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1
이면 세계로 들어간 제니얼은 일순간 기억의 파도가 머릿속에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들이 제니얼의 뇌리를 파고든 것이다·
정보의 주체는 세릴이었다· 일찍이 죽음을 맞이한 여동생이 아닌 도플갱어로서 살아간 세릴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 쌓인 피로는 해결 못하잖아! 됐으니까 말대꾸하지 말고 목욕하고 가라? 목욕물 받아놨으니까 얼릉!』
일에 매몰되어 저택을 떠나려던 자신을 붙잡고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라며 배려를 해주던 세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거 맛있어? 항상 보면 맛있게 먹는 거 같더라·』
약물의 맛을 궁금해하며 은근슬쩍 물어오는 세릴이 기억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장난을 쳤더니 버럭 화를 내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였다·
『바보 아니야? 일이 어떻게 오빠보다 더 중요할 수가 있어!?』
사경을 헤매던 자신을 간호해준 세릴에게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일에 몰두하라고 하니 일보다 오빠가 더 소중하다 말해준 따스함 또한 기억한다·
『오빠가 내 속옷을 훔쳐간 건?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어디서 이상한 오해를 하고 저택에 돌아와서 따져 묻던 것도 기억난다· 얼마나 웃겼던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다정한 오빠가 좋았어· 내 커피를 마시고 맛있다고 해주는 오빠가 좋았어· 오빠가 나를 안아주는 것도 어렸을 때를 기억해주고 꽃놀이를 가자고 한 것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모두···』
그런 세릴을 제니얼은 울리고 말았다· 세릴을 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여린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만 것이다·
『어째서 내가 가짜라는 걸 말해주지 않은 거야? 왜 계속 숨기고 있었던 건데? 당신은 알고 있었잖아· 내가 세릴 말레이그가 아니라는 걸···!』
거짓으로 시작한 상처는 더욱 더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릴은 제니얼의 여동생으로 있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말레이그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오빠를 보필하려고 한 것이다· 그 선량한 마음은 결국 자신의 오빠를 살리기 위해 몸과 영혼을 내던지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세릴···”
세릴에 대한 기억이 모두 돌아온 제니얼이 주먹을 꾹 쥐었다· 이면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세릴에 대한 기억이 모두 되살아난 것은 신의 농간일까 축복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면 현세로 나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점이었다·
색을 잃어 어두컴컴한 세계에 유일하게 색을 잃지 않고 빛나고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다· 마치 힘들다면 언제든지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느낌이었다·
‘미안하지만···’
세릴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 현세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 다짐한 제니얼은 산을 내려가 말레이그 저택에 들어갔다·
사용인들로 인해 언제나 북적여야 할 저택은 아무도 없어 휑하였다· 먼지가 수북히 쌓인 저택을 거닐던 제니얼은 얼마 안 가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여러 방들로 이리저리 이어져 있던 것이다· 그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제니얼은 자연스럽게 세릴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긴···’
모든 가구와 벽면이 흑과 백으로 칠해진 방의 책상 위에는 색을 가진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제니얼은 그것이 일기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기장을 들어 펼치자 세릴의 필체로 쓰여진 글이 보였다· 아마 이곳에 갇히고 나서 얼마 안 가 일기를 작성한 것으로 보였다·
일기의 대부분은 가족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그중에 눈에 띄인 글줄은 오빠인 제니얼이 아무런 탈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는 바람이었다·
세릴은 이곳에 갇혀 아무도 자신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가족들을 잊지 않고 매일 일기를 써내려간 것이다·
『여행을 떠나자· 그럼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
수백 페이지의 일기 마지막에는 필압이 많이 줄어든 상태의 글이 적혀 있었다· 글만 봤을 뿐인데도 세릴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필체가 무너져 있었다·
‘여행을 떠났다니···’
그제야 저택이 관리되지 않고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발자국을 보면 세릴은 이따금 저택에 들렀다가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세릴을 찾아 무작정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이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세릴을 마주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어쩌면 생각보다 긴 세월을 아무런 소득도 없이 저택에서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세상에 갇혀 생활했을 세릴을 떠올리면 몇 년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널 기다리마· 하지만 그 전에···’
아무리 이면 세계의 저택이라고 해도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꼴을 보고 있기가 힘들다· 제니얼은 저택을 청소하기 위한 도구를 가지러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가장 먼저 청소할 방은···’
아무래도 세릴의 방이 될 것 같았다·
*
“세상에서 가장 높은 마탑이라고 해서 와봤더니···”
막상 실제로 보니 철근 덩어리일 뿐이었다· 한숨을 깊게 내쉰 세릴은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펼쳐보았다·
이제 세계지도에 동그라미 표시가 안 된 곳이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에도 모두 가봤으니 이제 더 여행을 하고 싶어도 할 게 없었다·
“에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는데 막상 여행을 시작하니 그리움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커지고 말았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광경을 볼 때마다 오빠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오빠는 없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 우울하게 있던 세릴은 품에 넣고 다니던 제니얼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따라 더 매정하게 보인다·
“오빠· 오늘 드디어 마지막 관광지에 도착했어· 언제나처럼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지만 괜찮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으니까· 아 맞다·”
세릴이 사진을 돌려 철근으로 이루어진 탑을 보여주었다·
“짜잔! 이거 보여? 가이드북을 보면 호들갑을 엄청 떨길래 와봤는데 별 거 없지? 오빠라면 분명 무게 잡으면서 이 철탑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겠지만··· 하하·”
혼자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괜히 무안해져서 웃음이 나온다· 실없는 웃음은 곧 한숨이 되어 길게 늘어졌다·
잠시 가만히 있던 세릴은 사진을 돌려 제니얼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사진 속의 제니얼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가끔이라도 좀 웃어주라··· 그게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잖아 오빠·”
집에 있는 앨범 사진 중에 제니얼이 웃는 사진이 없어서 이걸 가져왔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가 웃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둘 걸 싶어서 후회가 밀려든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건 오빠 잘못 아니야? 어떻게 사람이 웃은 채로 사진을 찍은 게 단 한 장도 없을 수가 있어? 오빠가 무슨 골렘이야? 기계냐구!”
화를 내보지만 사진 속의 제니얼이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다· 제니얼과 눈싸움을 하던 세릴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진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람···”
스스로가 하고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제 돌아갈까·”
이제 이곳에 더 있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물론 저택에 돌아간다고 해도 뭔가 바뀌는 건 없을 테지만 적어도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세릴은 배낭을 매고 저택에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저택에 돌아가는 것만 해도 긴 세월이 걸리겠지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먹고 잘 필요가 없었으니까·
*
차를 타고 배를 타고 가끔은 사막을 걷고 바다를 건너고 길을 잃고 또 길을 찾으며 몇 년을 허비한 결과 세릴은 저택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저택을 떠나 세계 여행을 시작한 것이 적어도 이십 년은 넘었던 것 같은데 저택은 떠났을 당시와 조금의 변화도 없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이곳이구나· 낮게 웃음을 흘린 세릴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는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입구를 넘어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걷던 세릴은 문득 드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택의 앞뜰이 무척이나 잘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예초를 한 것인지 잔디의 예고도 일정하고 그 색들이 칙칙할지언정 꽃들도 화단에 잘 심겨져 있었다·
‘···뭐야?’
이곳이 시공간의 흐름이 기이하게 흐르는 이면 세계라고는 해도 시간이 아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아주 느리게나마 조금씩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방증으로 단발이었던 세릴은 지금 장발이 되어 있었다· 키도 여전히 작기는 했지만 예전보다는 조금 커졌을 정도다·
그러니 이십 년이나 넘게 자리를 비운 저택은 정글이 되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이렇게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은 솔직히 말해 상식적이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의아함이 몇 배로 증폭되었을 무렵에 현관문이 열린다· 열린 현관문 너머에는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있는 제니얼이 서 있었다·
모든 것이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세계 그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세계에서 제니얼만이 유일하게 색을 가진 채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만나니 두 눈이 절로 동그랗게 떠진다· 혹여 꿈을 꾸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환각을 보는 게 아닐까·
제니얼이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현실을 부정해간다· 세릴과 마찬가지로 당황함이 역력했던 제니얼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말문을 열었다·
“여행은 즐거웠나·”
참으로 감미롭고도 따스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세릴은 이곳이 자신의 꿈이 아니며 환각을 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니얼은 실제로 자신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라는 것을 이성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척이나 기뻤지만 기쁘다고 무작정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오빠와 떨어져 이곳에서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보낸 시간이 자그마치 수십 년이었다· 날짜를 세는 것도 포기했을 무렵에 대뜸 제니얼을 만나게 되었으니 온갖 감정이 북받쳤다·
“여 여행은···”
그러나 세릴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눈앞의 오빠가 진눈깨비처럼 사라질까 봐 불안했던 것이었다·
또한 자신을 찾아온 오빠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여행은···”
즐거웠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억지로 지은 미소는 어그러지고 연갈색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이제 틀렸다·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즐겁지 않았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즐겁지 않았어···!”
홧김에 소리친 세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나온다· 두 눈을 꾹 감은 세릴이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서럽게 흐느꼈다·
“오빠가 없었으니까· 내가 내가 보고싶다고 몇 번이나 빌어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끄윽 흑! 울음소리가 점차 거세지며 말소리가 슬픔에 잠겨간다· 자기 키만한 배낭을 맨 채 그러고 있으니 가여움이 배가 되었다·
결국 제니얼은 계단을 내려가 세릴에게 다가갔다· 손을 벌린 제니얼은 세릴을 가볍게 품에 안고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다·”
“미아 미안하며 흐윽 다야? 이제 와서 안아주면 요 용서하주아라서?”
그러나 말과는 달리 세릴은 제니얼을 마주 껴안았다· 그간의 설움이 폭발한 것인지 세릴은 제니얼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는 엉엉 울어버렸다·
흐르는 눈물이 물줄기와 같았으며 떨리는 몸은 세릴의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제니얼을 어찌나 꼭 껴안았는지 손 끝은 노랗게 물들어갔다·
“이제 괜찮다·”
제니얼은 그런 세릴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돌아가자· 모두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세릴은 여전히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라도 따라갈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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