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때까지도 이백호는 크게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야 새끼 또 이러네· 진짜 우리를 호구로 아나·”
축 늘어진 브라이엇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던 이백호가 이내 힘껏 발길질을 가한다·
“봐 봐 이렇게 한 방 먹여주면 바로 일어날····”
퍽-!
“···응? 뭐야 이 새끼 왜 안 일어나·”
저 킥에 얻어맞고도 미동조차 없는 브라이엇·이백호의 표정이 굳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지랄?”이백호가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허리를 숙여 브라이엇의 상세를 확인했다·아니 정확히는 뺨을 연달아 후려쳤다·
“야! 야! 야! 야! 일어나!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야! 일어나라고!”
“그만해요· 이미 죽었어요·”
“아니 이상하잖아? 포션까지 먹여둔 새끼가 갑자기 왜 죽는데? 야! 할배! 네가 뭐 잘못한 거 아냐? 아공간을 열다가 죽인 거 아니냐고!”
느닷없이 책임의 소재가 된 파멸할배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침 하나를 브라이엇의 목에 찔렀다·그리고····
“···독이군·”
“···독? 아! 설마 아까 독가루 때문인가?”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지독한 극독일세· 보아하니 겉은 멀쩡해도 장기가 전부 녹아내렸군·”
“그럼 진짜 죽었다는 거지?”
“그렇네· 이번 건 의심의 여지조차 없—·”
파멸할배가 막 확답을 주려던 차 이백호가 한발 빠르게 ‘행동’했다·콰직-!예고도 없이 브라이엇의 머리통을 차서 그대로 축구공처럼 날려버린 것인데····
툭 데구르르·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적이 흐르기도 잠시· 이내 이백호가 짧게 읊조린다·
“아오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냐·”
별일 아니었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이백호·
“할배! 말해봐 이 새끼가 갑자기 왜 뒈진 거야?”
“아까 말했듯 극독이—·”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독가루는 우리가 처맞았는데 왜 이 새끼가 독에 걸려 뒈지냐고·”
“나라고 세상 모든 일을 아는 건 아닐세·”
파멸할배가 귀찮게 굴지 말라는 듯 인상을 팍 쓰자 이백호도 한숨을 내쉰다·
“···으음 혹시 미리 독약 같은 걸 먹었던 것 아니오?”
“아 들어는 봤어요· 비밀 임무를 하는 사람들은 항상 입 안에 독단을 숨기고 다닌다고····”
“모두가 아공간에 한눈이 팔렸을 때 그때 독단을 씹었다고 하면 설명이 되기는 하는군요·”
납득은 되는 이야기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봤자 더 이상한 분위기만 연출될 터·
“하····”
보아하니 이백호도 뭔가 다른 생각이 자꾸만 들고 있는 거 같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긋난 신뢰까지 써가며 심문한 게 바로 이전이다보니 또 대놓고 의심부터 하기엔 멋쩍었던 모양·
“됐고 센터 까던 거나 마저 이어가자· 뭔가 수상한 게 나오면 바로 알려주고·”
“···아 알겠소·”
“이 상황에서 뒷주머니 차다가 걸리면 진짜 나도 머리가 돌 거 같으니까 알아서 조심들 하고·”
마지막까지 동료들을 향한 경고의 말을 잊지 않는 이백호·
내가 얘네 입장이면 기분이 더러울 거 같은데 얘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것 말고는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이백호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듯하다·
“오케이 그럼 얼추 끝났네·”
여하튼 이후로 다 같이 드롭 템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분류가 거진 마무리됐다·장비면 장비·소모품이면 소모품·재화면 재화·
사람인 이상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지만 다들 이번만큼은 다른 쪽에 집중했다·바로 용도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물건들이 모인 곳이었다·
“하나씩 감정을 해보자고· 늑대 가면 늑대 메달· 얘네는 됐으니까···· 이거 이 그림은 뭐인 거 같냐?”
“글쎄··· 그냥 예술품 같소이만····”
“마력 시약으로 보이지 않게 쓴 글귀라든가 그런 건 보이지 않습니다·”
“오케이 그럼 다음· 이건 대체 뭐인 거 같냐?”
“이거··· 여성 속옷 아닌가요···?”
“나만 그렇게 본 게 아니었군요····”
“아오씨! 뭐 이딴 게 있어!”
집단 지성을 이용해 수상해 보이는 물건들을 하나씩 감정해나갔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양피지 하나가 나오기 전까진·
“이건 왜 여기에 분류가 된 거예요?”
“그냥 마법 주문서 아니오?”
마법에 문외한인 일반인이라도 그냥 찢기만 하면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스크롤·한데 이게 어째서 여기에 들어왔을까·
“누가 넣었어 이건?”
“저입니다····”
이백호의 질문에 GM이 다소곳하게 손을 든다·
“왜 넣었는데?”
그 질문에 파멸할배가 스크롤을 쓱 보다가 앞으로 나서며 대신 답했다·
“일반 마법 주문서가 아니기 때문일 걸세·”
“···?”
“이 주문서에는 고대 마법이 담겨 있네·”
“무슨 고대 마법인데?”
“공간 이동 계열인 거 같기는 한데 그 외에는 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혹시 아시겠는지요?”
이내 GM의 질문에 파멸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어쩌면 우리의 동아줄이 될지도 모를 물건인데·”
“동아줄···?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말해봐·”
관심이 생긴 이백호가 재촉하자 파멸할배가 스크롤의 이름을 말했다·
“귀환 주문서·”
“···?”
“그게 바로 이 물건의 이름일세·”
처음 듣는 아이템이었다·***
귀환 주문서·[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하면서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스크롤·다만 그럼에도 너무나 직관적인 네이밍 덕일까?
파멸할배가 ‘동아줄’이라고 한 말이 곧바로 이해가 된다·
“···그럼 이걸 쓰면 도시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그건 아무도 알지 못하네· 이 주문서는 지정된 위치로 ‘귀환’을 시켜주는 효과만 갖고 있으니까·”
“사실이라면 정말로 놀랍군요· 고정 좌표 마법진도 마력 변환기도 없이 단지 주문서 한 장으로 공간 이동을 가능케 하다니·”
“그러니까 고대 마법 주문서인 것 아니겠는가· 고대 시절에는 더 놀라운 마법들이 가득했다고 전해지네·”
예상과 달리 도시로 즉시 귀환할 수 있는 주문서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일행들의 눈빛에는 짙은 기대감이 어렸다·그야 지금보다 최악일 건 없으니까·
“이 주문서를 사용하면 적어도 이 유적은 벗어날 수 있다는 거네요?”
“그렇네· 하나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할 걸세· 만약 이 주문서를 타고 넘어간 곳이 ‘잿빗 세계’라면 큰일일 테니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단 말씀이시군요·”
늘 그렇듯 파멸할배는 정보만을 뱉을 뿐 결정은 우리 몫이라는 스탠스를 취했다·고로 일행들의 시선이 나 그리고 이백호에게로 모였다·
혹여나 이번에도 우리 둘의 의견이 갈리면 골치가 아파지리라 여기는 눈치였다·하지만····
“난 일단 써보자는 쪽인데 남작님은 어때요?”
“나도 같은 의견이다·”
이번에는 둘의 생각이 갈리는 일 없이 일치했다·귀환 주문서라고 안전하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지만 일단 무언가 위기라도 생겨야 그걸 돌파하든가 말든가 하지·
여기서 이렇게 몇날 며칠이고 갇혀 있는 건 질릴 만큼 했다·
“다만 그래도 귀환서를 찢기 전에 만반의 준비는 갖춰야겠지·”
“저도 어그리요·”
“····”
“아하하 동의한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의견 일치가 끝난 후에는 아직 감정하지 못한 남은 물건들을 살폈다· 하나 귀환 주문서처럼 특별한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따라서····
“귀환 주문서가 총 여덟 장····”
“이렇게 되면 각자 한 장씩 쓰고서도 두 장이 남네요·”
총 인원이 여섯이기에 남는 두 장은 나와 이백호가 나눠서 가졌다· 참고로 브라이엇에게서 나온 장비와 소모품들을 적절하게 분배·
이후로는 개인 정비 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었다·
“다들 준비됐으면 그럼 찢는다?”
이내 이백호가 주문서를 들어 올리자 나머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서를 들어 올렸다·그리고 모두가 동시에·지이이이익-!주문서를 찢었다·***
「캐릭터가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습니다·」「캐릭터가 지정된 위치로 이동합니다·」***
또옥 또옥 똑-!어디선가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이를 들으며 눈을 뜬 나는 서둘러 주변을 확인했다·
“여긴··· 수정 동굴?”
“아뇨 조금 다릅니다·”
1층 수정 동굴을 떠올리게끔 하는 동굴 안·
“그래도 다행히 낙오자는 없네·”
우선 일행 모두 같은 공간으로 이동에 성공했으며 주변에 마물이나 적은 보이지 않는다·다만····
“조용·”
맞은편 통로에서 모닥불 특유의 붉은 조명이 일렁거린다·화르륵-!이를 확인한 이백호가 내게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자연스레 일행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게 조용히 한 걸음씩 걸어나갔다·터벅 터벅·뭐 암만 조심히 걷는들 철갑을 걸친 이 거대한 몸뚱이에서 소리가 안 날 리 만무했지만·아무튼·
“····”
이내 코너를 돌자 모닥불 앞에 앉은 정체불명의 인물이 눈에 들어온다·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임에도 미동조차 없이 모닥불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
“자네들이 이곳에 왔다는 건··· 브라이엇 군은 이미 죽었다는 뜻이겠군?”
그 누군가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성실한 친구였는데 말이야····”
“됐고 누구냐 넌?”
경계를 하면서도 호전적인 말투로 묻는 이백호·‘뭔가··· 목소리가 익숙한데···?’
그런 기시감이 들며 머릿속에서 위험하다는 경종이 울리기 시작하던 그때·
스르륵·정체불명의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내리며 우리를 응시한다·“그래도 오랜만일세 모두들·”자글자글한 주름·새하얀 백발과 수염
부드러운 인상과는 대비되는 강렬한 눈빛·“···!”[던전 앤 스톤]의 제작자 아우릴 가비스였다·
아우릴 가비스·이 빌어먹을 게임을 만든 장본인이자 아직까지도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수상한 늙은이·
현대로 귀환했던 꿈속에서 만난 걸 제외하면 이 할배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원탁에서였다·뜬금없이 나타나
‘고스트 버스터즈’라는 커뮤니티 자체를 폐쇄하겠다 하더니····마지막에는 의미심장한 조언까지도 남겼다·
[이백호 그 친구와는 너무 친해지지 말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그런 조언을 받은 내가 지금 이렇게 이백호와 함께 잠시나마 여정을 함께하고 있고 그 여정에서 이 할배를 만났다는 게·
“····”
“····”
물론 묘한 감회가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이 할배가 남긴 말에 대해서도 빠릿하게 분석했다·
‘조금 전에 분명 모두들이라고 했지···?’
그래도 오랜만일세 모두들·심지어 그 말을 하면서 이 할배는 우리를 쓱 둘러보기까지 했다·
마치 전부 다 구면이었다는 것처럼·
‘설마 렉 아우레스 제이나도 이 할배랑 인연이 있는 건가?’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쓱 보던 때였다·
“다들 못 본 새 많이 과묵해졌군?”
이어지던 정정을 끊고서 한 번 더 말을 건네오는 할배·이백호가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늙은이· 찾으려 할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호전적인 눈빛·하나 이를 대하는 아우릴 가비스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능청스럽게 넘어갈 뿐이었다·
“지금 시대를 이끌어가는 자네들 앞에 나 같은 옛날 사람이 나타날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옛날 사람은 개뿔· 야 늙은이· 옛날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흐음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는 듯한 투로 되묻는 아우릴 가비스를 보며 이백호가 짧게 읊조렸다·
“다 뒈졌어·”
살아 있으면 옛날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걸까?정확한 의도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이 되고 싶으면 말해·”
아우릴 가비스를 향한 이백호의 적대감·
“언제든 두 팔 걷고 도울 테니·”
이것 하나만큼은 진짜다·연기 같은 게 아니라·
까드득·하긴 이백호 입장에서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일 터였다· ‘아우릴 가비스’는 우리들을 이 좆같은 세상으로 끌고 온 장본인이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쌓인 모든 증오가 자연스럽게 저 할배에게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어르신·”
그때 돌연 가만히 있던 GM이 대화에 껴들었다·이백호와 마찬가지로 십수 년 넘게 이 세상에 갇혀 있던 고인물 플레이어인 GM이지만 목소리에 깔린 감정은 전혀 달랐다·
“드디어 다시 뵙게 되는군요 어르신·”
눈빛과 목소리에서 호의와 존중이 물씬 묻어나는 GM· 딱 봐도 단순히 강약약강의 법칙 때문에 납짝 엎드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지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허허 그게 어디 감사할 일인가?”
“둘은 대체 뭔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건데?”
이백호가 신경질적으로 껴들었으나 GM과 할배 모두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내놓지 않았다·다만 추측을 해보자면····
‘커뮤니티 얘기를 하는 건가?’
대화의 흐름상 왠지 그것밖에 없어보인다·그도 그럴 게 GM이 초짜 시절일 때 고스트 버스터즈의 운영 권한을 넘긴 게 바로 이 할배였으니·
“오히려 자네라면 내게 더 속상하고 서운한 게 많을 터인데 그리 말해주니 고마울 뿐일세·”
“미리 언질을 주시지 않아 조금 놀랐습니다마는···· 염치를 안다면 서운할 리가 있겠습니까· 빌려주셨던 걸 돌려받았을 뿐인데요·”
“허허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구먼· 자네라면 분명 크게 될 줄 알았네·”
“···덕분입니다· 그런데 혹시 남작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이신지····”
Exelente hist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