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9
39화
집에 돌아와 수분 팩을 하며 맥주를 한 캔 마시는 중인 누나 옆에 앉아 같이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는 이 시기 한창 악명을 떨쳤던 묻지마 살인범의 행각이 보도 되고 있었다·
누나는 그 뉴스를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거 무서워서 바깥에 혼자 다니겠나·”
앵커는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한 뒤에 다음 뉴스로 넘어갔다· 이번 뉴스는 한 사생팬이 집착하던 아이돌에게 염산 테러를 감행했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아이돌에게 집착하던 사생팬은 아이돌과 자신이 사귀고 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돌은 그 사생팬을 팬 중 하나로만 취급했고 그 현실의 간극 차이에 분노하여 망상을 이어 나간 사생팬이 염산 테러를 가했다·
그 와중 매니저가 몸을 던져 막았고 아이돌은 무사했으나 매니저는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다·
누나는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큰 관심은 없다는 듯이 넌지시 내게 물었다·
“너는 저런 일 겪지 않아도 되지?”
“···”
내가 침묵하자 누나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고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말했다·
“팀장 직함 달고 들어갔다며? 그럼 너는 사무실에서 이래라저래라 시키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팀장 직함 달고 돈을 더 받는다고 한들 현장은 뛰어야지· 지금 사람이 없는데···”
애초에 실장을 달아도 현장을 뛰던 것이 전 회차의 나였다·
“아니 새끼야· 그럼 저렇게 위험한 일을 하겠다는 거였어?”
나는 화들짝 놀라 누나를 진정시켰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렇게 위험한 일은 겪지는 않지!”
누나는 내가 현장 일에는 최대한 참여를 피하겠다는 약속과 나부터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겠다는 선언을 한 뒤에야 진정했다·
그런데 누나가 진정하니 이제는 내가 불안해져 있었다·
변론하기 위해 상황을 가정하다 보니 머리에 무수한 천재지변의 가능성이 떠오른 탓이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 사고들을 떠올렸다·
연예계는 욕망의 소용돌이라고 불리는 업계인 만큼 사이코들이 쌔고 쌨다·
방금 염산 테러범 같은 놈들은 뉴스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심심하면 하나씩 튀어나온다·
저렇게 염산까지는 잘 안 나오지만 커터칼 정도는 발에 치였다·
부정적인 방향이더라도 스타의 머리에 자신을 새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또 해외 스케줄이라도 한 번 잡히면 국내의 치안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전 회차에서는 급습하는 팬을 막으려다 이마가 찢어진 경험도 있었다·
그렇다· 이런 연예계 생활을 한다면 불상사는 언제든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위기에 ‘검성의 감각’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나는 퀘스트 창의 보상을 눌러서 ‘검성의 감각’의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칼잡이였던 검성의 감각을 잠시 빌려옵니다·]
검성이라는 양반이 누구인지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라는 말은 참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저 양반의 감각을 빌린다면 염산 테러범 두세 명 정도는 가볍게 두들겨 팰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될지 모르는 연예계에서 보험 하나가 생기는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탐이 났다·
‘깽값 줄 테니까 그 양반 한 번 두들겨 패고 올래? 맞으면 버릇을 고칠 수도 있잖아·’
문득 천아람의 말이 떠올랐다·
어쩐지 그 말이 상당히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아··· 겨울이 할아버지에게 받은 돈이 있어서 깽값 낼 수 있기는 한데·
그런데 합의 안 해주면 그대로 감방 가는 거 아닌가?
가을이와의 관계를 조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나는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며 치열한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때 선반과 벽 사이에 끼워진 뿅망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뿅망치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퀘스트의 내용을 보고 확신했다·
무엇으로든 두들겨 패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
다음날 나는 일정을 마치고 가을이의 집 앞에 섰다·
계획은 이러했다·
나는 가을 아버지에게 내기를 하나 제안한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내게 승리한다면 바로 300만 원을 지급하고 패배한다면 이 뿅망치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도박에 관심이 많아 보였던 가을 아버지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까짓거 뿅망치로 좀 얻어맞을 리스크만 감당하면 300만 원이 공짜로 들어오는 데 왜 거절하겠는가?
허나 이 제안에는 함정이 있다·
바로 저번에 받은 보상인 ‘가능성의 기억’을 사용하여 가을 아버지가 무엇을 낼지 고소를 할지 미리 알고 간다는 것이다·
미래를 아는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당연히 가을 아버지는 연속으로 처맞는다· 두들겨 팼다고 인정되어 퀘스트가 완료될 때까지·
그렇게 아버지가 가혹한 뿅망치 세례에 노출되는 것을 보다 못한 가을과 가현이 막는다·
저번에 계약을 두고 날을 세웠던 기억이 한낱 꿈이었다는 것처럼 외부의 적을 앞에 두고 가을 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다·
그때 밝힌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랑의 매를 들었다고·
반전에 감동한 모두는 기립 박수를 친다·
뒤편에는 희망찬 노래가 깔리고 우리는 손잡고 원을 그리며 도박 치료센터로 달려 나갈 것이다·
···맞다· 사실 그냥 개소리다·
그런데 보상금과 함께 한다면 도박을 반대한다는 나름의 의도는 보일 수 있을 것같았다·
그래봤자 미친놈으로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겠지만··· 아니 형사 고소도 피할 수 없으려나?
세상만사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나는 마음을 다졌다·
회귀 전에 내가 어떠한 결심을 했던가?
퀘스트가 개처럼 짖으라고 시키든 물어뜯으라고 시키던 뭐든 따르기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초심을 떠올릴 시간이었다·
사이코로 보이든 이기적인 개새끼로 보이든 고소당할 위험을 품든 할 수 있는 퀘스트라면 일단 시도 해야 했다·
그야 그게 성공하는 길일 테니까·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부정한다면 근간이 무너진다·
전 회차에 퀘스트를 개무시하다가 뒤통수 후려 맞았는데 이번엔 믿어야지·
그래도 보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보상창을 열어 확인했다· 가을을 영입하면서 얻은 가능성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걸 사용한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가 보일 테니 내가 가을의 아버지를 두들겨 팬 뒤에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미래에서 정말로 고소당하거나 좆되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리스크가 사라지는 것이다·
가을 아버지가 가위바위보에서 무엇을 내는지 아는 건 사실 덤이다·
[‘가능성의 기억’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지금 써버리자· 사용!”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인식이 안 된 건가 싶어서 계속 말해봤지만 역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뭔데 이거? 오류야?”
그때 오류가 아니란 것을 알리듯 하나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가능성의 기억이 적절한 대상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메시지를 손으로 휘적거렸다· 변화는 없었다·
“···적절한 대상이 누군데?”
그거 내 보상이잖아· 왜 남에게 쓰는데?
그때 가을이의 집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가을의 집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
가을은 고된 트레이닝을 마쳤다·
트레이닝은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의 노동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녀는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야 이것은 가을이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요즈음 이어진 삶은 꿈과 같이 달콤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가현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지금의 현실은 가을이 상상조차 꺼리던 것이었다·
너무나 달콤하지만 일어날 리가 없는 상황이라 생각했기에다·
하지만 가을을 둘러싼 환경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마법이 걸린 신데렐라처럼 무도회를 향해 거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을은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태운 지하철에서 그 달콤한 현실을 음미했다· 그리고 이 꿈같은 상황을 만들어 낸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가을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다루었다·
하나하나 전부 챙겨줘야 하는 철모르는 아이처럼·
가을은 솔직히 그 대우가 기뻤다·
그렇게 무조건적인 챙김을 받아 보는 것은 살아가면서 처음이었으니까·
세상 그 누구와 함께하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태양과 함께 있을 때는 느꼈다·
···하지만 어딘지 아쉽기도 했다·
가을은 열매를 맺어가는 그 감정을 가슴 한편에 보물처럼 고이 품었다·
지하철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는 집에 들어섰다·
요즈음 어디에 돌아다니는지 얼굴을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현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가현아 누나 왔어!”
그러나 가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생 유가현이 아닌 가을의 아버지 유대철이었다·
가을은 살짝 놀라면서도 무던하게 인사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런데 어딘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가을 아버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몸에서는 알코올 향이 강하게 났다·
아마 술에 진탕 취한 듯했다·
“···으으윽·”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던 가을은 돌연히 들린 신음에 놀라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배를 붙잡고 쓰러져 있는 가현이 있었다·
“가현아!”
가현은 고통을 참기 어려운 듯 숨을 헐떡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가을은 떨리는 손으로 가현의 손을 조심히 치운 뒤에 복부를 확인했다·
시퍼런 멍 자국이 있었다·
범인은 뻔했다·
가을은 뱀을 마주한 어미 새처럼 아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 이런 짓을 하신 거예요!”
“···돈을 조금 날렸더니 지랄맞게도 땍땍거리더구나· 자기 아비도 몰라보고 말이야·”
아무래도 가을 아버지가 다시 도박에 손을 댄 모양이었다·
가을은 예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악질적인 도박 중독자였으니까·
그가 도박을 그만둘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차선책으로 500만 원만 도박에 사용하기로 약속도 했었다·
“돈 잃은 건 괜찮으니까 일단 가현이를 병원부터···”
“···돈 잃은 거 전혀 안 괜찮아 누나·”
“가현아 누나가 이야기할 테니까 가만히 있어!”
가을 아버지는 가현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은 그것이 무서웠다· 일단 가현을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런 가을의 마음을 모르는지 가현이 말했다·
“누나가 받은 계약금 그거 아버지가 어제 전부 다 날렸어·”
“···어?”
가을은 아니기를 바라며 물었다·
“그 500만 원 말하는 거지?”
“아니 받은 돈 전부·”
그녀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저녁 장거리 사려고 돈 좀 달라고 말하니까 없다고 말씀하시더라·”
“아빠 아니죠? 가현이가 오해하고 있는 거죠?”
“···”
가을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문제가 생겼을 때 회피하려는 태도·
가을 아버지가 익숙하도록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녀는 저 태도에서 답을 알았다·
아버지는 정말로 돈을 도박으로 전부 잃은 듯했다·
“···그게 어떤 돈인데요?”
“···”
“그건 가현이가 미술을 하고 대학을 가는 데 써야 하는 돈이에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노려보는 가을에게 가을 아버지는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
“···가을아· 나도 잘해보려고 한 거야· 지금 가장 힘든 건 나라고· 그러니까 날 너무 자극하지 마·”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을의 안에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요? 가장 힘든 건 아빠라고요?”
가을은 늘 방긋하고 웃어가며 감추었다·
지금의 고통이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제가 더 힘들어요!”
하지만 사실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매일 같이 아르바이트를 최소 3개씩 하고! 그렇게 일하고 돌아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중학교 친구들이 가끔 만나자 하는 것도 매번 거절하고! 그러다가 이제는 연락 자체가 오지 않게 된 것도 받아들이고! 고등학교 다니는 애들이 카페에서 시험공부 하는 걸 부럽게 바라보기만 하고! 예쁜 옷도 포기하고! 귀여운 인형도 포기하고! 댄스 동아리 활동도 포기하고! 노래방도 포기하고! 제가 가졌던 행복이란 행복은 전부 포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참았다·
가을이 포기하지 않으면 참지 않으면 이 위태로운 가족이 바로 무너져 내릴 테니까·
하지만 억눌러오던 울분은 아버지의 무신경한 한 마디에 풀려버렸다·
“아버지가 포기하신 건 대체 뭔데요!”
가을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울분을 담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가을 아버지는 광기 어린 노기를 담아 말했다·
“···내가 뭘 포기했냐고? 너도 가현이처럼 날 무시하는 거냐?”
상황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돌연히 자리에서 일어난 가을 아버지가 뛰쳐나와 가을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컥··· 아빠··· 잠···”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좁은 방의 벽에 몰아붙여져 목이 졸리는 가을의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 희미한 정신 사이로 가을의 눈에 어떠한 메시지가 비추어졌다·
[적절한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가능성의 기억이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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