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7
67화
회귀를 경험했던 카페에서 녹차 프라푸치노 하나를 빨면서 잡무를 처리하던 나는 돌연히 나타난 진강의 과장 석현우가 무릎을 꿇을 기세로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봐야만 했다·
“부탁드립니다· 선 팀장님! 저를 투베어에 받아주십쇼!”
“아니 잘 다니시던 진강은 어쩌시고 왜 그러십니까?”
대기업 기획부보다 대우 잘해주는 곳이 얼마나 된다고 왜 이직하겠다는 거야? 이 양반은·
“···진여름 님을 돕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어려워졌더군요· 원래 수행하던 비서 업무에서 기획 재정 쪽으로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이러면 그녀를 도울 수 없게 됩니다·”
하기야 숙소에 박혀서 연습생 생활을 하는 그녀에게 비서를 붙일 수가 없으니 석현우의 업무는 당연하게도 바뀐 모양이다·
나는 살짝 염려를 담아 물었다·
“그건 좌천이라 봐야 하는 건가요?”
“굳이 따지자면 승진에 가깝습니다· 이번에 차장 직함을 달게 되었거든요·”
“···축하드립니다·”
···괜히 걱정했네·
보수적인 진강에서 아직 30대 초에 불과한 그에게 차장직을 건넸다는 것은 굉장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능력도 있었겠지만 오랫동안 진여름을 보필해 온 것을 진강 내부에서 상당히 고평가한 모양이었다·
저 이례적인 승진 속도를 생각한다면 그의 앞날은 찬란히 빛나고 있다는 평가를 들을 법하다·
“잘됐네요· 새로운 업무가 쉽지는 않겠지만 석 과장··· 아니 석 차장님이라면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선 팀장님!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월급이나 대우가 조금 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가 중요하십니까?”
직장을 고르는데 그거 말고 더 중요한 게 있나?
“진여름 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건 경호원분들이 지켜주실 것 같은데요? 저희 안전에 돈 아끼는 회사 아닙니다·”
그렇게 투자금을 받았는데 안전에 돈을 아끼면 진백호가 정말로 드럼통에 담가버릴 수도 있었다·
우리 투베어가 푼돈 아끼자고 더 큰 것을 잃는 안일함을 가진 회사는 아니었다·
“그런 안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감정의 영역입니다·”
“감정이요?”
석현우는 나를 절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불안합니다· 그 여린 아이가 겪어 내야 할 앞날이요· 분명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돌을 한다는 것은 지금껏 피해 왔던 여론을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는 뜻과 직결하니까요·”
담백하면서도 우직하게 그는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 가장 힘든 순간에 제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약한 힘밖에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만 그 미약한 힘이라도 곁에 있다면 보다 잘 버티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마음은 그때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과도 닮아 있었다·
석현우는 정말 사람 좋은 인간이었다· 옆에서 보기에 조금 답답할 정도로·
···그런데 나는 저런 사람이 좋았다·
“석 차장님의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마음이 좋게 보입니다· 저도 석 차장님과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나라는 사람의 개인적 호불호였다· 나는 석현우처럼 배신은 때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좋았다·
그런데 그가 하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왜 취업 알선을 저에게 부탁하시는 겁니까? 간과하시는 것 같은데 저 투베어에 들어 온 지 두 달도 안 되었어요· 워낙 겪은 일이 많아서 저조차도 가끔 착각하는데 저 신입입니다· 석 차장님·”
“정 취업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말고 정규적인 루트로 들어오세요· 석 차장님은 그럴 능력이 충분한 분이잖아요?”
내가 알기로 그는 고졸 백수였던 나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살벌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진강의 기획부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경력 또한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직장은 전부 이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그가 왜 나에게 매달리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석 차장님· 저 요새 일벌인 게 많아서 눈치가 좀 보입니다· 봐주세요·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투베어 엔터가 아예 인력 모집을 하지 않아서요·”
“···?”
아니 지금도 인력이 없어서 나 혼자 3인분 정도 하면서 구르고 있는데 채용을 안 한다고?
우리 사장님이 정신이 나간···
···그러고 보니 정신은 아니고 후각이 나갔구나·
이혜린도 건너 건너 인맥으로 연결된 사이였다·
송요한은 그냥 내가 데려온 사람이었다·
전부 정상적인 채용과는 거리가 있었다·
안 그래도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회사가 충당 방법이 지인 소개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막막해졌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투베어에 받아 주십쇼!”
석현우가 다시 보였다·
그는 내게 청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박살 난 나의 일과에 업무 분담을 시켜줄 구세주였다·
능력적으로도 엘리트에 가까운 사람이니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석 차장님의 진심· 잘 들었습니다· 같은 남자로서 그런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군요!”
“···선 팀장님! 그럼?”
“다만 석 차장님의 각오를 살짝 보고 싶습니다·”
“각오요?”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지만 그가 탈주하지 않을지 약간의 확인이 필요했다·
“월급이 지금 받는 금액에 비하여 상당히 적을 것입니다· 아마 여름이를 가장 가까이서 보호하는 일을 하려면 로드 매니저의 자리를 담당하셔야 하니까요·”
“전혀 상관없습니다· 돈 쓸 구석도 없는걸요·”
“일정도 지금 하시는 일에 비하여 훨씬 고될 수도 있습니다· 활동을 시작하면 워라벨이라는 단어는 머리에서 지워버리는 게 좋아요·”
“여름 님도 그런 일정을 소화해야만 하니 저도 당연히 그래야겠죠· 오히려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이야 겁나게 마음에 드네·
“각오는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석 차장님이 투베어에 들어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석현우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축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 팀장님!”
감사하긴 뭘 내가 고맙지·
어서 와라· 노예야·
***
“냄새는 어떻습니까?”
평소 석현우가 보여준 성정을 생각하면 당연히 감지견 천아람의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약간 불안하기도 하였다·
이번 회차를 살아오면서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약간 맛이 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석현우에게서 악취를 맡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약간의 긴장을 하고 있는 나에게 천아람은 감탄하더니 말했다·
“이야 선 팀장 어디서 이런 사람을 데려왔어?”
“악취가 납니까?”
“아니? 냄새가 하나도 안나· 수연이 급이야·”
천아람은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말했다·
“내가 살면서 이 정도로 깨끗한 사람은 10명을 채 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대단한 친구네·”
천아람의 후각 테스트도 완전히 돌파한 듯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진강에서 8년간 근무를 하고 차장직까지 달았었다고? 이런 사람이 왜 로드매니저를 하겠다고 해? 솔직히 대우가 좋은 직업은 아니잖아?”
“여름 씨를 딸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직장과 대우를 포기하더라도 그녀를 가까이서 지킬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더군요·”
“음··· 마인드도 참 좋은 친구네·”
고개를 끄덕인 천아람은 말했다·
“단순한 로드매니저라고 생각하지 않고 대우를 좋게 해줄게· 그래도 전 직장에 비하면 부족한 대우겠지만 마냥 섭섭하지만은 않을 거야· ···이 사람은 나중까지 키워봐도 좋을 것 같거든· 오래 보면 좋겠네·”
“최고의 선택입니다 천 사장님!”
기뻐하며 석현우에게 소식을 전하려던 나를 천아람이 붙잡았다·
“잠깐 선 팀장 할 말이 있어·”
“네 편히 말씀하시죠·”
“저번에 겨울이를 소녀 100에 참가시키기로 했잖아? 그거 관련해서 PD가 보고 싶다고 하더라· 이 일 선 팀장이 맡아 줄래?”
“시키신다면 당연히 하겠지만 괜찮으신가요?”
천아람의 인맥으로 연결이 된 일인 만큼 그녀가 담당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었다·
“응 괜찮아· 스케줄에 관련된 부분은 선 팀장에게 전임하겠다고 말했잖아? 그 시기가 생각보다 조금 빨라졌을 뿐이야· 방침은 우리가 회의에서 정한 거랑 같게만 하면 되니 너무 어렵게는 생각하지 마·”
“걱정하지 마세요·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거· 그게 바로 제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갑자기 후회되기 시작하네·”
***
“투베어 엔터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선태양입니다·”
내가 명함을 건네며 인사하자· 여자가 말했다·
“김선예요· 그냥 김 PD라고 부르세요·”
“네 김선예 PD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뭐 그 쪽에게는 영광이겠죠· AD 도 아니고 제가 직접 나섰으니까요·”
“···”
김선예의 다소 무례한 반응에 내가 그저 웃어보이니 그녀는 김샜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는 본론을 꺼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이렇게 시간을 내기는 했지만 당신 회사에 큰 기대는 안 해요· 그래봤자 데뷔 한번 못 시킨 신생 기획사잖아요? 수준이야 뻔하죠· 아는 분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연락을 받지 않았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기획사에 제가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기대하겠어요?”
그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실로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물론 내실을 까보면 역대급 천재 3명으로 채워진 회사였지만·
“그래도 연락해 주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야 하니 까놓고 말할게요· 저희가 여기에 원하는 연습생은 능력이 있거나 끼가 있거나 하는 연습생이 아니에요·”
“그럼 어떤 연습생을 바라십니까?”
“올라가야 할 아이들을 빛내는 조연이 필요한 거죠· 오히려 어중간하게 포커싱을 빼앗는 아이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시면 저는 다른 기획사를 알아볼 거예요·”
김선예는 지루하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말했다·
“대충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으시죠?”
아이고 당연히 알지· 올릴 놈 이미 정해 놨으니 눈치껏 깔게 하나 보내라 이거잖냐?
내가 댁이 좋아 죽을 만한 영상이 있지·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예 어떤 말씀인지 아실 것 같습니다· 눈치껏 적당히 받쳐주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거죠?”
“신생에 다니시는 것치고 이해는 빠르시네요·”
“하하 그래야 먹고 살죠· 마침 적당한 연습생이 있는데 이 친구는 어떠신가요?”
나는 이전에 천종훈에게 보여줬던 개버릇의 악마 겨울이를 보여주었다· 예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그 시절의 모습을 말이다·
영상을 잠깐 본 김선예는 조소하더니 말했다·
“푸흡 웃기기는 하네요· 이 정도라면 예능용으로 3분 정도는 잡아 드릴 수도 있겠네요· 딱 제가 기대하던 수준의 저렴함이에요· 나름 시청률에 쏠쏠한 영향을 주겠네요·”
“감사합니다· 기대하시는 그 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할 것까지는 없어요· 그다지 기대도 안하니까요·”
아니 이건 감사할 일이 맞았다·
댁은 지금 방송을 뒤짚어 엎어버릴 씨앗을 제손으로 심은 거니까·
내정된 11명을 씹어먹을 겨울이의 악마적 재능을 보여주마·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소녀 100’의 첫 녹화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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