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
알 수 없는 오해 속에서 광장에 도착한 제니얼은 쭉 이레아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도 그럴게 이레아는 역에서 내리고 나서도 이상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과 슬픔이 담긴 눈동자로 힐끔힐끔 돌아보는 이레아를 보고 있노라면 없는 죄도 생길 것 같아 괜히 불안해진다·
하지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제니얼의 입장에서는 이레아가 왜 저러는 건가 싶어서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혹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황자보다야 대접이 낮다고는 하지만 이레아는 제국의 황녀이며 연화궁의 주인이다· 당연하게도 가지지 못할 것이 없었고 누리지 못할 것이 없었다·
당장 연화궁에서 이레아가 사용하는 개인 욕실만 하더라도 제도의 평민이 주거하는 집 한 채의 크기보다 넓다·
그러니 이레아에게 있어 제도의 지하철은 갑갑하고 복잡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지금의 태도는 이해 가능한 범주가 아니었다·
‘신민들의 생활상을 경험하고 싶다고 한 건 너이지 않았나·’
제도의 거리를 활보하며 신민들의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고 한 건 이레아였다· 이곳에 억지로 끌고 온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도 저렇게 우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허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제도의 번화가로 온 이상 이레아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근처에 제가 아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가시겠습니까·”
제니얼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이레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사리 허락을 받은 제니얼은 이레아를 레스토랑에 안내하였다·
그리 제니얼의 안내를 받아 입장한 레스토랑은 꽤나 근사한 곳이었다· 화려하나 과하지 않은 인테리어가 시선을 잡아끌고 사방에 은은한 조명이 설치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한 켠에는 제도의 유명 악단이 우아하게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었으니 고풍스러운 느낌이 절로 들고 있었다·
‘예뻐···’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이레아였으나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제니얼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당했는데 지금 와서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이레아는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해당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우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난처한 걸 넘어서 이제 슬슬 답답해진다· 이레아의 기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제니얼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십니까· 말씀이라도 주셔야 제가 시정할 수 있을 겁니다·”
제니얼의 말에 이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레아는 몇 번 망설이는가 싶더니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교수를 탓하고 싶지는 않아요· 시녀장에게 듣기로 남자의 성욕이란 이따금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다고 하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저는 그런 변태적인 행위에 익숙하지 않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나부터 열까지 영문 모를 말들을 늘어놓고 있으니 차마 변명도 할 수 없어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요· 저는 교수를 좋아하고 있지만··· 교수가 여태 저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게 조금은 무서워요·”
“죄송하지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건 이건 발뺌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잖아요· 교수의 지위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겠지만 저에게는 계속 상처로 남을 거예요·”
이레아가 시선을 내린 채 어깨를 움츠린다· 눈가에는 서서히 눈물이 맺히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허나 제니얼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대체 뭘 했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최소한 죄목이라도 알아가고 싶었던 제니얼이 최대한 침착하게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만 제가 무슨 상처를 드렸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레아가 천천히 주먹을 쥔다· 다소 거칠어진 호흡 속에서 눈을 꾹 감은 이레아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말했다·
“교수가··· 교수가 제 엉덩이에 성기를 비볐잖아요···!”
동시에 좌중에 침묵이 찾아든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손님들은 물론이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던 악단 음식을 서빙하고 있던 웨이터까지 일제히 멈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들의 면면에 걸린 표정은 당황과 경멸이었다· 남들보다 발육이 좋기는 하지만 앳된 얼굴을 가진 이레아는 어디까지나 미성년자로 보이고 있었고 실제로 미성년자가 맞았다·
반면에 제니얼은 누가 봐도 어른이다· 방금 이레아의 발언으로 인해 둘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머리색을 바꾸고 간단하게나마 변장을 한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느껴진다· 본래 모습으로 왔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을 것이다·
물론 변장을 했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이 좋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사달이 날 것 같았던 제니얼은 고요함 속에서 오른손을 들었다·
“웨이터· 주문서를 가져다주게· 최대한 빨리···”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넣기 전에 식당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
빠르게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온 제니얼은 광장의 벤치에 앉아서 이레아에게 사건의 경위를 그러니까 성기가 어떻게 이레아의 엉덩이에 닿았는지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였다·
이레아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느끼게 된 이유를 소상하게 진술하였고 덕분에 제니얼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니얼이 입을 가린 채 즐거운 듯 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이레아는 당황하며 딸꾹질을 흘렸다· 이레아가 보기에 미친놈처럼 보였던 것이다·
“왜 왜 웃는 거예요? 그 변태적인 행위가 교수한테는 웃긴 건가요?”
“그것이 아니오라··· 전하께서 단단히 착각을 하신 것 같아서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
“착각이라니요?”
제니얼은 의문을 표하는 이레아에게 지팡이를 내밀었다·
“한 번 만져보시겠습니까·”
이레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제니얼이 내민 지팡이의 기둥을 매만졌다· 그리 몇 번 만지작거리던 이레아는 살며시 입을 벌리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
잠시 멍하니 있던 이레아가 고개를 푹 숙인다· 이어 양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주먹을 꾹 쥐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옅은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레아 너 진짜 바보야?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해서 교수를 불편하게 만든 거야· 제정신이니? 제정신이야?’
이레아가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무렵 제니얼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벤치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부끄러움을 삭힐 시간이 필요해 보였으니 이레아에게 얼마간 시간을 주려는 것이다· 그리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제도 외곽에 늑대인간이 출몰했다는 소식 들었어? 마을 촌장이 모험가 길드에 직접 토벌 의뢰를 했다던데· 출몰한지 한 달은 됐다는데 다행히 사상자는 없나봐·”
“그래? 그런데 늑대인간 정도면 경비대에 보고하는 게 좋지 않나·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쪽이 확실할 텐데·”
···늑대인간? 그것도 제도 외곽에?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니 모기 날개짓처럼 낮은 목소리가 제니얼의 상념을 방해하였다·
“미 미안해요···”
돌아보니 이레아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혼자 오해하여 제니얼을 이상하게 본 것이 그리고 그 오해가 꽤나 문란하다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해서···”
마음이야 잘 알겠고 오해도 풀었으니 계속 궁상을 떨게 놔둘수는 없었다· 다만 이레아가 비슷한 오해를 하지 않게끔 처신할 필요는 있었다·
“전하· 예전에도 저는 신하된 자로서 전하의 몸에 대해 일말의 욕정도 하지 않는다 말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제가 불충을 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상황을 정리하고자 내뱉은 말이었으나 이레아는 다소 충격을 받은 것처럼 훌쩍이더니 제니얼을 힐끔 바라보았다·
“무엄해요· 누구 멋대로 그게 불충이라고 하는 거예요···”
분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떨리는 목소리에 감정을 꾹 눌러담은 이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욕정을 가지는 거··· 조금 정도는 괜찮으니까 하란 말이에요·”
일순간 침묵이 감돈다·
‘전하?’
이번엔 또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운 제니얼이였다· 여자란 원래 이리도 어려운 동물인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사설 탐정 세릴]
멋들어진 명패를 둔 세릴은 오늘도 탐정 사무소에서 사건 기록들을 읽어내려간다· 세릴이 입고 있는 블라우스의 가슴팍에는 제국 공인 탐정임을 의미하는 배지가 달려 있었다·
깃펜과 돋보기가 교차하는 배지는 세릴이 형사를 도와 총 일곱 건의 미제 사건을 해결했을 때 제국 경무청에서 직접 하사한 명예로운 물건이었다·
미제 사건 외에도 여러 사건사고를 해결한 경험이 있었기에 세릴은 같은 탐정들이나 형사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 인사였다·
그들 중 몇몇 사람들이 명성을 바탕으로 사업체를 만들어 기업형 탐정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왔으나 세릴은 거절하였다·
탐정이란 직업을 사랑하지만 굳이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말레이그 가문에 속한 이상 돈 걱정이 크게 없는 것도 한 몫 하였다·
“정리 끝났으니 이건 내일 경감에게 자세히 물어보면 되겠네· 다음은··· 고양이? 고양이 찾는 걸 왜 탐정한테 의뢰를 하는 거야? 이런 건 좀 주인인 너네들이 찾으라고···”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의뢰서를 책상 옆으로 치워버린 세릴이 다음 서류를 보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곧 해가 지는데 지금 시간대에 의뢰인이? 의아하긴 했으나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하기는 싫었던 세릴이 문을 향해 말했다·
“안에 있으니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며 제복을 잘 차려입은 기사 한 명이 들어온다· 세릴도 익히 알고 있는 기사였다· 이레아가 병문안을 왔을 때 옆에 서 있던 게 지금 눈앞의 기사였으니까·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루이넬이 가까이 다가온다· 손에는 웬 책을 들고 있었기에 세릴은 루이넬이 의뢰를 목적으로 이곳에 방문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름이 아니라 제니얼 공자님께서 공녀님께 선물을 하나 전해주라고 하여 이리 방문하였습니다· 곧 전하께서 복귀하시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하고 찾아온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물이요?”
“아 예· 이 책입니다·”
루이넬이 들고 있던 책을 건넨다· 의아해하면서도 시선을 내린 세릴은 책의 제목을 보고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올바른 성 문화를 바탕으로 해결하는 성욕]
대체 무슨 의도로 오빠가 자신에게 이걸 전해주라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니 세릴은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그럼 저는 업무가 바빠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루이넬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긴다· 루이넬이 방 밖으로 나가고서야 세릴은 한숨을 내쉬고는 책을 내려놓았다·
‘···잠깐만· 나 진짜 무서워지려고 그래·’
공포가 막대한 공포가 느껴진다· 여동생과 관계를 맺는 성인 잡지랑 속옷을 훔친 건은 정말 어떻게든 합리화를 해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건 아니다·
대체 어느 오빠가 여동생에게 이딴 책을 선물할 수 있겠는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지만 일단은 책을 펼쳐보기로 하였다· 혹시 모른다· 안은 건전한 내용일지도···
‘좋아· 진정하자·’
세릴은 심호흡을 하며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목차]
1· 올바른 성관계를 위한 준비물
2· 피임에 관한 잘못된 상식
3· 주기적인 성관계가 인간관계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
세릴은 바로 책을 덮었다·
“이 이 미친 오빠가···!”
의도가 너무 명확해서 역겨울 지경이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세릴은 이마를 짚으며 이를 꾹 깨물었다·
‘진짜 안 되겠어· 확실하게 선을 긋지 않으면···’
남매간의 우정이 깨지든 말든 이젠 진짜 가만히 지켜볼 구간이 지나버렸다·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해서든 오빠에게 이 책을 선물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설마 오빠는 날 정말 여자로 보는 거야? 아니지? 아닐 거야···’
그렇게 루이넬이 뿌리고 간 재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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