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화 동행 (1)
고대 시절에 이 세상을 뒤덮은 마녀의 저주·
짧게 설명하자면 이 저주는 ‘방사능’과 유사하다·
저주 이후 대륙 전체가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고 라프도니아만이 그 재앙을 피해갈 수 있었다·
···라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다·
하나 성벽 바깥에 마녀의 저주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알던 마녀의 저주는 없었다·
[지금 바깥은 정말로 멀쩡해· 식물들도 자라고 가까이 다가가면 풀잎을 먹는 벌레들도 보여· 야생동물들도 마찬가지고·]
고스트 버스터즈 게시판에 올라왔던 어느 노아르크 플레이어의 게시물처럼·
성벽 바깥은 죽음으로 가득한 땅이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는 아닌 거 같지만·’
절벽 끝에 선 채로 눈앞에 펼쳐진 잿빛 세계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잿빛이었으나 오직 저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만이 붉게 빛나며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상은 멀쩡해진 적이 없던 거군요·”
GM이 중얼거렸듯 누가 봐도 멸망한 게 확실해 보이는 세상·
다만 그럴수록 의문은 커진다·
그야 왕가가 했던 말 중에는 진실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방사능은 개뿔····’
공기 중에 흩뿌려진 독 같은 건 없었다·
단지 또 다른 방식으로 멸망한 세계가 있었을 뿐·
물론 왕가에서 어떤 이유로 이 사실을 숨겼는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저는 왕가에서 왜 진실을 왜곡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응?”
언제 꺼내들었는지도 모를 망원경을 내리며 GM이 말을 잇는다·
“그들이 성벽 내의 주민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멸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걸·”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아래를 보십시오·”
GM이 가리킨 지점은 잿빛으로 변한 파도와 육지가 맞닿은 경계선이었다·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느린 속도지만 조금씩 저 영역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내 건네받은 망원경을 눈에 대고 해당 지점을 확인하자 경계선을 기준으로 천천히 침식이 진행 중인 게 보인다·
“문제는··· 이쪽만 이런 게 아닌 거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먼저 성벽 바깥에 나간 이들이 다시금 도시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분명 반대편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도시로 돌아올 이유가 있나? 어차피 네 말대로라면 도시가 먼저 멸망할 텐데?”
“뭐 저희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 어쩌면 저 침식이 진행되어도 수호 마법진은 뚫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얘기를 마저 들어보니 마법사답지 않은 아니면 말고 식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겠지·’
실제로 노아르크 놈들은 도시를 침공했다·
이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라프도니아 내에 있다는 뜻이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직접 탐험하면서 알아봐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후로는 GM과 함께 해안가까지 내려가서 이런저런 조사를 진행했다·
아쉽게도 알아낸 건 얼마 없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좀 정리를 해보자면····
쿵!
일단 저 침식 지대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다·
사물이든 뭐든 저것과 닿는 순간 색을 잃고서 돌처럼 굳어버린다·
참고로 사람으로 실험은 못해봤다·
항마력이 높으면 버텨지는지 궁금하긴 한데 진짜 실험할 용기는 없거든·
아무튼·
“시체··· 군요·”
두 번째는 해안가를 둘러보다 발견한 동굴 내에서 해골을 발견한 것이다·
적어도 몇 년은 훌쩍 지난 듯한데 주변을 수색해도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 속도면 10구역 외벽에 닿기까지 10년 정도 걸리겠군요·”
침식이 동일한 속도로 진행된다는 가정하에 10년 뒤엔 도시에 도달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뭐 도시를 감싼 수호 마법진이 침식을 막아낼 수 있는 거라면 별문제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수색은 이만하고 돌아가지·”
“아예 돌아가시는 겁니까?”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GM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이렇게 정상적인 말을 하는 게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이라 해야 하나?
“왜 안 가고 싶—·”
“아뇨! 갑시다! 얼른!”
거 서운할 정도로 기뻐하네·
이제 좀 친해진 줄 알았는데·
“그래 가자·”
이후로는 해안가에서 나와 성벽 쪽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눴다·
“하벨리온·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이러한 사실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 말이다· 10구역 성벽 위에서는 세상이 요지경이 된 걸 다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괴담 비슷한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혹시··· 남작님께서는 성벽 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으신지요?”
“가봤는데?”
이내 비프론의 성벽에 올라서 드넓게 펼쳐진 자연들을 감상했던 경험을 말하자 GM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비프론이 특이한 경우라 그렇습니다· 다른 성벽들은 환영 마법이 걸려 있는데 도시 중에 유일하게 비프론만 그 마법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로 알고 있습니다·”
“···오 그러냐?”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니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 참고로 비프론의 성벽 위에서 근무를 하던 병사나 기사들은 성벽 바깥의 자연이 환영 마법으로 인한 것인 줄 안다더군요·”
이러한 얘기는 처음 듣는다·
확실히 높은 신분의 마법사인 데다가 살아온 짬이 있으니 아는 게 많구나·
“한데··· 환영 마법이 걸린 건 성지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아 그거····
“맞는데 성벽도 그런 상태인 줄은 몰랐다·”
성지는 성벽 바깥에 위치해 있다·
역사서에는 왕가가 이종족들을 존중하여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독립적인 땅을 내주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차별이며 배척이다·
이번에 7구역 침공 사건만 봐도 그렇지 않나·
오래전 왕가에서 만든 마법진을 노아르크 측에서 발동시키자마자 성지는 완벽하게 도시와 단절되며 고립되었—·
‘생각이 딴 길로 빠졌네·’
아무튼 성지에서 쭉 걷다 보면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가로막혀 더 나아갈 수 없는 구간이 나온다·
당시 그 너머는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
[전사야 아직 그 너머를 궁금해할 시기가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주술사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사를 쳤었는데 과연 어떨까·
그때와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 성장했는데·
이제는 성벽 밖을 궁금해해도 될 시기가 됐을까?
“하긴··· 성지만 특별한 경우라 생각하실 수도 있었겠군요· 일단 명목상은 이종족을 배려해서 환영 마법을 건 거라고 알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실제로는 어떨지·”
“예···?”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내친김에 살짝 동선을 틀어 성벽 쪽으로 붙어서 가는 루트로 이동했다·
“성벽 주변 전체가 숲지라서 굉장히 불편하군요·”
“툴툴대지 말고 얼른 발이나 옮겨라·”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GM을 잘 토닥이며 데려가고 있자니 머지않아 라프도니아에 존재하는 여섯 개의 성지 중 하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툭·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할 수 없다는 듯 길을 가로막는 투명한 장막·
9구역에 위치한 요정들의 성지다·
일단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냥 숲밖에 안 보이네·’
성지의 최외곽부 경계선인 만큼 요정들의 생활 환경이나 도시 경관을 보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엄청 크네····’
바바리안의 성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거대하고 정갈하다·
마치 수천 년 동안 공을 들여 관리라도 한 것처럼·
“···일단 가자고 해서 오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냥 이렇게 기다리실 예정인지요?”
흥미롭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자 GM이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순간·
“···응?”
결계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인 거 같은데·
“잠깐만·”
“···예?”
“조용히·”
이내 GM의 입을 다물게 하고서 숲속을 빤히 응시하자 요정 하나가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포착됐다·
미성년자거나 갓 성인이 됐을 법한 앳된 얼굴을 한 은발의 남자 요정·
“이쪽으로 오는군·”
요정이 천천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온다·
“보이는 건가···?”
너무 정확한 방향이라서 문득 그런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그야 결계 밖에 사람이 있는 걸 봤으면 저렇게 평온한 표정일 리가 없거든·
스윽·
이내 결계 앞에 도착한 요정이 손을 내밀어 보이지 않는 벽을 어루만지듯 쓸어내린다·
그리고 뭐라 중얼거리는데····
“····”
결계 때문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데 GM에게는 독순술의 재주도 있었을까·
“갑갑하다고 하는군요·”
“···눈으로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있는 거냐?”
“살다보니 익힌 잔재주입니다· 그리 어려운 단어도 아니었고요·”
겸손하게 미소 짓는 GM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플레이어 출신이니까·
말하고 듣는 데 문제가 없는 것과 입술을 읽어 말을 이해하는 건 다른 종류의 이야기였다·
“오 지금은 ‘밖에는 뭐가 있을까···’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옆에서 말을 해석해 준 덕분에 요정이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호기심은 사람이 가진 욕구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지요· 어쩌면 언젠가 저 소년이 이름을 떨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감당할 수 있는 것에만 의문을 갖는다고 하더니?”
“예· 그렇기에 위대하다고 말한 겁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그저 궁금해할 뿐이니까요·”
거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말은 잘하네·
“그런 의미에서 남작님께서도 호기심이 다 풀리신 거라면 슬슬 다시 이동하는 게 어떨는지요?”
“그래 가자 가·”
GM의 요구에 피식 웃어넘기기도 잠시·
나는 결계 너머의 은발 요정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뒤 등을 돌렸다·
‘쓰읍 얼굴이 조금 익숙한 거 같기도 한데····’
뭐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
***
늘 그렇듯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의 역순이었다·
다만 며칠간 낯선 장소를 돌아다니며 친밀감을 쌓은 덕인지 올 때와 달리 자잘한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얘도 이제 나를 그렇게까지 어려워하지 않는달까?
“그러는 남작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도시 내에는 수많은 염문이 들려오던데·”
“다 헛소문들이다·”
“흐음 제가 듣기로는 딱 한 분은 진짜였던 거로 알고 있—·”
“···아주 편해졌군?’
“하하··· 죄 죄송합니다·”
가벼운 대화를 하는 걸 넘어 녀석도 그동안 내심 궁금했을 사적인 질문들을 툭툭 던져왔다·
“저··· 남작님은 목표가 뭡니까?”
“시비 거는 거냐?”
“그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항상 위험한 일에 앞서고 바쁘게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없다·”
“예?”
“거창한 목표 같은 건 있었던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나 그리고 내 사람들이랑 같이 살아남는 것· 목표라 한다면 그 정도뿐이겠군”
물론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인 법·
나에 대해 솔직하게 답해준 만큼 나도 녀석에게 사적인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그러는 너는 목표가 뭐냐?”
“저 말입니까?”
“그래·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걸 보면 너는 명확한 목표가 있을 거 같은데·”
“저는····”
목표에 대해 묻자 GM은 살짝 망설이는 듯하다가도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꼭··· 언젠가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플레이어로서 해석해보자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이며 그 동기가 바로 ‘누군가’라는 뜻·
‘가족이려나···?’
알 수 없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누군진 몰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다·”
“···감사합니다·”
“힘내라·”
이내 응원의 의미로 어깨를 팍팍 쳐주자 GM이 나를 피해 도망가다가도 웃긴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차이’만 뺀다면··· 얀델 남작님께서는 참 괜찮으신 분 같습니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던진다·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현지인들도 학을 뗄 정도이니 플레이어 눈엔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겠는가·
‘그래도 좀 억울하긴 하네·’
자기들도 바바리안으로 스타트를 했으면 달랐을까 봐?
백이면 백 나랑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아마도·
“그럼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쉬었다 가는 거로 하지·”
“예· 좋습니다·”
날이 적당히 어두워진 후에는 나무가 좀 적은 공터에 대충 모포를 깔고 누웠다·
‘이 속도면 내일 저녁 전에는 도시로 돌아갈 수 있겠네·’
눈을 꾹 감고 내일 일정이나 한 번 더 점검하던 때 돌연 옆에서 감상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 말입니다·”
“···?”
“하늘은 어느 세상이든 똑같군요·”
사실 나도 야영 중에 자주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냥 밤에 누워서 하늘만 보고 있으면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거든·
다만 막상 뱉고 나서 아차 싶었는지 GM이 묻지도 않은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아 성벽 안이든 밖이든 말입니다·”
“그래· 정말 다를 것도 없군·”
“····”
그렇게 잠시간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허구한 날 마탑에 박혀 살았던 탓일까?
녀석은 이렇게 밖에서 노숙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왠지 옛생각이 나는 듯했다· 녀석도 한때 미궁에 들락날락할 때는 이런 게 일상이었을 테니까·
“남작님·”
“왜 부르냐?”
“제가 처음 들어간 학파에 대해 궁금해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긋는 바람에 자세히 묻진 못했지만·”
근데 왜 이제 말할 생각이라도 든 거냐?
툭 던지듯 말하자 GM이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딱 잘라 답했다·
“예 그리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아무래도 녀석에게는 오늘이 그날인 거 같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말을 하고 싶은 그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