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5
125화
“이미 알고 있었잖아?”
“···”
모를 수가 없었다·
진여름이 선태양이라는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말이다·
송요한이 트레이닝을 도중 보컬에 대한 열변을 토하며 집중을 요구해도 시선은 창문 너머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선태양으로 향해 있었다·
선태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어떤 방식으로 표정이 바뀌는지를 그 미묘한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차분하고 무감정해서 어떤 때는 유령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그녀가 얼마나 생기 넘치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를 보았다·
숨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서로가 그것을 입에 담지 않고 모르는 척을 했다·
그것을 밝히는 순간 반드시 부딪혀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 기만이 지금에서 끝을 맞이했다·
가을은 이제 그것을 모르는 척 넘어갈 수만은 없게 되었다는 것은 받아들였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너의 마음을 이해해·”
설령 부딪히게 되더라도·
“그도 그럴 게 나도 태양 오빠를 좋아하니까·”
민들레처럼 피어오른 감정은 만개한 노란 꽃을 넘어 홀씨가 되어 가을의 마음 전체를 헤엄치고 있었다·
가을의 하늘은 이미 그 씨앗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 또한 사랑하고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하게 좋아한다는 말로도 부족한 거 같아· 그래 나는 태양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 ···태양 오빠가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게 두려워질 정도로· 그렇지만 지금은 이 마음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야 우리는 데뷔를 앞둔 아이돌이니까·”
그녀들이 되어야 할 것은 아이돌이었다·
근래 아이돌의 사적인 삶에 대하여 존중하는 문화가 늘어가는 추세였지만 아이돌이 품은 연예와 사랑이라는 것이 득보다 실에 가까운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하물며 아직 데뷔조차 하지 않은 그녀들이라면 그것은 완전한 독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이런 나의 마음이 선 팀장님에게는 그리고 우리 투베어에게는 방해만으로만 남으리라는 것을 말이야·”
여름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억누르고 싶지만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수가 없어· ···참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더라고·”
“여름아···”
알고 있었다· 이해도 되었다·
그렇기에 가을은 마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 또한 그랬으니까·
넘실거리는 마음의 찰랑거림이 정신을 차려보면 주변을 적시고 있었으니까·
가을 또한 참지 못하고 있었다·
선태양을 향한 미칠 것 같은 충동에서 그녀는 정신을 차려보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런 가을 대신 나서서 해야만 하는 말을 꺼낸 것은 한겨울이었다·
“···여름아 이런 내가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우리 조금 더 참아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 겨울이 너는 참고 있지· 그 누구보다도·”
“···나는?”
겨울이 진여름은 그 말이 어떠한 의미인지 되물으려는 찰나 진여름은 유가을에게 물었다·
“가을 언니 한 가지 질문 좀 해도 괜찮을까?”
“···응? 어 괜찮아·”
유가을의 허락을 구한 진여름은 살짝 심호흡하고 감춰져 있던 베일을 들쳤다·
“선 팀장님이랑 시간을 보내던 그 장소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그건··· 버스킹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가을 언니가 버스킹을 했던 장소는 1시간 이상 떨어져 있잖아· 회사에서도 거리가 멀고· 그런 장소의 카페에 우연히 들렀다고?”
“···”
가을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는 더 묻지 않을게·”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몸을 떨기만 하는 유가을을 보며 한겨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가을 언니가···”
“한겨울·”
진여름은 대부분의 대화에서 상대의 말을 차분히 듣는 청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답지 않게 한겨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겨울은 그런 진여름을 보며 느꼈다· 차갑고도 담담하게 말을 꺼내던 그녀의 목소리에 열의가 담겨있었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지금 가장 이상한 건 너야·”
“···내가?”
“그래 네가·”
“···”
“불협화음을 만든 나를 탓하는 건 건전하다고 생각해· 그 이유 또한 공감돼· 그러나 너의 행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거?”
“왜 계속 가을 언니를 변호하려는 거야? ···아니다· 이건 틀린 말이네· 왜 계속 참으려는 거야?”
“그야 참는 게 모두를 위하는 거니···”
“그 모두에 너는 들어가 있어?”
“···”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한겨울을 보며 진여름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리고 눌러 담아 왔던 감정들을 모두 한꺼번에 터트렸다·
“겨울아· 너는 이상해· 가을 언니와 선 팀장님의 사이에 시간을 만들고 대화할 기회가 오면 가을 언니에게 넘기려고 하고 선 팀장님이랑 있다가도 가을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던가 아니면 가을 언니랑 선 팀장님이 둘이 있을 수 있도록 억지로 사정을 쥐어짜서 자리를 피한다든가 하지· ···그게 뭐야· 그건 이상하잖아· 너는 참는 주제에 왜 가을 언니를 도와줘?”
“그··· 그건 가을 언니랑 대화하는 걸 태양 쌤이 편안하게 느끼시니까· 태양 쌤이 내색은 잘 안 하지만 가장 언니인 가을 언니를 의지하시니까· 그리고 내가 가을 언니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둘을 위해서···”
“너도 선 팀장님을 좋아하잖아!”
“···”
한겨울은 진여름의 말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선태양의 곁에 어떤 형태로든 남으려면 지금 이 감정을 참아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 그 마음만큼은 절대로 속일 수 없었으니까·
“···”
그렇기에 침묵 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모두가 그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음에도·
친구의 그런 답답한 모습을 본 여름은 달아오른 분을 식히지도 못한 채 토해내듯 말했다·
“나는 가을 언니에게 불만을 가진 게 아니야· 오히려 그 순수한 감정이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가을 언니의 저런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거야· 사실 위치 추적을 하든 스토킹하든 막을 생각은 없어· 솔직히 막는 게 아니라 나도 하고 싶어!”
구석에 찌그러져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오유리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 나간 발언인데 왜 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거죠?’라고 물었으나 모두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겨울아 너는 달라 너는 그러지 말아야 해·”
“나는··· 나는 괜찮아·”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그건 너에게 너무나도 아플 테니까·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길 거니까· 네가 품은 감정은 그렇게 눌러 담을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잖아?”
그것은 같은 사람에게 연심을 품은 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교감하고 의지하며 같은 꿈을 꾸는 친구에게 하는 말이었다·
진여름은 보아왔다· 그리고 이해했다·
겨울이 품은 동경을 그리고 깊은 자기혐오를 그 비틀린 마음이 만들어 낸 방어기제를·
분명 저대로 겨울을 방치하면 그녀는 고장 날 것이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야 진여름이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언젠가 말이야· 나는 이 마음을 선 팀장님에게 고백할 거야· 그리고 그 순간에 선 팀장님이 그걸 매니저의 입장에서 관리하는 아이가 보이는 일탈 혹은 곤욕스러운 헤프닝 같은 걸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처해야 할 귀찮은 일이 아니라 선 팀장님에게도 설레는 그리고 고민하게 되는 그런 감정의 떨림을 남기고 싶어· 그리고 결국에 이어지고 싶어·”
단순히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결국에 그녀는 선태양이 그 마음을 받아주었으면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멈춰 있어서는 안 되었다· 겨울과 가을이 교류를 더 하는 시간에 소외감에 비틀려 혼자 참고 있어서만은 안되었다·
그것이 불화를 만들고 관계가 비틀리더라도 그녀가 이 작은 기만을 한 이유였다·
진여름은 자신을 선태양의 마음에 남기고 싶었다·
“가을 언니 이번 일은 미안해· 염려한 바도 이해해· 나의 욕심만으로 선 팀장님을 독점하려는 음습한 마음처럼 보였을 테니까· ···사실 별반 다르지도 않고· 하지만 그래서야 안 되겠지· 그러니 약속할게· 나는 앞지르려고 투베어의 미래를 막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야· 나도 투베어의 모두랑 성공하고 싶으니까· 내가 그 방해물이 되는 걸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니까·”
진여름은 선태양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천아람 서수연 이혜린 송요한 석현우 한겨울 유가을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오유리라는 아이도 모두 포함해서 이곳 투베어의 모든 사람을 좋아했다·
그들이 행복했으면 했다· 그들을 위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방해되지 않는 선이라면 지금처럼 약간의 시간을 만드는 건 멈추지 않을 거야· ···뒤처지고 싶지는 않거든·”
“···”
“그러니까 한겨울 너도 제대로 마주해· 어차피 안 될 거라고 너는 선 팀장님이랑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미리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옆자리에 있기만 하면 괜찮다고 타협하는 게 아니라 너의 마음을 언젠가 제대로 부딪칠 준비를 하라고·”
진여름은 떨리는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만들어 내고 한겨울에게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정작 이 말을 함으로써 후일 후회하는 건 그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
말을 마친 진여름이 감정을 추스르기 위하여 트레이닝 룸을 나섰지만 이곳에는 적막만이 가득 차 있었다·
“···”
진여름이 지적한 내용은 유가을 또한 알고 있었다· 한겨울이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를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베푸는 일렬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이다· 한겨울이 유가을의 사랑을 지지하기로 선언했던 그때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점차 그 모든 의미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타성처럼 겨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 선의 속에서 생기는 선태양과의 시간이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최악의 인간은 그녀였다·
죄악감 속에서 몸을 벌벌 떨며 유가을은 겨울에게 빌 듯이 사과했다·
“미안해 겨울아· 내가 정말로···”
하지만 겨울은 그런 그녀의 사과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언젠가 후회할 것이라는 진여름의 경고뿐이었다·
“나는 태양 쌤을···”
그런 겨울은 넋이 나간 것처럼 상념에 빠져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구석에서 지켜본 신입 연습생 오유리는 아무도 모르게 총평했다·
“조별 과제 좆 망했네·”
데뷔를 앞둔 연습생 동료가 담당 매니저를 좋아한다는 미친 시한폭탄이 그녀의 눈앞에 3개나 떨어져 있었다·
과장 없이 좆 망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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