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3
“최지원. 맞죠? 제안할 게 있어요. 드워프 마을 싹 엎어 버리자구요. 어때요?”
이게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다. 참다 참다 못해 폭발한 플레이어들이 드워프들을 엎어버리기로 결심하는 것.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냥 탑에 들어오자마자 차별받고 박해받고 저 치들이 개지랄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해요?”
말하던 남자가 뒤쪽을 향해 턱짓하자 약 스무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옷은 흙과 먼지로 온통 거무튀튀했으며 얼굴에는 진한 피로가 쌓여 있었다.
“…펠릭스?”
“…”
개 중에는 독일의 플레이어 펠릭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자신이 하는 짓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아는지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11층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싹 모았습니다. 꼴을 보면 아실 수 있겠지만 다들 지쳤습니다. 이유 모를 악의를 참는 건 오늘부로 끝입니다.”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남자.
“드워프들을 몰살시키자는 사람도 있지만 전 그건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새의 주도권은 우리 플레이어들이 잡아야 합니다. 목숨줄을 저 미친 드워프들한테 맡겨놓을 겁니까? 2층의 영웅 최지원. 당신이 함께라면 우린 아주 손쉽게…”
“잠깐. 잠깐만요.”
최지원이 정색하며 남자의 말을 멈춘다.
“우린 방금 상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왔습니다. 조금만 진정해 보세요.”
“…대화를 해 주던가요?”
“네.”
바글바글하게 모인 플레이어들을 슥 훑어본 최지원이 조금 전 상점 주인과 나눈 대화 내용을 쭉 읊었다.
“그러니까 3일만 더 기다리면 된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
드워프들과 이미 이야기를 나눴을 줄은 몰랐던 건지 우물쭈물하는 남자. 그러자 이번에는 뒤에서 관망하던 한 여자가 언성을 높인다.
“11층에서 나갈 수 있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우리가 얻지 못하는 보상은 어떡합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앞으로의 층은 11층을 정상적으로 깼다는 것을 가정하고 만들지 않았겠어요?”
“…”
이번에는 역으로 최지원의 말문이 막혔다.
맞다. 아마도 12층부터는 11층에서 정상적으로 파밍을 마쳤다는 가정하에 난이도가 설정되어 있을 것이다. 튼튼한 갑옷이 있어야 한다든가 날카로운 무기가 있어야 한다든가 캠핑용 세트가 있어야 한다든가.
“마냥 맨몸으로 11층을 깨서 받을 불이익은 어떡하죠? 전 뭐라도 챙겨 가야 하겠는데요.”
여자가 한 말대로 11층을 단순히 ‘클리어’ 했을 경우엔 나중에 크나큰 스노우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래를 모르기에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다.
“맞아.”
“최소한 무기라도 하나 있어야지. 안 그래?”
여자의 말에 공감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플레이어들.
“…그렇다고 해도 폭력은 안 됩니다.”
“왜죠?”
“통행석을 만드는 주체가 드워프들이기 때문이죠. 정확히는 상점 주인이 만들고 있습니다.”
“…”
최지원이 통행석 이야기를 꺼내자 모든 플레이어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만에 하나 드워프들이 통행석을 만들기를 멈춘다고 칩시다. 우리는 통행석이 있으니 성공적으로 깨겠죠. 그다음으로 온 사람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통행석을 주워서 깬다고 칩시다. 그런데 통행석이 다 떨어지고 나면요?
“…통행석을 만들게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고문이라든가…”
“시킨다고 만들겠어요? 드워프들 성격이 완전 고집스럽던데요. 억압당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하더군요.”
최지원은 방금 상점 주인과의 대화에서 느꼈다. 드워프들은 장인답게 보통 고집이 센 게 아니다.
창작물에서도 드워프가 드래곤의 노예라든가 인류의 노예로 나오기도 하지만… 결코 노예로 삼을 수 없는 외골수적인 종족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11층의 드워프들은 명백한 후자였다.
“뭘 하건 저들을 핍박해선 안 됩니다.”
“…”
최지원이 그렇게 못 박자 드워프들을 싹 엎어버리자던 의견은 그 힘을 잃었다.
“씨발 그래서 우리 보고 뭐 어쩌라는 겁니까.”
직후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터져 나오는 울분.
“우리가 뭘 잘못했어요? 그냥 오자마자 저 치들이 개지랄을 떨고 있는 거 아닙니까.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왜 이 모양 이 꼴로 있어야 합니까. 안 그래요?”
“…”
“우리가 왜 탑을 오릅니까? 강해지려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살려 보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참아야 합니까? 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까? 예?!”
그렇다. 마냥 이 사람들을 탓하기도 어려웠다. 이들은 정말로 잘못한 거 하나 없었으니까.
플레이어들과 드워프. 양측 다 억울하다는 것은 이해한다. 정작 가해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피해자들만 남아 서로를 증오하는 상황이었으니.
“…일단 참겠습니다. 달리 방법도 없으니…”
“후우 3일이나 더 풀떼기를 먹어야 한다고?”
게다가 플레이어들도 완전히 이성을 잃은 건 아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간신히 진정하고 바닥에 주저앉는 게 그 증거다.
“…준호야.”
“…응.”
“이거 어떡하지…”
그제야 나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최지원. 양쪽 입장에 모두 공감이 갔으니 고민이 더할 것이다.
“일단 최대한 정보를 모으고… 회귀를.”
그렇게 내가 최지원과의 회의에 돌입하려던 순간.
“…최지원 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
“…?”
초췌한 몰골의 어떤 플레이어가 최지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 사람은 또 뭐야.
**
“제가 죽였습니다.”
자신을 메이슨이라 밝힌 남자가 외진 곳으로 오자마자 처음으로 한 말이다.
“이거…”
주섬주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메이슨. 처음엔 뭐 이상한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화려한 색감의 붉은 버섯이었다. 그것도 한 입 베어 문 흔적이 남은.
-미친 광대의 미소 [C+]
-전통적으로 마약 제조에 사용되는 버섯. 혼돈의 마력을 품고 있어 먹은 사람이 미친 광대처럼 웃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정말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잘못하기라도 한 양 가지런히 무릎을 꿇은 메이슨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친구가 숲에서 구한 이 버섯을 한 입 먹었는데…”
“먹었는데?”
“황홀경에서 깨어나 보니… 제 몸도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눈앞에는 죽은 드워프가…”
이젠 눈물뿐만 아니라 콧물까지 질질 흘리며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오열하는 남자.
“처음엔 그저 두려워서 숨겼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하니… 죄책감 때문에…”
“잠시만요. 잠시만요.”
메이슨의 어깨를 짚어 진정시킨 나는 강제로 그의 상체를 일으켜 시선을 마주했다.
“살인이 두 번인 건 알고 계셨나요?”
“…네.”
“두 번 중에서 어떤 건입니까?”
“첫 번째입니다…”
나를 보며 얘는 누구지? 싶어 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 남자. 그러나 이 남자가 진범이라면 이야기가 좀 요상해 진다.
“제가 드워프들한테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데 살인이 일어난 시점에 급히 돈을 쓰고 떠난 사람들이 있다고 했는데요.”
“그 사람들은… 희귀한 광물을 구해서 떼돈을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단순한 우연이었다고요?”
“네…”
“…”
이런 씨발. 나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게 그냥 우연이라고? 진범은 여기 있고?
아니다. 이 남자가 진범이라고 속단하기엔 이르다.
“당신은 왜 진작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죄책감도 있겠지만 돈도 없었습니다.”
“드워프가 가진 걸 턴 거 아니에요?”
“제가 깨어났을 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드워프의 것도 제 것도…”
“이런 씨발.”
이번에는 욕설을 육성으로 뱉고 말았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메이슨이란 남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만을 말했다는 가정하에 이 남자 또한 이용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혹시 당신한테 버섯을 먹으라고 부추긴 사람이 있었습니까?”
“…네…. 장뢰라는 중국인 친구가…”
“아오…”
답답함에 머리를 벅벅 긁어 보지만 그런다고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혹시나 싶어 메이슨에게 마지못해 물었다.
“…그래서 그 중국인은 지금 어디 갔는데요?”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아.
“당신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특성이 S급입니다…”
“…”
고구마. 압도적인 고구마의 향연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순히 특성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병신이 여기까지 올라와도 되는 것일까. 최근 인터넷상에서 좋은 특성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징대는 글이 정말 많았는데 한순간에 그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이제 뭐 어쩌려고요.”
“…드워프들에게 자수하려 합니다…”
“일단 가봐요.”
“…네…”
벌게진 눈을 부비는 남자가 충분히 멀어진 뒤. 나와 최지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드워프 살인의 진범은 따로 있었다.
대충 진상의 흐름이 그려진다. 저 메이슨이라는 남자가 호구라는 사실을 간파한 장뢰. 마침 마약 성분의 버섯도 하나 있었고 적당한 사냥감도 포착했다. (때마침 이용하기 좋은 마약 성분의 버섯이 있는 건 좀 의아하긴 하다.)
아무튼 타이밍을 재던 장뢰는 메이슨에게 버섯을 먹인 뒤 드워프를 살해. 귀중품을 대충 챙기고 헤롱거리는 메이슨의 몸에 피를 치덕치덕 발랐겠지.
깨어난 메이슨은 버섯에 취한 자신이 만든 참상이라고 지레짐작 했겠고. 어쩐지 첫 살인은 증거가 너무 명확하다 했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두 번째 살인도 장뢰가 저질렀을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다.
“장뢰라는 놈. 찾을 수 있을까?”
“찾으면 뭐 어쩔 건데.”
최지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실로 나가서 진범을 찾으면? 찾으면 뭐 어쩔 건가.
놈도 나름 플레이어일 텐데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 자기가 했다고 제 입으로 털어놓을 리도 없다.
뭐 초등학생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나쁜 새끼라고 어필할 리가 있나. 애초에 중국인인지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걔네 인터넷도 뭐 다른 거 쓰잖아.
그리고 설사 찾아서 조지고 시원하게 참교육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망가진 11층을 복구하는 일에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냥 화풀이에 불과한 것이다.
“어휴 피곤해.”
이건 보통 고구마가 아니다. 만약 저 메이슨이라는 놈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이 있다면 댓글 창은 이미 하차 댓글로 가득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최상위권 플레이어라는 새끼가 사이코 한 명한테 우롱당하며 굴러간 눈덩이가 11층이 망가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미 플레이어들과 드워프들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쌓였고 11층이 본래의 기능을 하기엔 요원해 보인다.
드워프들에게 이 상황을 잘 설명한다고 해서 그들의 분노가 풀릴까? 그럴 리가.
결국 플레이어가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 아니겠는가.
꼬이고 꼬인 상황.
이 상황을 해결할 묘책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한데?”
“지원이 네가 좀 고통스러울 수 있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있긴 하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최지원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나도 가능하면 택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지만… 선택지가 따로 없었으니.
“난 괜찮아. 진짜 너무 이상한 것만 아니면.”
상여자 답게 어깨를 으쓱이는 최지원. 그녀가 진심으로 괜찮아 보이니 괜찮겠지.
“일단 내 계획은 간단해. 드워프들이랑 플레이어들을 강제로 붙어 다니게 만들 거야.”
“그게 가능할까?”
“내가 군대에서 하나 배운 게 있거든.”
“…?”
“어색한 동기들 사이에서 전우애를 쌓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군대에서도. 사람들끼리 가장 쉽게 친해지는 방법은…
“공동의 적이 있으면 돼.”
바로 윗사람을 욕하며 친해지는 것이다.
그렇다.
공동의 적이 있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동지 의식이 돋아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동의 적이 있냐고?
없다.
없으면…
만들어야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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