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그레이 오우거가 광분했다·
눈이 돌아간 그레이 오우거는 미친 듯이 모비딕의 실드를 두들겼다·
쾅쾅!
오러가 어린 방망이가 강타할 때마다 모비딕의 실드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출렁였다·
단순히 그레이 오우거의 공격만이었다면 모비딕의 실드가 이렇게 흔들릴 리 없었다· 다른 마수들의 공격까지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림슨 드레이크는 파이어 브레스를 난사하고 있었고 자이언트 스파이더도 열 개의 다리로 실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거기에 중소형 마수들까지 합세해 미친 듯이 날뛰다 보니 장내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콰지끈!
키엑!
그레이 오우거 같은 대형 마수들에게 밟혀 죽는 마수들이 속출했다· 그래도 어느 마수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모비딕의 실드를 뚫으려는 마수들의 집념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엇이 저 마수들을 극한으로 내모는 건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바로 절박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수들의 공격이 한창 거세질 때였다·
스르륵!
플랑크톤처럼 허공에 떠 있던 미세한 가루들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이 돌아간 마수들은 그런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수들이 실드를 두드릴 때마다 공기가 요동쳤다·
파도처럼 요동치는 공기를 타고 플랑크톤 같은 가루들은 마수들의 머리와 몸체 위로 내려앉았다·
그중 일부가 마수들의 호흡기를 통해 체내로 흡입됐다·
크에에!
카오오!
그 순간 작은 마수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플랑크톤 같은 가루들은 일종의 기생 생명체였다·
모비딕의 거대한 몸체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미세한 생명체·
놈들은 모비딕의 감정에 동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지만 모비딕이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순간 치명적인 독물로 변신한다·
생명체의 호흡기를 통해 체내에 침투한 놈들은 뇌를 자극해 미쳐 날뛰게 만든다·
그나마 역장으로 전신을 보호할 수 있는 B급 이상의 마수들은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하급 마수들은 즉시 미쳐 날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하급 마수들은 실드를 두드리던 것도 잊고 다른 마수들을 공격했다·
이미 미쳐 버린 마수들은 눈이 뒤집혀 그레이 오우거와 크림슨 드레이크 같은 A급 마수마저 공격했다·
겁도 없이 덤벼드는 하급 마수들에 분노한 A급 마수들이 공격 대상을 바꿨다·
일단 하급 마수들을 모조리 쳐 죽인 후 다시 모비딕의 실드를 공략하려는 것이다
하급 마수들이 아무리 많아도 A급 마수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귀찮게 할 수는 있었다· 수가 많을수록 더 귀찮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엔 충분히 많은 수의 하급 마수들이 존재했다·
놈들은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와 A급 마수들을 공격했다·
개중에는 C급· B급 마수도 섞여 있었다·
B급 마수도 역장이 있기에 모비딕의 기생 생명체에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은 본능적으로 A급 마수를 쓰러트리지 않고서는 모비딕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같이 공격했다·
크와아아!
카오오!
콰앙! 콰르릉!
마수의 포효와 격돌하면서 터지는 폭음이 모비딕의 영역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미친!”
“이런 말도 안 되는····”
파빌사와 케일리가 이정호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멍하니 마수들의 격돌 모습을 바라봤다·
거의 백여 년을 사막을 떠돈 파빌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렇게 수많은 마수가 뒤섞여 싸우는 것은 처음 봤다·
“도대체 모비딕이 뭐기에 이 많은 마수들이····”
얼핏 보기엔 무질서해 보이지만 마수들에게도 나름의 생태계가 존재한다·
A급 마수의 영역엔 어지간해서 다른 A급 마수가 침범하지 않는다· 백 퍼센트 이길 자신이 없는 한 말이다·
마수의 세계에서 승률 백 퍼센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놈들은 충돌을 꺼린다·
B급이나 C급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영역을 구축하면 별일이 없는 한 그 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종류가 다른 수많은 마수가 한자리에 모여 싸우는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말이다·
분명 모비딕이 문제였다·
저 신비한 고래의 무언가가 마수들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것이 분명했다·
파빌사가 초조한 표정으로 이정호를 바라봤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아르켈론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아르켈론을 구할 골든 타임을 놓칠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정호의 칼날은 더 이상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가자! 아르켈론·’
그가 마음으로 아르켈론에게 말을 걸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해 온 그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쿵! 쿵!
그때까지도 파빌사의 안위를 걱정해 꼼짝도 하지 않던 아르켈론이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순간 이정호의 낯빛이 바뀌었다·
“왜 아르켈론을 움직인 겁니까?”
“내가 움직인 게 아니라네·”
파빌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정호는 그를 믿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아르켈론을 멈추십시오·”
“허허! 이 거대한 거북을 내가 어떻게 멈추겠나? 차라리 나를 죽이게·”
“당신을 죽인다고 명령이 취소되진 않겠지· 그럼 손녀는?”
이정호의 검날이 케일리의 목으로 향했다·
꿀꺽!
차가운 검날이 목에 닿자 케일리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녀 역시 파빌사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위협에도 꿈쩍 않는 조손의 모습에 이정호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설마 이들이 반항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쿵! 쿵! 쿵!
그 순간에도 아르켈론은 모비딕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정호의 검날이 케일리의 목을 파고들며 피가 흘렀다·
“흐윽!”
케일리가 놀라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는 파빌사에게 아르켈론을 멈추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정호가 문득 웃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우습게 보였나 보군· 어차피 이곳까지 온 이상 너희들은 필요 없다·”
그가 아르켈론을 타고온 것은 모비딕으로 향하는 길잡이가 필요해서였다·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아르켈론 따윈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파빌사와 케일리의 목숨도····
이정호가 그대로 케일리의 목을 베어 버리려는 순간이었다·
쾅!
폭음과 함께 아르켈론의 거대한 몸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 때문에 이정호의 몸이 잠시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파빌사와 케일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르켈론의 등껍질 안에 있는 비밀 공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종의 대피소 같은 공간이었다·
평상시에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지만 파빌사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나타나 작동한다·
이정호에게 위협을 받던 그 순간부터 파빌사는 대피소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이런!”
이정호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이 대피소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스걱!
검을 휘둘러보았지만 헛되이 지나갈 뿐이다·
대피소가 일종의 아공간 비슷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오랜만의 실패에 이정호가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사람을 끌고 나와 목을 치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아르켈론의 몸이 다시 흔들렸다·
밖을 내다보니 그레이 오우거가 오러가 어린 몽둥이로 아르켈론을 공격하고 있었다·
거대한 아르켈론의 몸체는 공격하기 딱 좋았다·
더군다나 지금 아르켈론은 역장을 상실한 데다가 상처를 입어 공격 수단이 전무했다·
그레이 오우거에겐 딱 좋은 공격 대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급 마수들의 공격을 받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있던 차였다· 화풀이 대상으로 아르켈론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것이 그레이 오우가 아르켈론을 공격한 이유였다·
쾅! 쾅!
쿠워어!
오러가 어린 거대한 몽둥이가 등껍질을 두두릴 때마다 아르켈론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르켈론은 우직하게 모비딕을 향해 걸어갔다·
빠가각!
그레이 오우거의 공격에 등껍질이 부서져 나갔다·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케일리가 이정호에게 외쳤다·
“이러다가는 우리까지 위험해요· 탈출해야 해요·”
“아르켈론을 조종할 수 있지 않나?”
“지금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해요· 아르켈론을 장악하려면 레인보우 팬던트를 써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모비딕엔 사용하지 못해요·”
“어쩔 수 없군· 아르켈론을 버린다·”
“잘 생각했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아르켈론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착지하자마자 두 사람은 난관에 봉착했다·
바닥에도 마수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서걱!
“뒤처지지 말고 나를 따라와라·”
이정호가 눈앞의 마수를 베며 클레어에게 말했다·
클레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정호의 등 뒤에 바싹 붙었다·
말 그대로 마수 천지였다·
작은 마수들이 이정호와 클레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크게 찢어진 입 날카로운 이빨 쭉 늘어진 침 광기 어린 눈· 그 모든 것이 클레어를 두렵게 했다·
만일 그녀 혼자 이런 상황에 던져졌다면 순식간에 마수들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 그녀에겐 지켜 줄 사람이 있었다·
쉬이익! 서걱!
거침없이 하급 마수를 베어 버리는 남자는 이정호였다·
클레어는 이정호를 좋아하지 않았다·
임무를 위해선 친혈육마저 베어 버릴 수 있는 냉혹함을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런 점 때문에 같은 편이 되었을 때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었다·
클레어는 이정호의 등에 바싹 붙어 움직였다·
키에엑!
크와아!
그 순간에도 하급 마수들은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거기에 아르켈론을 공격하는 그레이 오우거까지·
잠시도 한눈을 팔거나 방심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크와아아!
비행 능력이 있는 하급 마수들에게 공격당하던 크림슨 드레이크가 갑자기 크게 포효하더니 파이어 브레스를 뿜어냈다·
파이어 브레스는 근처에 있던 하급 마수들뿐 아니라 지상에 있는 하급 마수들도 깡그리 불태웠다·
거기에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거미줄도 한몫했다·
마치 그물처럼 넓게 퍼져 날아간 거미줄은 수많은 하급 마수를 녹였다·
모비딕의 영역을 새까맣게 뒤덮었던 마수들 대부분이 그렇게 정리되었다·
남은 것은 그레이 오우거를 비롯한 대형 마수들 몇몇뿐이었다·
그중엔 아르켈론도 있었다·
“하아! 하아!”
클레어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크림슨 드레이크의 파이어 브레스를 간발의 차이로 피한 것이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통구이가 될 뻔했다·
이정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 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대의 풍경은 이전까지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급 마수들 대부분이 사라졌고 허공에 부유하던 플랑크톤 같은 기생 생명체도 타서 사라졌다·
방금 전 그 난리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화하학!
모비딕을 보호하던 실드가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일순 강렬하게 빛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실드가 사라지자 희미하게만 보이던 모비딕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길이만 무려 백이십 미터에 몸통 둘레만 삼십 미터가 넘는 초대형 마수가 허공에 둥실 뜬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이정호와 클레어는 정신이 아득해져 옴을 느꼈다·
거대한 마수가 아니라 마치 전능한 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교할 수 없는 격의 차이가 그들을 전율케 했다·
‘미친!’
모비딕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정신에 큰 타격을 입은 이정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정신력이 더 약한 클레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 클레어의 눈에 모비딕의 바로 아래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생명체가 들어왔다·
모비딕을 벡분의 일로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새하얀 새끼 고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서 설마 새끼를 낳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