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7화
프로젝트의 최종 담당자로서 첫 걸그룹 제작을 앞둔 천종훈은 머리가 쭈뼛하고 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고인이 된 트로트 가수 성훈의 매니저를 자처한 통화기 너머 상대의 발언 때문이었다·
“뭐 병결이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일 연습에 참여하지 않은 연습생이 있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연습에 있어서 컨디션 난항을 보이는 연습생을 완벽주의자인 천 팀장님이 선택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
“팀 컬러는 천 팀장님이 참여한 앨범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유추하게 되었습니다· 전 천 팀장님 팬이거든요·”
자신이 지향하는 걸그룹의 컬러가 무엇인지 맞힌 것은 백번 양보해서 납득할 수가 있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작업 전체에 전반적으로 묻어 나왔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수많은 연습생 중 4명의 멤버를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확정 지은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4명을 확정 지은 것도 어제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천종훈은 부정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하여 악질적인 장난이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4명의 맴버를 확정한 건 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진 일이야·
다른 어디에도 공표한 적이 없었지·
유출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없다·’
‘그러니 성훈의 매니저였다는 저놈은 유튜브 촬영을 진행하며 잠깐 본 것만으로 소속 연습생의 모든 면을 해부하듯이 바라본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천종훈은 그 말도 안 되는 안목에 전율했다·
“···시간 낭비는 아니겠군·”
그 한마디가 그의 오만한 자존심을 뚫고 나온 순수한 찬사였다·
천종훈은 스스로가 업계에 알려지지도 않은 애송이의 업적에 경외심을 느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
본인이 실력으로는 업계의 탑 중 하나라는 명백한 자존심을 가진 그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더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몰랐을 수도 있으니 하나 경고하지· 이 번호는 매우 사적인 번호야· 당연히 누군가에게 퍼트릴 여지가 없는 사람들만 알려주었지·”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듯이 천종훈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확신이 사라진 적이 없었어· 그런데 이제 나는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자네가 퍼트렸다고 생각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6일 뒤· 아침 5시에 시간을 10분 정도 비울 수 있어· 그때 SS의 C-3 연습실에서 한 번 보도록 하지· 내 이름을 댄다면 들어올 수 있을 거야·”
“시간을 내주시는 데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내 시간을 소모하는 데 있어서 합당한 대가가 되기를 바라지· 실망한다면 그 대가를 다른 데서라도 찾으려 할 것 같거든·”
“연습생의 자료를 보내 드릴까요?”
천종훈에게는 그 한마디가 도발처럼 느껴졌다·
‘너는 이런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가치를 알아볼 수 있잖아?’라는 의미를 담은 도발처럼 말이다·
“필요 없어· 나는 내 눈으로 본 녀석만 평가하니까·”
천종훈은 상대의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저렴한 자존심 챙기기였다·
그런 저급한 행동을 해야만 할 정도로 그의 프라이드는 명백하게 금이 가 있었다·
“그래 한번 봐보자고· 그 잘나신 안목으로 소개하겠다는 연습생을·”
***
···아니 대가는 듣고 통화를 끊어줘야지·
천종훈이 전화를 덜컥 끊어버리자 나는 당황했다·
아직 겨울을 소개하는 대가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양반 설마 SS에 연습생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이 단숨에 무급노동이 되어버리니까·
나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어야 이 고생을 하는 의미가 있지 않은가?
조금 추해지더라도 다시 전화를 걸어 대가에 대한 확답을 들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니 겨울이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천종훈 팀장이 6일 후에 SS의 C-3 연습실에서 한번 보자는데? 그때 어지간히 얼빠진 모습만 안 보이면 받아줄 것 같아· SS 공채도 잘 안 하는 곳인데 축하한다· 야·”
글로벌 오디션이라고 3차에 걸친 오디션 끝에 몇 년에 한 번 전 세계의 연습생들을 끌어가는 것이 SS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연예계에 족적을 남기는 거대한 공룡과 같은 기업인 만큼 이런 식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이례적인 기회는 서류 장르별 춤 3개 장르별 노래 3개 카메라 테스트 인성 테스트 단기 트레이닝 과정 등을 모두 통과해야 하는 정규적인 루트보다는 더 합격 가능성이 높았다·
겨울은 매우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겨울 또한 이 가치를 알았는지 내 말을 듣고는 내 가슴에 머리를 박고 끌어안은 채로 방방 뛰었다·
자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새끼 염소 같아서 묘했다·
그런 겨울을 보니 모든 일이 어떻게든 잘될 것 같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들었다·
얘처럼 인생이 막 굴러가는 것 같아도 어떻게 살아날 구멍이 나오지 않는가?
천종훈이 프라이드가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입을 싹 닦지는 않을 것이다·
전회차에 사적인 전화번호를 알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일자리를 소개해 달라는 작은 부탁은 그냥 들어주겠지·
고로 당일 좋은 모습을 보인 뒤에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흐아아아앙! 감사해요!”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진정하자·”
엉겨 붙은 겨울을 떼어낸 뒤에 혹시 몰라서 가져왔던 휴지를 그녀에게 건네자 겨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닦았다·
“진정했냐?”
“···네·”
“그래 마음고생 많이 했다· 이제 집으로 가서 푹 쉬어· 5일 뒤에 다시 서울에 올라오면 내가 안내해 줄게·”
겨울은 고개를 바람 소리가 날 기세로 붕붕 하고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머뭇거렸다·
“···저·”
“응? 왜 역까지 태워줘?”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러니까”
겨울의 눈이 빙글빙글 돌고 볼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지간히 긴장되는 듯 손은 덜덜 떨렸고 입은 열릴락 말락 뻐끔거렸다·
대체 뭔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 걸까?
“뭔데 뭐 또 망한 일 있어? 이미 추한 모습 많이 보였으니까 그냥 말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천종훈에게 겨울을 빌미로 거래를 걸 때까지 그녀의 문제는 그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막말로 갑자기 아프다고 하면서 천종훈과의 대담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럼 나는 그냥 좆되는 거다·
그러니 6일간은 무리가 안 가는 선이라면 케어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 그럼 6일만 재워주세요!”
“그냥 집에 가라 좀!”
기껏해야 오만 원 한 장만 더 빌려달라고 하는 것을 예상했던 나는 기습적으로 뺨을 맞은 것 같았다·
자꾸 잊는 것 같은데 나랑 너는 어제 처음 본 사이에요·
“뜨신 밥 나오는 집 놔두고 왜 나한테 재워 달래?”
“···오디션을 보기 전까지는 예지를 보고 싶지 않아요·”
겨울이 살던 지방에서는 트레이닝 센터가 하나밖에 없기에 연습하려고 한다면 예지를 마주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트레이닝 센터에 가서 연습하지 않더라도 작은 동네에서 일상을 예지와 함께했기에 어떻게든 마주하게 될 거라고 한다·
그리고 겨울은 그런 예지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자신의 마음이 꺾일 것 같다고 했다·
애초에 예지와 함께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으니 어쩌면 오디션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자신은 유약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자조하면서·
참으로 찐따 같은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누나분이 거부감을 느끼시는 건 알아요·제 행동이 더할 나위 없는 민폐라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분께 엎드려 빌 기회라도 주셨으면 좋겠어요·”
겨울은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를 지금 놓치면 이전의 저로 돌아갈 것 같아요· ···무기력하고 눈치만 보는 쓸모없는 저로요·”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겨울에게는 계기가 필요한 듯했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갈 계기를·
그리고 그 계기가 지금은 나인가 보다·
내가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겨울은 돌연 내 바짓자락을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도와줄 사람이 되어 주겠다 하셨잖아요! 아저씨 말대로 저 도와줄 사람이 없단 말이에요! 혼자라고요! 지인도 없다고요! 루저 찌질이 찐따 외톨이 버러지라고요!”
그 래퍼토리 이미 써먹었잖니·
“이미 충분히 도와줬잖아!”
“부탁해도 괜찮다면서요!”
“그 사람이 부담되면 거절하고 끝난다고도 말했잖아! 나 지금 많이 부담돼· 그러니까 거절할 거야· 한겨울 씨 이 손 놓으시죠!”
“기왕 도와주신 거 조금만 더 도와줘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지금 놔주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은혜를 갚는 거예요· 한겨울 씨!”
겨울을 뿌리치려고 애를 쓰던 도중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와 그녀의 촌극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텔 앞에서 교복을 입은 미성년자가 아저씨에게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매달리는 모습이다·
무수한 신고의 세례를 받을만한 상황이다·
“잠깐 알았으니까 일단 이거 놓고 일어나서 다른 곳에서 해!”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요! 번호 바꾸고 잠수해 버릴 거잖아요·”
“번호 안 바꿀게! 잠수 안 할게! 일단 좀 놔보라고!”
편의점 알바녀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마· 경찰에 불법 성매매 따위로 신고하는 것 같았다·
겨울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꼬이고 있는지 관심도 없다는 듯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코알라 마냥 매달렸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불온한 시선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 정도로 몰려있었던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말했다·
“내가 누나에게 빌어볼게! 같이 빌면 먹힐지도 몰라!”
그 말이 끝나자 겨울은 코알라 자세를 풀고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나도 모르겠다 이젠···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