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8
해가 지평선 저 너머에 걸리고 하늘이 아련한 빛으로 물든다. 체감상 시간은 저녁 6시.
“남작님!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음…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돌로 틀어막은 자리를 유심히 살피는 호르헤 남작.
그가 추진하던 작업은 슬슬 끝이 보이고 있었다. 산맥 방향으로 난 작은 쪽문을 제외하곤 성벽은 외부와 단절되었다.
“준호 님. 2층까지 수색이 끝났습니다. ‘마도구’로 가득 찬 방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자세한 활용 방안은 날이 밝으면 실험해 볼 예정입니다.”
성의 수색 작업 또한 진척이 빨랐다. 눈이 째진 남자 윤중현은 상당히 유능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할 줄 알았으며 아랫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아 그리고 내일은 3층을 수색해 볼 예정입니다.”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여상스레 말하는 윤중현.
“…3층은 굳이 수색을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여기서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수색을 막았고 윤중현은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곧바로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하지만.”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곧 해도 질 것 같은데.”
“…네.”
윤중현은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더는 보채지 않고 성 안으로 사라졌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릴 입장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임시 동맹이었고 나는 임시 리더였다. 제대로 된 상하관계가 아닌데 머리 위에 앉은 듯 굴었으니 속이 뒤틀릴 만도 하다.
“…어쩔 수 없어.”
3층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4층에서 포탈이 발견된 이상 더 이상의 수색은 무의미했다. 아니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단 5명만이 통과할 수 있는 포탈. 그 효용성은 둘째 치고 포탈을 처리하는 법부터가 문제였다.
포탈의 존재를 모든 사람에게 알린다? 포탈 안에 들어간 사람을 응징할 수단이 없는 이상 누구나 하던 일을 내팽겨치고 포탈을 향해 달릴 것이다.
그렇다고 평화적으로 포탈 속으로 들어갈 5명을 뽑는다? 어떤 방식을 택하던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죽음의 위기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가만히 보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포탈의 존재가 알려지는 순간 아수라장은 반쯤 확정적이다.
성 4층의 포탈이 이러한데 3층에도 우리의 분열을 유도하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타당했다. 지하 1층 2층 4층에 모두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3층에만 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했다.
“…”
오렌지 빛으로 물든 산맥을 슬쩍 흘겨본 뒤 나는 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본격적으로 불만이 터져 나올 타이밍이었으니.
**
김준호의 예상대로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불만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불만은 다종다양했지만 그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이거 맞냐?”
인간은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동물이다. 처음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지만 벌써 이틀 차 밤인데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경외’ 특성의 영향이 약해졌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뭐 나오는 건 맞지…?”
“미션이 생존이긴 한데…”
마음은 고무줄과도 같다. 잔뜩 긴장했던 플레이어들은 반작용으로 그 어느때보다도 느슨해졌고 이내 자신들이 처한 상황 그 자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여기서 개개인이 다른 만큼 품은 의문 또한 다양했는데 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내가 보기엔 그 존나 쎈 새끼가 우릴 속인 거 같아. 우리가 정신 팔리도록 유도한 다음 자기는 몰래 이득을 취하는 거지.”
첫째. 김준호 흑막설.
“근데 무슨 이득을 취했다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그 새끼가 철저하게 숨겼을 게 분명하니까.”
“…”
물론 이 의견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애초부터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이계인들이 수상해.”
“어떤 점이 수상한데?”
“미션은 떡하니 생존하라고 말하는 마당에 지금 괴물은 보일 기미가 없잖아? 당장 이계인들 말고 눈에 띄는 게 뭐가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이계인 배신론’은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당장 코앞에 보이는 잠재적 위협이라곤 이계인들 말고는 없었으니까.
“근데… 벌써 이틀찬데 아직 아무런 피해가 없지 않나?”
“이 성의 구조는 누구 하나 슥 사라져도 찾기 어려운 구존데… 얘네가 일을 저지를 거면 진작 저질렀을 거 같은데.”
하지만 이 또한 설득력이 있다고 하기엔 모자랐기에 큰 호응은 얻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처음부터 괴물은 없었어.”
그렇기에 가장 열렬한 호응을 얻은 것은 ‘플레이어 분열론.’
“이 탑은 우리가 알아서 분열하길 바라고 있는 거야. 서로를 의심하고 다투고 싸우는 것 자체가 탑의 의도인 것 같단 말이지. 애초에 튜토리얼이 그랬잖아?”
처음부터 괴물은 없었고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분열이라는 의론이었다.
“추운 날씨. 적막한 고성. 갑작스러운 이계인의 등장. 좁은 통로. 작은 방. 전부 우릴 정신적으로 압박하기에 안성맞춤이야. 내 생각에 아마 시간이 더 흐르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도록 만드는 사건이 일어나겠지. 그때가 진정한 위기일거야.”
확실히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저 말대로면 당장 괴물이고 자시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설명이 되었고.
“역시 내가 그런 좀생이일 리가 없지.”
“아오 탑이 잘못한 거였네.”
플레이어들이 속에 품은 짜증을 비롯한 부의 감정이 자신의 탓이 아닌 상황의 탓이었다고 합리화시켜주는 의견이었으니.
사실 여기까지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플레이어들끼리 싸우지 말고 협력합시다~ 라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사람들은 더 이상 통제를 열심히 따를 생각이 사라졌다. 싸우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되는데 김준호의 말을 성심성의껏 이행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야. 아까 그 이계인 여자 봤냐? 좆되던데 진짜.”
“…야. 너 뭔 생각 하냐?”
“어차피 NPC잖아. 플레이어도 아니고.”
“그런가?”
또한 일부 플레이어들의 추잡한 시선은 이계인들을 향했다.
공통의 적이 있다면 아군으로 여기겠지만…
지금은 그냥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에 불과했기에.
**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본보기로 한두 놈 정도 죽입시다. 뭐 어때요? 살아있는 게 낭비인 놈들인데.”
“후우.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시지요. 인간에겐 선이란 게 있는 법입니다.”
“그럼 윌리엄 님은 뭐 어쩔 생각인데요?”
“주먹으로 잘근잘근 다져 놓는 정도라면 저들도 배우는 게 있을 겁니다.”
“흠 좀 아쉽긴 한데…”
손에 쥔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하는 눈이 째진 남자 윤중현과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싸쥔 백인 중년 윌리엄 스미스.
나 호르헤 남작 윤중현 그리고 윌리엄은 작은 방에 모여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윌리엄 님.”
나는 조심스럽게 윌리엄을 불렀다.
“네?”
“주먹으로… 다져 놓는다고요?”
“네.”
“…아까 다친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시던데 회복 계열 특성 아닙니까?”
“맞습니다. 사실 캘리포니아 주에서 작은 교회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 참고로 저는 탑을 만든 미치광이와 주님은 별개의 존재라는 입장입니다.”
“…”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힐러가 어떻게 4층까지 올라왔나 했더니… 윌리엄 스미스의 팔뚝이 예사롭지 않았다.
“것보다 난 이 ‘플레이어 분열론’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네.”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온 것은 호르헤 남작이었다.
“갈 곳을 잃은 칼날이 나의 영지민들을 향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보면… 상당히 그럴듯해.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뭐가 나와도 진작 나왔어야 할 타이밍이다. 자연스레 생겨나는 이 갈등이 진정한 4층의 과제가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다.
“상황이 이대로 흘러간다는 가정 하에 플레이어들만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린 모두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플레이어들의 이상행동을 막을 규제 방안을…”
“그… 준호 님?”
나의 말을 끊은 것은 어느 여자의 목소리.
튜토리얼에서 봤던 버퍼 백다혜가 얼굴만 방 안으로 얼굴만 빼꼼 들이밀고 있었다.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입니까?”
윤중현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짜증을 내려던 찰나.
“경남 씨가 중요한 단서를 찾았다고 해서…”
백다혜의 입에선 결코 무시 못 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
“…”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네 사람. 허투루 ‘중요한’ 이란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신속했다.
“가시죠.”
우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1층의 평범한 복도. 하지만 특정 돌 블럭을 꾹 누르면 자연스레 벽이 이동하며 숨겨진 방이 드러난다.
드러난 방의 크기는 손바닥만했으며 바닥은 낡고 해진 책으로 덮여 있다. 이 ‘비밀 서재’라고 불러도 무방할 공간의 중앙엔 안경준의 형 안경남이 자리를 잡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보통 집중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은 안경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인사를 건넨다.
“그래서… 뭘 발견했길래 우릴 부른 겁니까?”
“아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의 질문에 안경남이 낡은 책 한 권을 들이밀었다. 특이할 게 없는 책이지만 속표지에 붉은 글씨로 무언가가 휘갈겨져 있다.
“어떻습니까. 여기 있는 책을 죄다 뒤져서 찾았습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안경남.
“…모르겠는데요. 이계의 언어 아닙니까?”
하지만 내 반응은 떨떠름했다. 어떻고 자시고 모르는 언어였다. 알아야 뭘 평가를 하지.
“…나도 모르겠군.”
“…”
호르헤 남작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안경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이 조금은 험악해졌다.
“아 그 죄송합니다. 저는 특성 덕분에 이게 해석이 되는지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뒷머리를 벅벅 긁는 안경남.
“그러니까…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좌중을 한번 스윽 훑어본 안경남이 이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더듬더듬 글귀를 읽어 내렸다.
“…남은 과거와 나아갈 미래가 같아지는 순간. 그대들은 모두 죽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리.”
“…”
“…”
안경남이 말을 마친 직후.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모두가 저 문장을 입 안에서 굴리고 있던 것이다.
“…메멘토 모리?”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눈이 째진 남자 윤중현.
“그렇다기엔 어조가 너무 험악하지 않습니까. 보다 직접적으로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중년의 백인 치유사 윌리엄 스미스가 슬며시 반박했다.
메멘토 모리.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본디 오만하지 말고 신들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건만… 이 문장에서는 윌리엄의 말대로 ‘뒤질 준비해라.’ 와도 같은 험악한 뉘앙스가 풍겼다.
“확실히…”
“으음… ‘플레이어 분열론’은 틀렸던 건가.”
“아니죠. 괴물이 진짜로 나타난다면 사람들의 분열은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어들진 않을 겁니다.”
“잠깐.”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호르헤 남작은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나겠단 것은 알겠네. 하지만 앞의 문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남은 과거와 나아갈 미래가 같다. 시간상으로 딱 중간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고 나의 말을 이해한 호르헤 남작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네. 맞습니다. 저흰 이곳에서 5일을 생존해야 합니다. 시간 상으로 120시간. 그 말인즉슨…”
내가 작게 ‘상태창’이라고 읊조리자 자연스레 눈 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83 : 12 : 00
남은 시간이 60시간이 되는 순간.
무언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4층이 시작된 시간은 아침 9시로 가정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2일차 밤 10시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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