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9
천재란 무엇인가.
날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천재가 아니다. 그건 회귀 빙의 환생 중 하나라고 봐야 한다. 나는 만약 내 6살짜리 자녀가 애늙은이처럼 군다면 진지하게 빙의나 환생을 의심할 것이다.
그럼 천재란 무엇인가. 남들보다 학습 속도가 빠른 자를 뜻한다. 같은 상황에서 더 많은 정보를 끌어낼 수 있는 자를 뜻한다.
즉 천재란 항시 경험치 3배 쿠폰을 사용하고 있는 자들을 뜻한다.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필연. 세계는 천재에게 호의적이므로 덤으로 드랍률 +200% 버프까지 받고 있다고 봐야겠지. 같이 나이를 먹었는데 천재가 레벨도 아이템도 훨씬 좋은 상황이 나오는 것이다.
“왜… 왜 안 돼?”
그러나 게임에서 레벨이 높으면 높을수록 경험치가 느리게 오르는 것 또한 상식. 10레벨이 11레벨을 찍는 것과 100레벨이 101레벨을 찍는 것이 다르고 수능 9등급이 8등급이 되는 것과 2등급이 1등급이 되는 것이 다르다. 하물며 최지원은 검술에 있어서는 같은 나이대의 정점이다.
“왜 안 되냐구우…”
처음엔 최지원도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주어져서 좋다며 희희낙락하며 수련을 시작했었지. 평소 걸리던 부분이 있다고 하기도 했고.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그렇게 만 하루가 지났을 즈음 최지원은 자신만만하게 바위에 도전했고.
깡!!!
“…어?”
바위에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완전히 전력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 섬전의 심장 한 번 써봐. 아이템도 다 장착하고.”
“그래야겠다.”
최지원의 전력은 이런 게 아니다. 그녀는 탑에서 얻은 각종 특성에 더해 아이템까지 모조리 장착한 다음 다시 한번 바위에 도전했고.
깡!!!
“…”
또 실패했다. 바위는… 멀쩡했다.
“그… 지원아?”
“지원이가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는데.”
덕분에 난 충격받은 최지원 대신 붕붕이와 밥을 먹어야 했다. 이 녀석은 검이라 그런지 뭐든 잘 먹더라.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 오늘.
“으으…”
포니테일마저 풀고 산발이 된 머리로 동굴에서 나오는 최지원. 아까 붕붕이가 몰래 (진짜 몰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말해주기로는 검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검술 A 등급인 내가 감히 평가하건대 최지원의 검술은 흠이 없다. 그녀는 항상 정석을 택하지만 그 정석의 퀄리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케이스라고 해야 하나. 실제로 그녀와 대련을 해보면 서서히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검을 맞대는 모든 순간에서 내가 손해를 보게 되고 결국 도박 수를 강요당하더라.
그런 그녀가 검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낸다고? 나는 잘 모르겠지만… 최지원은 느낄 수 있는 그런 흠결이 있겠지. 검에 있어서는 나보다 그녀가 더 잘 알 것이므로 나는 그냥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난 우리 지원이 믿어! 파이팅!”
“…고마워 고맙긴 한데… 왜 이리 속이 쓰리지…”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흐른다.
**
지난 이주간 16층에 머무르며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인간 관찰이다. 딱히 할 게 없으니 바쁘게 돌아다니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매일 새로 들어오는 신입들을 보며 저 사람은 언제 나갈지 상상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사람들의 유형은 다양했다.
“이거다.”
홀로 무언가를 깨작거리다 깨달음을 얻어 순식간에 16층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하늘이여!!! 왜! 나는! 아직도!!!”
뭔가 열심히는 하는데 성과는 없어 절망감에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왜 그러는지 슬쩍 물어보니 뭔가 희망이라도 보이면 더 노력할 텐데 아예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다고 했다.
“전… 멍청이입니다… 그냥 특성만 좋은 멍청이라구요… 이러다 여길 평생 못 나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글러 먹었다고 훌쩍거리는 남자를 보며 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아나엘.”
“네 준호 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짜 너무너무 재능이 없어서… 평생을 노력해도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여기 쭉 갇혀 있어야 하는 거야?”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케이스. 내가 지닌 모든 성장성을 다 써버려 16층에 영구적으로 갇히는 케이스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아뇨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나엘의 답변은 놀라웠다.
“있다고?”
“네! 여기 이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은빛으로 빛나는 계약서를 허공에서 꺼내 나에게 보여주는 아나엘. 눈을 찌푸리고 집중해 봐도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텅 빈 종이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이게 뭔데?”
“아 보이지 않으시겠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서명(이하 갑이라 함)은 온전히 이성적인 상태에서 이 계약서를 작성하며…”
“그… 요점만 정리해 줄래?”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여기 서명하게 되면 탑에서 얻은 모든 걸 잃게 됩니다!”
“…모든 걸 잃게 된다고?”
“맞습니다!”
상태창. 스텟 포인트. 레벨. 특성.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던 1층. 그리고 탑에서 얻은 모든 아이템까지.
“튜토리얼에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로 완전한 일반인의 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 기억은 유지되니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얻은 모든 힘을 포기하면 16층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영영 16층에 갇히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지라고 할 수 있으나…
“난 절대 안 고를 것 같긴 하네.”
한 번 탑의 단맛을 본 사람이라면 절대 고르지 않을 선택지이기도 했다. 몇날 며칠이 걸리건 머리를 박고 말지 탑에 들어오기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일단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과거에 이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이 있었어?”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탑이 생긴 지 반년이 안 지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까. 아직 이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
그렇게 생각하니 저기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이 퍽 불쌍하게 느껴졌다. 막 진심으로 도와주겠다는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시간이 남으니까 겸사겸사 돕고 싶은 정도로.
“무기 뭐 쓰세요?”
“아 저 검을… 씁니다…”
“잠깐 자세 잡아 보실래요?”
남자의 움직임은 기이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으나 정작 그 방향성이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중수 정도 되는 내가 보기에도 그 문제점이 명확할 정도로.
“자 여기에서 힘이 자꾸 분산되잖아요. 허리랑 같이 움직여야 해요. 아시겠죠?”
“확실히 그러네요…?”
대충 10분 정도 허공에 검을 붕붕 휘둘러본 남자는 조심스럽게 바위로 다가가 검을 내리쳤고.
깡!
“크 크 클리어했다는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내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이며 격한 감사를 표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경외 특성이 발동할 정도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 비밀이라서요.”
“사정이 있으신 건가요… 그래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싱글벙글한 표정의 남자가 곧장 포탈을 통과해 사라지고.
“그 혹시 저도…”
“저 사람이 그 최지원 동료인데 1타 강사란다.”
“저기요! 저기요! 아이템은 드리겠습니다!”
“이 이러지 마세요…”
나 덕분에 ‘성불’한 사람이 나름 유명인이었던 탓에 원치 않는 관심이 쏠렸기에 도망쳐야만 했다.
그래도 내 가르침이 나름 먹히는구나. 다행이다.
**
또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16층에 들어온 지는 3주가 지난 셈이다.
“후우 후우 후우…”
‘섬전의 심장’의 잔재가 바닥에서 파직거리는 가운데 최지원은 흙바닥에 드러누워 격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다. 최지원은… 3주째 바위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이쯤 되면 최지원도 최지원이지만 나도 조바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다 기억이 유지되기라도 한다면 다음 회차에는 최지원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소비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지원아 괜찮아. 뭐 어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강해지면 그만인데.”
물론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지 않고 나는 최지원을 일으켜 세워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실패한다고 해서 침울해할 여자는 아니지만 이럴 때 하는 위로가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이 바위 따위 조금 있으면 어? 그냥 막…”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검을 뽑아 바위를 마구 두드렸다. 힘을 주고 벤 것은 아니고 그냥 소리만 크게 나라고 두드린 것인데.
띠링.
-16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엥?”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으나 메시지는 그대로 떠 있다. 진짜로 진짜로 클리어라고?
뭔가 오류가 발생한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아나엘을 찾았다.
“저기… 아나엘?”
“네! 준호 님!”
“나 클리어 한 거야?”
“네! 나가고 싶으신가요? 포탈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바위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좁쌀만 한 생채기가 나 있긴 했다. 사실 생채기라고 부르기에도 뭣하고 그냥 돌 알갱이가 하나 떨어져 나간 수준에 불과하다. 케이크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진 정도랄까.
그러나 상처는 분명한 상처. 나는 놀랍게도 16층 클리어에 성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왜? 라는 질문이다. 나는 왜 클리어에 성공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무언가 변화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뭐가 변했지? 내 정신 상태가 변해서 전체적으로 강해졌다고 판별된 것인가? 아니면 무력이? 업적 레벨이 그새 올랐나?
“아.”
아니 딱 하나 있었다.
경외 특성. 이 특성은 진화하여 단순히 남들의 경외감을 사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특성은… 경외 대상자의 특성을 복사한다. 실제로 이 덕에 사신의 은신 능력을 복사했고. 물론 경외 특성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굉장히 열화된 형태로 가져오기에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열화된 버전이라고는 해도 이번 층에 들어왔을 때보다 강해진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 이번 층의 클리어 조건을 만족해버린 모양이다.
“미세하게 강해지긴 했어도… 강해진 건 강해진 거라는 건가.”
이렇게 되면 16층은 더 이상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낭비하건 회귀한 직후 경외 특성으로 특성을 배껴 올 사람이 존재한다면 난 16층을 탈출할 수 있다.
이러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긴 한다. 여기 있는 무공들을 살펴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도 좋고 아니면 동굴에 틀어박혀 명상해도 된다. 아예 12층 이후로 반쯤 손을 놓았던 한기를 파고들어도 되고.
이제 진짜 문제가 되는 쪽은…
“…지원아?”
최지원 쪽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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