낸 대상은 기획사에서 대기 중인 서수연이었다·
– 지금 말입니까? 이르지 않습니까?
– 기존 계획보다는 이르지만 지금 해야만 합니다· 사실 지금이 기존 계획처럼 하는 것보다도 더 효과적일 겁니다·
– 원본이 아니라 가공된 버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맞아요· 원본을 공개해서 저희가 위험 부담을 지지 않아도 충분하니까요· 저번에 말한 다른 이유도 있고요·
– ···알겠습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선 팀장님·
내가 메시지를 보내는 사이 적유송은 한겨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니저님의 말씀처럼 천천히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연습생들이 하시기에는 전혀 어려운 것 없습니다· 이 소동을 정리하고 소속사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입니다·”
“···그럼 지금 소녀 100에 맞서 일어난 연습생들과 저희를 지지해 주는 팬분들의 마음을 배신하는 일이 되잖아요·”
“배신이라고 부를 일이 아닙니다· 그냥 단순한 헤프닝이었던 거죠·”
“···헤프닝·”
겨울은 그 일방적인 축약에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만들고자 한다면 헤프닝이 될 수 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 팀장님? 그게 무슨 의미인지···?”
구질구질한 설명을 곁들이는 대신 적유송에게 한마디의 말만을 남겼다·
“지금 뉴스 한번 봐보시겠습니까?”
나의 권유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적유송은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스마트폰을 열고 뉴스를 확인하였다·
“···이건?”
그의 반응에 다른 매니저들도 궁금증이 생겼는지 그를 따라 뉴스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익명의 녹취록? 뭐야 이게?”
“···플라워 엔터테인먼트와 성스폰 기록 내역?”
“아니 그냥 찌라시 아니야? 이런 게 있을 리가?”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진강 계열 언론사에서 나온 거야! 거기가 이런 미친 내용을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다룰 것 같아?”
“···미쳤구먼 뮤넷· 보안 관리를 뭐 이따위로 한 거야?”
“시발 이거 좆된 거 같은데·”
““···””
머슬시프트- 속보) 소녀 100 좆됨·
더블치즈베이글- 엌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미친 새끼들·
Judgment- 존나 더럽다 진짜·
송아송아- 가만 안 둔다 뮤넷 이 개X끼들·
나는 침묵을 지키며 스마트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적유송에게 촬영 중인 스마트폰에는 울리지 않도록 작게 말했다·
“어쩌시겠습니까? 지금이 망하는 게 확정인 소녀 100에서 이쪽으로 갈아타실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 시점에서까지 발을 빼시면 저희는 몰라도 시청자분 들은 좋게 보지 않으실 터이니까요·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죠?”
““···””
“···뭐 이런 상황에서도 적유송 매니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천천히 방침을 정하시겠다면 존중하겠습니다· 신중론 좋지 않습니까?”
적유송의 바로 옆에 있던 매니저들은 그 말을 들었을 텐데도 어느 누구도 나의 말에 확답하지 못하였다·
그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적유송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처럼 한결같이 진중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저는 늘 연습생들의 편이었습니다·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소녀 100을 향한 혁명에 동참하고 싶었죠·”
““···””
“아 그리고 저희 늘봄 엔터테인먼트는 소녀 100의 제작진과는 출연진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피해자이죠·”
““···””
귀신같이 빠른 손절 속도였다·
···유송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좀 추하네·
어쨌거나 적유송이 선을 긋자 다른 매니저들도 질세라 소리쳤다·
“저희 RGG도 소녀 100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연습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포포엔터도 이번 사태에 대하여···”
“신아트 엔터도 확고하게···”
개때처럼 소리쳐 가며 소녀 100을 손절하는 매니저들을 보며 겨울이 중얼거렸다·
“···저게 프로?”
···너는 저런 거 보고 배우지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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