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화 꿈 (7)
온 천지가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번뜩-!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듯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시작된 빛이 순식간에 온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세차게 부는 바람·
삐이이이이이이이-·
두통이 동반된 이명과 함께 새로운 지식이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아 새로운 지식은 아닌가?
“후아 이제 살겠네·”
꿈속에서 정신과 의사가 라프도니아 말을 해 보라 했을 때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만 뻥긋거리느라 엄청 수치스러웠는데·
뭐 돌아왔으니 이제 상관없지만·
스윽·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본다·
작달막했던 이한수의 손과 달리 거칠고 투박하고 핏줄이 두껍게 선 야만인의 손·
꽈악·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몸 상태를 확인하기도 잠시·
또각 또각·
귀에 익숙한 구두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이에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또각-·
꿈속 세상에 끌려올 때도 잠깐 보았던 소녀가 귀신처럼 나타나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엘리스 그라운디아·”
이내 이름을 짧게 읊조리자 땅의 마녀가 걸음을 멈춘 채 나를 빤히 보았다·
“분명 돌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
“대체 왜 돌아온 거죠?”
왠지 모르게 어딘가 슬픈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니까·”
다만 이것으로는 대답이 충분하지 못했을까·
내 답변을 들은 소녀는 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따지듯이 말을 이을 뿐이었다·
“당신의 꿈이 실현된 세상이었잖아요·”
“하지만 가짜였지·”
“가짜가 아니란 건 당신도 알잖아요?”
음 글쎄····
확실히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늘수록 단순한 꿈속 세상이 아니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상관없어·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다시 한번 단호하게 내 의지를 표명하자 소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점점 시간이 흐르며 절반 이상 하얀빛으로 물든 세상·
지지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나와 땅의 마녀를 사이에 두고서 어둠과 빛의 경계선이 그어진다·
“난 내 뜻을 분명히 표한 거 같은데 이제 슬슬 돌려보내 주지?”
짧은 듯 길었던 정적을 끝내고 묻자 땅의 마녀가 어린아이처럼 양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은 그곳에서 더 힘들고 슬픈 일을 겪게 될 거예요·”
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어요?”
소녀의 모습에 어울리는 유치한 질문이었으나 나는 진지하게 듣고서 답해 주었다·
“어· 그래도 돌아갈 거다·”
항상 뒤통수를 경계하고 나와 동료들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개같은 세상이란 것에는 조금도 이견이 없지만·
“또 소중한 걸 잃을 거예요· 지금까지 겪은 아픔은 아픔도 아닐 만큼 당신은 크게 절망할 거고요·”
저런 얘길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오지만·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
원래 삶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늘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한수는 늘 현실에서 도망쳤기에 평생을 모르고 살았다·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전사의 삶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 그러니까····
“얼마나 아프든 나는 나아갈 거다·”
“그 어떤 무슨 좆같은 일이 닥치든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악착같이 발버둥칠 거다·”
“나는 바바리안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소녀가 서 있던 어둠의 경계선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딛자 소녀가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선다·
솨아아아아아-!
어째선지 내가 나아간 만큼 줄어든 어둠·
오 이거 뭔가 재밌는데?
터벅·
한 걸음을 더 크게 내디딘다·
소녀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단지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채 내게 말을 건네올 뿐이었다·
“당신은····”
터벅·
“비요른 얀델의 삶을 선택한 거군요·”
터벅·
나를 바라보던 마녀가 이유 모를 허무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당신도 결국··· 우리랑 다를 게 없었던 거야·”
···응?
“우리?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문득 피어난 의문에 걸음을 멈추고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는 척하면서 결국 도망치고 있다는 것까지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 말—·”
그리 말하며 한 걸음을 더 크게 내디딘 순간이었다·
“그래 역시 우리가 옳았던 거야·”
소녀가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간다·
또각 또각·
점점 멀어지는 구두 소리·
그리고 그에 따라 줄어드는 어둠·
“야 기다려!!”
따라가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천천히 걷고 있는 소녀와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또각-·
그렇게 희미하게 들리던 구두 소리마저 사라지며 온 세상이 빛으로 뒤덮였을 때·
“얀··· 남···! 델 남작···!”
한 사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공간 전체를 울린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중간중간 끊기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명확하게 또렷해졌다·
“아아! 얀델 남작 놈아!”
“하아····”
마지막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아 좀! 이제 일어나라고 제바아아아아아알!!!”
“깼으니까 그만 흔들어라·”
“···어?”
마침내 돌아왔다·
내가 있어야 할 그곳으로·
***
사실 조금 걱정을 했었다·
과연 [던전 앤 스톤]을 다시 한번 클리어해서 가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혹시 전혀 다른 바바리안의 몸에 깃들어 다시 성인식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도 아니면 몇십 년 전 세상 아니면··· 몇십 년 후의 세상에서 깨어나는 건 아닐까·
나와 내 동료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미래에도 살아남아 있는 몇몇만이 노인이 된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는 건 아닐까·
뭐 결과만 말하자면 망상으로 끝났지만·
“그만 흔들라고 깼으니까·”
눈을 뜬 곳은 배의 갑판 위였다·
나는 잔뜩 젖은 채 대자로 뻗어 있었고 그 위에서 이백호가 내 어깨를 잡고 막 흔들던 참이었는데····
“···어? 혀··· 아니 남작님? 어! 깼다! 괜찮아요?”
외려 내가 눈을 뜨자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나는 이백호·
나는 빠르고 짧게 가장 중요한 것부터 확인했다·
“지금 상황은? 위급 상황이냐?”
“아 아뇨· 위험한 건 다 끝났어요·”
오 그렇다면 다행이네·
마지막 기억이 드라이즌에게 쫓기다가 물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던 데다가 하도 간절하게 깨우기에 급한 상황인가 싶었건만·
“내가 잠들어 있던 시간은?”
“얼마 안 됐어요·”
“시간으로 정확하게·”
“어··· 한 30분?”
30분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허무하다·
그곳에서 적어도 반년 이상은 머물다 왔건만·
“다른 애들은?”
“마법사들은 지쳐서 명상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보다시피 멀쩡해요·”
오케이 일단 내가 잠에 든 동안에 별다른 사건은 없었던 듯하다·
따라서 나도 조금은 여유를 갖고 그 동안의 사정을 청취했다·
“내가 배에서 떨어지고 어떻게 됐는지 말해 봐라· 하나도 빠짐없이·”
정보 공유가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이백호도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축약해 보자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남작님이 물에 빠진 걸 보자마자 제가 아래로 뛰어들었어요·”
이백호가 나를 구하려 물 아래로 뛰어들었다·
참고로 그 과정에서 깨어난 마물들이 막 다구리를 놓는 바람에 정말 죽을 뻔했다는데····
‘쓸데없이 자세한 무용담은 그냥 걸러 듣고·’
이런저런 재치와 임기응변을 발휘한 이백호는 끝내 물에 가라앉던 나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바바리안의 골격 자체가 무겁고 갑주까지 입은 게 천만다행이었다던가?
안 그랬으면 물살에 휩쓸려 폭포에 떨어졌을 테고 그렇게 되면 절대 구해 낼 수 없었단 게 이백호의 설명이었다·
“그다음에는 겨우겨우 배로 다시 올라왔고 얼른 도망쳤죠·”
“그렇게 쉽게···?”
이야기만 들어서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마력 전부를 태워 배에 있는 방어 마법진을 활성화했다고 한들 1등급 ‘특수 보스’인 드라이즌을 상대로 날 구해 낼 때까지 버텼단 것도 의아할뿐더러····
이후로는 ‘그냥 잘 도망쳤다’가 끝이라니?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저도 이해하는데요· 진짜 그게 전부예요· 막 죽어라 도망치니까 그냥 도망치게 냅두던데요? 애초에 배에서 버틸 때도 그냥 툭툭 건드는 정도로 끝났다 하고·”
이백호의 설명에 따르면 ‘드라이즌’의 행동에는 굉장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그야 원래 그렇게 온순한 몬스터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얘가 그렇다고 하니까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고····
“근데 그러면 왜 그렇게 다급하게 날 깨운 거지? 보아하니 딱히 위험할 일도 없었던 거 같은데?”
다음으로 제시된 내 질문에 이백호의 표정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변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아니··· 아 모르겠구나·”
“뭐 하자는 거냐?”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이백호가 헛기침을 연신 뱉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답변을 이어 갔다·
“크흠흠! 당연히 다급할 수밖에 없죠! 그때 남작님 심장이 멈췄었는데!”
“···뭐?”
“진짜로 남작님 죽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제야 보니까 이백호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물에 들어가 죽을 뻔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듯하달까·
홀딱 젖은 건 물론 여기저기 장비가 박살 나고 곳곳에 아물지 않은 상처들도 보인다·
‘저 상태에서 내 심장이 멈추니까 그렇게 울부짖은 거야?’
불현듯 혼잡한 틈을 타서 이백호를 배 아래로 밀어 버리는 걸 진지하게 고민했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근데 어차피 얘도 목적이 있어서 구한 거지· 날 진심으로 생각해서 저런 건 아니잖아?’
따져 보면 이백호도 목적이 있어서 자기 이득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날 구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말자·
암 이게 비정한 라프도니아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이잖아?
“이백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아니 됐다· 아무것도 아니다·”
“뭐예요· 형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뜬금없이 들려온 ‘형’이란 호칭에 움찔했지만 다행히 나머지 일원들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애초에 이백호 이놈 자체가 아무한테나 아무 말을 던지는 성격이긴 하니까·
“뭔데! 뭔데! 뭔데! 말해 줘! 말해 줘! 말해 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악!! 그러니까 더 정신 나갈 거 같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시끄러워진 이백호를 보고 있자니 그냥 말해 주고 조용히 시킬까도 싶었지만 냉정히 생각해서 그만뒀다·
그도 그럴 게····
‘왜 내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는가·’
이게 원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그야 이놈은 한때 날 죽이고 ‘소생의 돌’로 부활을 시키겠단 계획을 세웠던 놈이니까·
오늘 내가 죽고서 내가 갖고 있던 ‘소생의 돌’을 사용해 부활· 그다음에 기억을 지워진 나를 옆에서 구워삶으며 제멋대로 조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몰랐던 거겠지·’
생각해 보면 이놈 입장에선 내가 지금 ‘소생의 돌’을 지니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미샤가 그대로 갖고 있을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보관시켰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뭐 똑똑한 놈이니 그래도 내가 ‘소생의 돌’을 갖고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판단은 했을 테지만·
‘내 아공간은 날 죽이기 전에 절대 못 여니까· 얘한텐 도박이나 다름없었겠지·’
따라서 질문 자체를 중간에 끊었다·
그야 이에 대한 언급하는 순간 이 녀석에게 내가 소생의 돌을 보관 중이란 정보가 주어지니까·
이후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인데····
‘돌아왔다는 게 확 실감이 나네·’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있자니 이백호가 뭔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 맞다! 뭔 질문을 하려 했냐는 건 이제 됐으니 다른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해 봐라·”
“기절해 있는 동안에 드문드문 웃던데····”
“그런데?”
“대체 무슨 꿈을 꿨어요?”
이백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슨 꿈을 꿨냐라····’
거기서 겪은 것들에 대해 솔직히 말해 봤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게 분명하다·
그쪽 세상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그리 보였듯이·
땅의 마녀니 평행 세계니 뭐니 말해 봤자 필드 효과 때문에 잠에 들어 환각을 보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웃기네·’
근데 더 웃긴 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다·
내가 겪은 일들이 진짜 꿈인지 아니면 진짜로 실제 현실 세계에 다녀온 것인지·
그 과정에서 만난 마녀가 진짜인지 환상인지·
두근-·
아직도 조금은 헷갈린다·
실제로 어찌된 영문인지 깨어난 직후부터 거기서의 기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기도 하고·
꿈에서 깨면 인상 깊었던 몇몇 장면들만 기억나는 것처럼·
“아니 왜 말을 못 해요? 혹시 야한 꿈이라도 꾼 건 아니죠? 요컨대 주지육림으로 이뤄진 환각에 갇혀서 못 헤어났다든가 그런····”
“그런 거 아니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그러면 뭔데요?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않나?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대체 뭔데?
반문하며 핀잔을 주고도 싶었지만 괜히 얘기만 길어질 게 분명하기에 그냥 짧게 축약했다·
많이도 필요 없고·
살아가며 딱 한 번은 경험해 볼 법한·
“그냥 개꿈이었다·”
고로 아쉬워할 이유 또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