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9
[11층에 입장합니다.]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높다란 나무들. 바닥에는 이끼에 가까운 풀이 초록색 카펫처럼 얇게 깔려 있고 서늘한 흙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빽빽한 나무 틈새로 비치는 시원한 햇살. 시간상 아침인지 안개가 옅게 깔려 있고 발목에 스치는 풀은 이슬로 촉촉하다.
“이야. 느낌 있네.”
지구로 비유하자면… 노르웨이보다는 따듯하고 프랑스보다는 추운 딱 덴마크의 숲 정도 되는 느낌이다. 적당히 쌀쌀한 하지만 일말의 따스함이 있는 그런 숲 말이다.
“스읍 하아.”
숨을 크게 들이켜 자연의 향취를 만끽한 뒤 시선을 내려 몸 상태를 확인한다.
“또 이거야?”
몸에 걸쳐진 것은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지경의 가죽 갑옷. 아무래도 별도의 장비 아이템을 착용하고 탑에 입장하기 전까지는 이 가죽 갑옷이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모양이다.
그 외에는 투명 장갑도 잘 있고 검집도 잘 있고 아공간도 잘 있고… 있을 건 다 있었다.
“스으으으읍…”
그렇게 몸 상태 체크가 끝나자 나는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만 이번에는 목적이 다르다.
“지원아!!!”
지원아 지원아 지원아 지원 지 지 지…
우렁찬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타고 퍼진다. 11층이 아직 어떤 층인지 파악도 못 한 마당에 이래도 되는 거냐고? 당연히 안 된다. 어그로가 끌려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이딴 식으로 구는 건 말 그대로 멍청한 짓이다.
“회귀자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그래 내가 회귀자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11층에 들어오자마자 서로가 보이지 않을 경우 나는 이렇게 최지원을 찾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감각이 예민한 최지원은 이 소리를 듣고 금방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제 엘릭서를 마셔 보실까. 나만의 작은 아공간을 열어 엘릭서를 스윽 꺼냈다. 11층이 막 시작된 지금이야말로 이 엘릭서의 성능을 테스트 해보기 적합했기 때문.
만약 감기 기운이 심각해지면 엘릭서를 마시기로 방침을 정해 놨지만 엘릭서가 효과가 있을지는 완전한 미지수. 리스크가 없는 지금 시점에서 엘릭서를 마셔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테스트 해보는 과정이 필요했다.
엘릭서를 진작 1층에서 복사해서 먹지 않고 굳이 11층에 들어온 다음 먹는 이유가 뭐냐고?
혹시 내가 1층 보상으로 얻었던 단약이 기억나는가? 그것과 비슷한 이유다.
단약은 1층의 기능을 사용하여 복사해서 먹더라도 중복으로 능력치가 오르지 않았는데 엘릭서는 아예 복사 자체가 되질 않았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탑에서 막아 놓은 모양.
하긴 엘릭서도 복사가 되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기긴 했을 것이다. 엘릭서 원본을 하나 얻는 순간 사실상 전 세계의 모든 플레이어가 엘릭서를 마실 수 있었을 테니까. (원본을 내버려 두고 복사본만 끊임없이 돌려먹는다면 이론상 가능하다.)
“후우.”
꿀꺽. 꿀꺽. 꿀꺽.
고풍스러운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엘릭서를 한 방울 한 방울 음미하며 들이킨다. 식도에서 시작된 청량함이 이내 몸 전체로 퍼져나가며 기분 좋은 떨림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엘릭서 한 병을 다 마신 결과 효과는 놀라웠다.
“이야 이게 엘릭서인가?”
잔존하던 감기 기운이 완전히 싹 가셨다. 간질간질하던 목도 살짝 느껴지던 열감도 전신에 퍼졌던 피로감도 모조리 사라진 채 육신이 순정 상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역시 이게 엘릭서인가. 이름에서 느껴지는 포스부터 포션과는 차원이 다르다. 음 그래그래. 엘릭서가 효과가 없으면 안 되지. 판타지 세계 치료제 끝판왕인데 말이야. 이것으로 혹시 몸 상태가 최악으로 달한다면 엘릭서를 먹으면 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내심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더니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준호야!”
“어 왔어?”
“응. 별로 안 멀더라.”
인기척의 주인은 때마침 도착한 최지원. 애초에 스타팅 위치가 근처인지라 오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고 한다.
“저쪽에서 온 거야?”
“맞아. 회귀하고 나면 이번엔 네가 나 찾으러 와.”
“알았어.”
엘릭서의 효과도 확인했고 11층이 여러 명이 진행하는 층인 것도 확인했다. 무엇보다 최지원이 함께다. 11층에서 뭐가 나오건 손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볼살을 깨물었다.
[피해를 입었습니다.]
[11층에 처음 입장한 순간으로 회귀합니다.]
***
“…뭐가 보인다는 거지?”
“응. 저 멀리 벽 같은 거 안 보여?”
“…안 보이는데.”
“괜찮아. 사실 나도 붕붕이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희미하게 보여서 몰랐을 거야.”
회귀하자마자 최지원과 합류한 뒤 우리는 울퉁불퉁한 흙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면 이 길 끝에 뭔가 있다는데 나는 아무리 눈을 찌푸려도 도통 보이지 않더라.
<11층>
-클리어 조건 : 통행석을 구매하여 천사에게 제출하십시오.
“구매?”
타이밍 좋게 떠오르는 메시지 창. 주목할 점은 통행석을 ‘구매’ 하라는 부분이다.
구하라는 것도 아니고 찾으라는 것도 아니고 구매하란다. 구매라는 단어에는 거래라는 전제 조건이 깔려 있고 거래라는 것은 지성인 간의 교류를 기반으로 한다.
“상점 역할을 하는 이계인이 등장하는 거 아니야?”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최지원. 그녀의 말마따나 구매라는 것은 상점 혹은 상인의 등장을 암시하고 있었다. 아니면 뭐 자판기 따위가 존재할 수도 있겠네.
“아 이제 나도 보인다.”
의견을 교류하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최지원이 말한 벽 같은 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정확히는 나무로 된 방벽이다.
“오…”
상단 부분을 뾰족뾰족하게 깎은 통나무가 촘촘히 이어져 위협적인 형태의 벽을 이루고 있다. 보자마자 떠오르는 것은 ‘요새’ 라는 단어. 중세 시대의 요새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여기서 ‘통행석’을 구하는 건가 본데?”
아까 메시지 창이 ‘거래’를 언급한 것도 그렇고 울창한 숲 사이로 길이 난 것도 그렇고 11층에서는 분명한 문명의 향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2층처럼 이계 어딘가에 온 것 같다.
“…입구가 어디지?”
“걷다 보면 나오겠지 뭐.”
입구를 찾아 요새 외곽을 따라 쭉 걷다 보니 커다란 나무 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요새의 문이 으레 그렇듯 대문은 닫혀 있고 옆에 난 쪽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우와.”
아니 사람이 아니다. 키가 내 허리춤에 올 정도로 작다. 수염이 무성하다. 그러나 전신은 근육으로 울퉁불퉁.
“드워프다.”
창작물에서 숱하게 본 드워프가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예티나 고블린을 봤을 때도 신기했지만 드워프는 그 이상의 감동이 있었다.
“큼큼 안녕하세요?”
나는 방금 막 나무 요새에서 나와 큼직한 가방을 메고 가는 한 드워프에게 말을 걸었다. 고블린과도 말이 통했으니 드워프와도 말이 통할 거란 계산이었다.
“…”
그러나 쿨하게 나를 무시하고 가는 드워프.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고 시크하게 걸어간다.
“…저기요?”
뭐지? 귀가 먹었나? 아니면 진짜로 내가 보이지 않는 건가? 이것도 탑의 기믹인가 싶어 녀석의 팔을 붙들었지만.
“…!”
파악!
마치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강하게 팔을 뿌리치는 드워프. 그는 아주 짧게 나를 노려보더니 다시금 제 갈 길을 갔다.
“…왜 저래?”
“당황스럽네.”
뭐지. 처음 보는 사이에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드워프는 원래 다 저런가?
혹시 방금 그 드워프만 그런 건가 싶어 다른 드워프에게도 말을 걸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몰찬 냉대.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드워프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흠.”
“…”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최지원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나는 침음성을 흘리고 있던 와중.
“거기.”
“?”
“방금 오셨나요? 아니 무조건 방금 오셨겠군요.”
대문과 이어진 대로 근처에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볼까?”
“그러자.”
목소리의 진원지로 향하자 가죽 갑옷을 입은 일련의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단순히 앉아 있기만 했다면 그냥 쉬고 있는가보다~ 했겠지만…
“…왜 그러고 있어요?”
저들은 상태가 심히 좋지 않아 보였다. 볼은 홀쭉하고 몸은 때투성이에 머리는 떡지다 못해 굳어 있다. 거지꼴이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우리와 똑같은 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저들은 플레이어. 하지만 저들이 플레이어라고 하면 상황이 굉장히 이상해진다.
최초의 튜토리얼이 시작되고 3달이 흘렀다지만 지금 11층에 들어올 정도면 최상위권이다. 당장 한국 최강 최지원이 이제 막 11층에 입장한 참이었으니.
최초의 튜토리얼 혹은 그에 준하는 시기에 탑에 소환되어 우리보다 한 달의 시간이 더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증거일 텐데. 이렇게 거지꼴로 있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최지원?”
무리 중 하나가 최지원을 알아봤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마침 그 사람이 무리의 대표였던 모양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
“반갑습니다. 저는 펠릭스 호프만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펠릭스 호프만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탁한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잘생긴 게르만인이었다. 물론 그 ‘잘생김’은 땟국물이 없을 때를 가정한 묘사다.
“최지원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하는 펠릭스와 최지원. 악수를 마친 최지원의 장갑에 시커먼 검댕이 묻어 있다.
“…”
펠릭스 호프만이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마 독일에서 제일 잘나가는 플레이어라고 들었는데. 그런 인재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단 말인가.
“…저희가 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선에 담긴 의문을 읽었는지 내가 생각하던 주제를 끄집어내는 펠릭스.
“일단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핵심만 요약하자면 간단합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펠릭스의 목소리에는.
“…11층은 클리어가 불가능한 상태로 변했습니다.”
진한 절망감이 담겨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우1비님이 팬아트를 그려 주셨습니다…! 최지원과 주인공의 재회 장면을 그려 주셨는데 감동 또 감동…
팬아트 게시판에 있으니 혹시 관심 있으시면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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