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
“…오지 마세요. 냄새 옮습니다.”
자기 혐오에 빠진 듯 내가 한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물러나던 거지도.
“…왜. 날. 불렀지…”
카드 게임에 나오는 흑마법사의 1 / 3 도발 하수인처럼 비척비척 걸어 나오던 거지도.
“…뭘 봐? 먹을 거 줄 거 아니면 저리 꺼져.”
내가 말을 걸자마자 공격적으로 대응하며 바닥에 침을 찍 찍 뱉던 거지도.
대충 씻기고 머리도 자르고 옷도 갈아입히고 보니 그냥 멀쩡한 주민처럼 생겼다.
어디 날 때 부터 거지꼴인 사람이 있었겠는가. 태어나는 것은 모두 동일하다. 환경이 사람을 달라 보이게 할 뿐.
거리를 돌아다니며 브론즈 등급의 징표 상자를 싹싹 긁어모았다.
사람들이 정상적인 몰골을 되찾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해주었고 자연스럽게 경외 특성이 발동한 결과 지금 내 앞에는 커다란 무리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잘 먹고 잘 자는 것조차 못 하게 한 원흉이 무엇입니까?”
“빌어먹을 상자입니다!”
“이 도시의 기형적인 구조를 만든 원흉이 무엇입니까?”
“빌어먹을 상자입니다!”
“이 상자의 마수에서 주민들을 구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아아악!”
“듭니다아아아!!!”
“갑시다! 사람들을 구출해 냅시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경외’ 특성이 발동한 이상 이 사람들을 내 뜻대로 부려먹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나의 지시에 따라 우르르 몰려나가 실버 등급의 주민들에게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은 미리 지시받은 바에 따라 각자 주민에게 달라붙어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1단계는 설득이다.
“거기 밀러 씨.”
“누구… 어? 당신 그 거지 아니에요? 이름이…”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등급’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등급의 압제요?”
“그 빌어먹을 징표를 만들어 내는 상자를 가져다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생각. 해보신 적 없습니까?”
“…사실 있어요. 사실은 야채가게 따위 운영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나는… 가수가 되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따라오시지요. 당신도 이미 우리의 동지입니다.”
플레이어가 상자를 수거해 갈 터이니 다른 주민의 인도에 따라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유도하는 것이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같이… 같이 가요! 어디로 가야 한다고요?”
시스템에 의해 강제된 삶에 반감을 가진 주민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은 순순히 나에게로 걸어 와 가슴팍을 열어 젖히고 상자를 가져가 주기를 자처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꺼지세요.”
“네?”
“꺼지라구요. 난 지금 이 삶이 마음에 드니까.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걸요? 이 징표 상자도 좋아요. 신과 우리의 관계를 상징하는 상자잖아요?”
“…”
실버 등급에 불과했지만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든다며 상자 반납을 거절한 주민도 왕왕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작전은 2단계로 넘어가야만 한다.
“잠깐… 당신들 뭐에요?”
“가만히 계시죠. 곧 있으면 그 분께서 오실 겁니다.”
“아니 누가 온다고요? 저리 비켜요!”
“비킬 수 없습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시죠.”
약 5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가 상자를 반납하긴 거부하는 주민을 둘러싸면 되는 일이었으니.
본질적으로는 골목길을 막는 양아치들이 하는 일과 동일하다.
폭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칙을 이용해서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플레이어와 플레이어 간의 폭력이 불가능하듯이 주민과 주민 간의 폭력 또한 불가능하다.
인의 장벽에 둘러싸인 남자는 곧이어 도착한 나에게 애지중지 지켜오던 상자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상자를 수거하여 하나의 거리를 완전히 장악했을 즈음.
“가시죠. 저택으로.”
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골드 등급의 귀족이 살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등반자여.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뭘 꾸미고 있는 겐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는 리히트 남작.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귀족들은 강하다.
아무 제한 없이 나와 맞붙는다면 아마 7 대 3으로 내가 우위를 취하겠지만 회귀라는 디스어드벤티지가 있는 이상 십중팔구 내가 패배한다.
하지만 상대가 유리한 싸움을 싸워 주는 바보는 없다.
이번에도 나는 주민들을 고기 방패 삼아 저택 안으로 밀고 들어간 것이다.
귀족이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규칙에 얽메여 있는 주민. 주민은 주민을 해할 수 없다. 리히트 남작의 마법은 봉인된 것이다.
물론 집사 몇몇이 규칙을 이용하여 몸으로 복도를 막아 봤으나 내가 그들의 징표 생성기를 빼앗자 충성스럽던 집사들은 곧바로 제 주인을 향해 이빨을 보였다.
저택의 복도를 주민들로 가득 매울 지경이 되자 문을 잠그고 농성하던 리히트 남작 또한 별 수 없이 주민들에게 둘러싸였다.
“왜! 왜 이러는 건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플레이어랑 주민 간의 폭력을 중재하는 게 니 역할이라며?”
“…”
“해야 할 의무는 안 하고. 잿밥에나 관심을 가졌잖아?”
그래도 수치심은 남아 있는지 얼굴을 붉히는 리히트 남작.
저 새끼도 징표 영향으로 저러는 거라니까 어느 정도는 정상참작해 줘야겠지.
주민들의 몸을 방패 삼아 접근한 나는 녀석의 급소를 검집으로 찔러 기절시켰고 챙겨야 할 물건을 모두 챙겼다.
마침내 꼴 뵈기 싫던 귀족 하나를 치웠다는 생각에 기쁨의 괴성을 내지르려는 사람들을 난 손짓으로 진정시켰다.
“기뻐하지 마시지요. 이제 거리 하나를 청소했을 뿐입니다. 갈 길이 멀어요.”
이제 겨우 하나다. 아직도 수많은 징표 생성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갑시다. 이 불합리한 체제를 때려부수러.”
아직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더 없습니까?”
“네. 골드 징표부터 브론즈 징표까지. 사람 명단을 더블 체크했는데 누락된 사람은 없습니다.”
“후우…좋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한 덕분에 모든 ‘징표 생성기’를 수거 완료했다.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게 가능하던 어느 귀족을 놓칠 뻔한 일을 제외하곤 순탄하게 모든 일이 나의 계획대로 흘러간 것이다.
이제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급 따위 없었다. 행동을 강제하는 시스템의 간섭 또한 없었고 그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었다.
나는 바야흐로 이 도시에 진정한 평등을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민들의 입장에서 본 상황.
나는 플레이어인 만큼 나의 역할을 해야겠지.
주민 일부의 도움을 받아 묵직한 자루를 질질 끌며 광장으로 걸어갔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인파에 질려 지레 물러나는 플레이어들. 일부에게서 ‘경외’의 감정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
마침내 광장 중앙에 도착했을 즈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천사와 마주했다.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놀리는 천사.
“안녕하세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사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무슨 생각이시죠? 등반자님. 지금 하고 계신 일은 자기개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요.”
“자 그건 뭐 알 거 없으시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플래티넘 징표를 천사에게 들이밀었다.
“저 징표 가져왔어요. 클리어 시켜 주세요.”
“…”
“아 이 자루요? 이건 그냥… 전리품? 가져가도 되는 거 맞죠? 이거 밖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는 말 따로 없었잖아요. 그죠?”
“…가능은 합니다만 안 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네? 왜요?”
나는 표정을 가능한 한 최대한 표정을 얄밉게 일그러트리며 천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스테이지 규칙에 그런 말 있어요? 없잖아요? 왜 추천 안 하는데요?”
“…그걸 다 가져가 버리시면 앞으로 아무도 2층을 클리어 할 수 없게 됩니다. 인류는 멸망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되고 이 도시는 거대한 감옥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는 천사.
대천사 라파엘이 인류를 표면적으로나마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천사 주제에 인류의 미래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그건 제 알 바 아니구요. 뭐 적절한 보상이 있으면 두고 갈 수도 있긴 한데…”
하지만 나는 인류의 미래 따위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천사의 말이 맞았다.
내가 ‘징표 생성기’를 몽땅 들고 다음 층으로 넘어가 버리면 앞으로 그 누구도 2층을 클리어 할 수 없게 된다.
2층에 올라오는 모든 사람들은 영영 2층에 갇힌 채 이곳에서 누군가 탑의 66층을 클리어 하기만을 끝없이 염원해야만 한다.
내가 알아서 인류를 멸망으로 밀어 넣는 상황 아니냐고?
맞다. 여기서 천사가 그냥 날 클리어 처리시켜 주면 인류는 멸망에 가까워지게 된다. 후발주자는 모조리 도태될 것이었으니.
하지만 나에겐 확신이 있었다.
지금의 이 체제가 깨지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하나 있을 것이라고.
몸소 도시를 신에게 진상하여 이 모든 상황을 자처한 사람이 하나 있을 것이라고.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일이 규칙에 어긋나지 않았기에 개입하지 않은 규칙 성애자가 하나 있을 것이라고.
“듣고 있죠?”
아마 듣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 보이지도 않는 곳에 틀어박혀 이 도시 전체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배에 힘을 꽉 주고 하늘을 향해 힘껏 소리질렀다.
“사장 나와!!!”
도시의 주인과 대면할 시간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