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2
투기장 운영진이 굴복하기까지는 3일이 걸렸다. 여론을 무시하고 또 무시하고 또 무시하다. 결국 사절을 하나 보내왔다.
“계약서입니다.”
투기장 운영진이 파견한 안드로이드가 말했다. (안드로이드는 일반적인 인간 남성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다른 안드로이드보다 털이 좀 많았다는 뜻이다.)
“군타르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 약만 주고 바로 돌아올 것… 사담은 최대한 자제할 것… 많기도 하다.”
“약만 전달한다는 조건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시지 않으면 군타르 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최지원이 질린 눈빛으로 안드로이드를 쳐다보는 사이 나는 계약서에 얼른 서명을 마쳤다. 계약을 준수하지 않으면 고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나야 뭐 회귀하면 그만이니까.
“됐죠?”
“바로 가시죠. 약은 챙겨 오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상황은 좋게 풀렸다. 드디어 만날 수 있다.
군타르.
**
안드로이드는 기나긴 복도로 우리를 이끌었다. 복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좌우에 문이 있었는데 반 정도는 열려 있었고 나머지 반은 닫혀 있었다.
“이곳은 투기장이 마련한 특별 거처입니다.”
안드로이드가 걸으며 말했다.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시설이 더 좋아집니다. 차별화를 두기 위한 투기장 나름의 배려이지만 동선이 길어진다고 싫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안드로이드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복도가 끝났고. 마지막의 마지막 하나의 문이 남아 있다.
“여기가.”
“맞습니다.”
군타르의 거처는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조금 망설여졌지만.
“간다.”
내 손을 살포시 잡아주는 지원이 덕분에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내디뎠다.
-우우웅.
자동으로 열리는 문. 이제 보니 그냥 문이 아니라 일종의 홀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
내부는… 어두웠다. 불은 죄다 꺼져 있었고 방은 넓긴 했으나 창문과 가구 따윈 없었으며 바닥에 먹다 남은 음식 쪼가리가 빨래 바구니에 넣지 않은 옷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불을 꺼둔 쓰레기장 같았다.
“아니 제일 좋은 곳이라면서?”
“이 공간은 사용자가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시설이 좋다는 것은 수정의 폭이 넓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건 뭔데?”
“원본 상태 그대로의 방입니다.”
그러니까 여긴 플레이어들의 1층 같은 공간인데. 군타르가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음식을 먹었으면 좀 치웠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다 먹든가. 먹다가 버려두는 건 또 뭐야.
어쨌거나 쓸데없이 커다랗고 큰 방이었기에 군타르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 저래.”
군타르는 어두운 방구석에서 공처럼 몸을 만 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 수인들도 보통 침대를 쓴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저 녀석은 구석에서 강아지처럼 왜 저럴까.
“군타르 님. 손님이 왔습니다.”
“…”
안드로이드가 먹다 남은 닭 다리를 치우며 군타르를 불러 보았지만 뒤척이며 일어나지 않는 군타르.
“군타르 님?”
“꺼져.”
둥글게 말린 몸 사이로 노란 야생의 눈이 번뜩였다.
“당장 내보내.”
“어이 우린 도우러 왔어.”
나는 양 손바닥을 보이며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 보였지만.
“꺼지라고. 안 들려?”
녀석은 이제 이빨까지 드러내며 우리를 위협했다. 열린 아가리 사이로 고기의 냄새가 풍긴다.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어요. 답답하지 않나요? 우리가 도울 수 있어요.”
이번에는 지켜보던 최지원이 나섰다. 그녀는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기억’을 언급하며 한 발자국 다가섰다.
“대화를 좀 해봐요. 어디까지 기억이 나고 왜 사람을 지목해서 죽이는 건…”
“죽여버리기 전에 꺼지라고!!!”
쇄애액! 군타르는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발톱을 휘둘렀지만 최지원은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허억. 허억. 허억.”
“…”
“몰라… 모른다고…”
다시 바닥에 주저앉는 군타르.
“내가 뭘 모르는지… 내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냥… 인간이 싫다고… 그러니까 빨리 꺼져…”
녀석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구석에 웅크렸다. 아무것도 듣기 싫다는 듯.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내가 생각한 최악은 보자마자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것이었는데 그것보다는 상태가 낫다. 무엇보다도 우리 두 사람도 인간. 인간이라고 마냥 다 죽이려고 드는 건 아니다. 갱생의 여지가 있다.
“그 뭐. 상태가 안 좋은 건 이미 알고 있었고.”
“…”
“이거 마셔 봐요.”
“…진짜 죽고 싶나.”
“뭘 모르는지 모른다면서요? 이거 마시면 나을 수 있어요.”
“…”
“아니 진짜로. 내가 수인 애호가라니까? 다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우리가 어떻게 여기 왔겠어요?”
“…”
대답 없이 가만히 눈을 마주하던 군타르는.
“내놔.”
돌연 내 손에 들린 엘릭서를 가져가더니 단숨에 꿀떡꿀떡 마셨다.
그렇게 한 병을 모두 비운 순간.
“…!”
거무죽죽하던 녀석의 털이 윤기를 되찾았다. 퀭하던 눈 밑 살이 점점 차오른다. 생기가.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더 이상 다 죽어가던 군타르가 아니다. 전성기 시절의 팔팔하고 반짝반짝 빛나던 군타르가 돌아온 것이다…!!!
“없다.”
“응?”
“효과가… 없다.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표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전과 다를 바 하나 없이.
변함이 없다. 어째서?
내가 준 것이 ‘하급 엘릭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말이 하급이지 이건 거의 만병통치약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급 엘릭서 [S]
‘신의 눈물을 극도로 희석시킨 액체.’ 한 병을 온전히 섭취 시 신체적 결손을 모두 치료합니다. 원본과 달리 저주에는 미약한 효과가 있습니다.
단순히 신체적 결손을 치료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몸이 건강해지고 마력 양이 늘어나고 머리가 청명해지고 아무튼 부가적인 기능이 엄청나게 많을 텐데?
“…이거 저주였어?”
아니다. 그건 아닐 거다. 마력적인 이상은 느껴지지도 않고 있다고 하면 군타르 스스로가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깐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나는 내 스스로의 영혼에 집중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이 기술의 숙련도가 높지는 않지만 적어도 다른 자의 영혼 윤곽 정도는 볼 수 있는 기술인데.
“…어?”
군타르의 영혼은… 몸의 형태와 일치하지 않았다. 뭔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또 꿈틀거리고 또 또…
“아악…”
눈이 아파져 와서 집중을 멈췄다. 조금 더 했다면 확실히 회귀했을 것이다. 눈이 뇌가 영혼이 지끈거린다. 군타르의 영혼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괜 괜찮아?”
“어… 잠시만…”
눈을 끔뻑이는 나와 걱정해주는 지원이.
“…”
허망하게 엘릭서가 담겨 있던 병을 내려다보는 군타르까지.
군타르는 영혼 단위에서 무언가 변질되었다. 원인은 황제? 아니면 다른 무언가?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상황이 단단히 꼬여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엘릭서는 먹히지 않는다. 군타르는 엘릭서로 나을 수 없다.
쉽게 쉽게 가는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꼬여 있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짜증 나네 진짜. 천사한테 따져야 하나.”
“…”
“그 제이크 걔한테 물어보면 괜찮은 답이… 어?”
돌연 오싹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군타르가 미동도 없이 엘릭서 병을 든 자세 그대로 샛노란 눈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멍하니. 살기를 담아. 죽일 듯이.
“…”
“…”
“저기요?”
“…”
“천사?”
“죽어라.”
천사라는 단어가 끝마쳐진 순간. 모두가 동시에 움직인다.
천사라는 단어를 듣고 눈깔이 돌아간 군타르. 당황하여 검을 뽑는 최지원. 뒤로 물러나려다 허리춤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은 나.
잠깐. 잠깐. 나는 여기서 약간의 변명을 하고자 한다. 나는 검이 손에 가장 익었고 그러므로 스스로를 ‘검사’ 라고 자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지원과 붕붕이의 관계처럼 이 검에 엄청난 애착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아끼는 검이다. 소중히 여기고 있다.
“아?”
“조심해!”
그러니 내 허리춤에 걸린 검을 군타르가 빼앗을 수 있던 것은 내 실력이 엄청나게 허접한 게 아니라 군타르의 움직임이 그만큼이나 신묘했다는 뜻이다. 검을 빼앗기는 게 검사의 수치란 건 알고 있지만 방금 군타르의 움직임은 방심했다고는 하나 대처가 어려웠다.
근접 거리에서 남의 검을 빼앗는 방법만 평생 연구한 것 같은 그런… 기괴한 손놀림. 방심한 데다 거리도 가까웠기에 나는 검을 빼앗겼고.
최지원 또한 거리가 너무 가까워 섬전의 심장을 발동할 수 없는 상황. 여기서 섬전의 심장을 발동했다간 번개가 튀어 회귀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붕붕이를 휘둘러 엄호하기엔 한 호흡 늦었다.
검이 내 턱의 아랫부분을 노린다. 아래에서 위로 매섭게 솟구쳐 오른다. 암살자와 같은 날카로운 일격. 방어할 무기는 없다. 마력을 일으키기엔 시간이 모자라다. 투명 장갑으로? 아니면 다른 방어 수단이?
“…변형!!”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입고 있던 신선풍의 동양적인 천 옷을 전신을 감싸는 형태로 변형했다! 겉보기에는 천 옷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 방어력만큼은 드워프제 갑옷과 동일! 군타르도 마력을 일으킬 시간은 없다! 갑옷의 방어력이라면 뚫리진 않을 것이다…!!!
-빠각.
“아.”
예상대로 천 갑옷은 뚫리지 않았다.
다만… 턱뼈가 부러졌을 뿐.
“…씨발.”
그래도 하나 알았다.
군타르가 저 지랄이 난 데에는… 천사가 관련이 있다.
[피해를 입었습니다.]
[28층에 처음 진입한 순간으로 회귀합니다.]
***
통칭 ‘뉴비 사랑꾼’ 제이크. 험상궂은 외모와는 다르게 뉴비들에게 은근히 잘해준다는 소문이 퍼져 있긴 하지만 그 소문의 사실 여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아니 애초에 이 남자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
“그 녀석 1만위 랭커 아니었어?”
“엥? 난 20만위으로 알고 있었는데.”
“만년 70만위에서 노는 범부 아니야?
“칼을 쓰지 않나?”
“도끼 아니었나.”
인지도는 높지만 인식하는 방법은 제각각. 그 실체도 불분명하다. 이쯤 되면 도시 괴담이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어째서인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제이크는 제이크니까.
“야.”
“…?”
“너 좀 따라와 봐.”
아니. 있었다.
관심을 가지는 회귀자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