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제니얼의 한 마디에 이레아는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저리도 싸늘하게 자신을 응시하며 조금의 예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말을 내뱉는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루이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시선이 돌아가지 않는다· 저 집요하고 끈적한 눈빛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아서 목이 간지럽고 간헐적으로 호흡이 떨린다· 이것이 공포의 감정이라는 걸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꿀꺽─
이 남자의 말을 무시했다가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마른 침을 삼킨 이레아는 제니얼의 눈치를 보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얼떨결에 굴복하고 말았으나 제니얼을 바라보고 있는 눈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황녀이자 이 연화궁의 주인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니얼은 같잖고도 우스웠다· 저 자존심에 솔직하지 못한 마음에 희생당한 제국의 신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를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윽박을 질러서야 본말전도였다· 반개한 눈으로 호흡을 가다듬은 제니얼이 자신은 황녀의 교육자라는 것을 되새기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레아· 어째서 스스로가 건 약속을 어기려고 드는 건가·”
제니얼의 질문에 반응한 것은 이레아가 아니라 루이넬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이넬이 검집을 붙잡으며 발끈하였다·
“무엄합니다! 감히 황녀 전하께 그런 태도로···!”
루이넬은 무어라 더 내지르려고 했으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니얼이 여상하게 손을 드는 것으로 루이넬의 발언을 제지하였기 때문이다·
“입을 좀 다물지· 지금 나는 전하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니·”
호위 기사는 끼어들 자격도 없다는 뉘앙스에 루이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다 너 따위는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이레아만 응시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니얼 교수님 지금 뭐라고-”
“입을 다물라고 했을 텐데·”
제니얼의 시선이 루이넬에게 닿는다· 그 순간 루이넬은 맹수와 마주친 사람처럼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이나 제니얼의 눈빛은 날카롭고 흉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성의 끈이 하나라도 더 끊어지는 순간 널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엄포라도 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으름장에서 비롯될 파국은 단순히 제니얼 말레이그와의 인간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황제 다음가는 권력가인 말레이그 가문의 장남이 바로 제니얼이다·
제니얼이 만약 눈이 돌아간다면 호위 기사 하나를 갈아치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갈아치우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온갖 곳에서 압박을 줄 수 있는 게 바로 눈앞의 제니얼이었다·
그건 곧 주군인 이레아를 곁에서 모시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과 같았다· 목숨은 아깝지 않아도 이레아를 잃는 건 아까웠던 루이넬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를 꾹 깨물고 검집을 잡은 손은 파르르 떨려간다· 어떻게 봐도 정중한 사과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제니얼은 굳이 그 점을 책잡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루이넬이 아니라 이레아였으니까· 루이넬에게서 시선을 돌린 제니얼은 이레아를 다시금 바라보며 예의 그 질문을 던졌다·
“네 호위 기사도 저리 용기 있게 나서는데 너는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작정이지· 어째서 스스로가 건 약속을 어기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이레아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나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었던 이레아가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나 나는···”
공기가 무겁고 속이 울렁거린다· 황제 폐하인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을 때가 생각날 정도로 지금의 분위기는 무서웠다·
다른 교수들이라면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고 알아서 고개를 숙였을 텐데 어째서 눈앞의 제니얼은 그러지 않는 걸까·
그리 생각하며 조바심을 내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저 철옹성 같은 인간은 변함없이 이쪽의 대답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대답을 해야만 했다·
“야 약속 같은 건 어 어겨도 되는 거니까···”
“왜지·”
“어 으 응?”
“어째서 약속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물었다·”
“그 그건···”
진땀이 난다· 마치 엄한 선생에게 혼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남몰래 침을 삼킨 이레아는 양 무릎을 모은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스스로를 변호하였다·
“나 나는 황녀니까··· 아버지인 황제 폐하의 자식이고 이 연화궁의 주인이니까· 만델 백작님도 항상 나보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 된다고···”
만델? 이레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니얼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만델 백작이라면···’
제국의 멸망을 부추긴 간신들 중 한 명이다· 숨기는 게 많았지만 항상 처신을 잘 하고 돌아다녔기에 간신이라는 것을 쉽게 잡아내지 못하였었다·
적월성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간부는 아니지만 적월성이 주는 돈을 받아먹으며 황실이 그들의 계획대로 굴러가게끔 만드는 것에 일조한 사람이다·
그런 만델 백작이 벌써부터 이레아와 연을 맺고 있었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다· 만델의 입김이 이레아의 오만방자한 성격에 적잖게 기여하였으리라·
골치가 아팠지만 일찍 알아낸 것은 다행이었다· 조금 번거롭기는 하겠으나 지금 시점에서 만델과 그 가문을 멸족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레아의 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먼저였다·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 또한 교육자의 본분이니까· 그 과정이 조금 괴팍할지라도 말이다·
“황제 폐하의 자식이라 약속 같은 건 어겨도 된다라· 그런 머저리 같은 변명이 내게 통할 것이라 생각했나·”
자신을 머저리라고 칭한 것에 놀랐는지 이레아의 손등이 움찔 떨린다· 루이넬 또한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검집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나 제니얼은 하등 상관도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다· 대륙에 도사린 분란을 해결하고자 직접 거동하시어 수많은 지역을 통일하고 지금의 제국을 이룩하셨지· 황제 폐하를 증오하고 시기하는 마계조차도 정복왕이란 이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다·”
“그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니· 너는 모른다· 네가 황제 폐하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황제 폐하의 자식이니 약속을 어겨도 된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여태 단 한 번도 자신이 입밖으로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폐하께서는 약속을 철통같이 지키셨을까· 낮게 속삭인 제니얼이 이레아를 올곧이 바라보았다·
“군주에게 있어 약속은 만 명 나아가 십만 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약속을 철회하지 않는 것이고 철회할 수 없는 것이다· 한데 지금의 네 행태는 뭐지?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고 약속을 거두는 꼴이 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이레아의 맑고 아름다운 눈방울이 물기에 젖어간다·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비참하게 보일 뿐이었다·
“···명심해라· 권력과 힘은 항상 책임을 동반한다· 책임이 결여된 권력은 항상 누군가의 고통을 낳을 뿐이다·”
군주의 잘못된 행동 하나에 마을이 사라지고 잘못된 발언 하나에 도시가 파괴당한다· 지금의 이레아가 그 두터운 책임의 굴레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충고를 아낄 순 없었다·
“또한 처신에 항시 주의해라· 병사와 신하의 충성심은 모시는 자의 평판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황궁 밖에서까지 말괄량이라는 소리를 듣는 네가 이해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말을 끝낸 제니얼이 서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레아는 여전히 정면을 보는 것을 고집하고 있었기에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이레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제니얼은 가슴에 손을 얹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폭언을 내뱉던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무척이나 예의 바른 태도였다·
“황녀 전하·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수업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잘 복기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레아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제니얼은 인사를 끝마치고 몸을 돌려 별실을 가로질렀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몇 번 울린 뒤에야 별실의 문이 열리고 제니얼이 밖으로 나선다· 그제야 이레아는 고개를 숙이고 맘껏 흐느꼈다·
“흐 끄으으···”
혹여 방금 밖으로 나간 제니얼에게 울음소리가 들릴까 싶어 최대한 숨죽이며 울음을 흘린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어깨를 가늘게 떠는 이레아에게 루이넬이 다가간다·
“전하···”
루이넬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레아에게 건넸으나 받지 않았다· 이레아는 눈을 감은 채 손등으로 자신의 눈가를 닦아내며 계속해서 흐느낄 뿐이었다·
“흐그윽···”
분하다· 교수에게 분한 것이 아니었다· 교수의 말에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추레하여 화가 났던 것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이넬은 안쓰러운 마음에 손수건을 들어 이레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오는 통에 루이넬은 손길은 자연히 분주해졌다·
“전하· 방금 제니얼 교수의 망언은 아무리 봐도 주제를 넘었습니다· 이건 폐하께서 보시더라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폐하의 알현을 요청하시는 것이···”
루이넬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이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갠차나···”
눈물이 채 멎지 않았음에도 이레아는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나느 흐윽 갠차느니까···”
발음이 잔뜩 새는 걸 보면 전혀 안 괜찮아 보였지만 루이넬은 왜인지 아버지께 의지하지 않는 이레아의 모습이 한없이 기특하게 보였다·
*
···밖으로 나온 나는 연화궁 중정의 회랑을 걸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화가 나서 이레아를 너무 심하게 몰아세운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든 것이다·
허나 이레아를 가만히 놔두다가는 오 년 후에 제국은 필시 멸망한다· 그러니 충격요법을 가하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최선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회랑을 걷고 있자 저편에서 새하얀 의료복을 입은 남자가 부리나케 다가온다· 누군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자 이전에 내게 얼굴을 발로 걷어차였던 발두레였다·
뭉툭한 코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을 보니 동일 인물임이 확실해진다·
“고 고옹자님─!”
세상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발두레가 지근거리에 멈춰 숨을 고른다· 발두레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내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고 고놈들이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전하께 드릴 약을 보충해 줄 테니 나오라고 말입니다· 이곳에 위치가 적혀있으니 공자님께서 혼자 가시면-”
“아니· 같이 간다·”
쪽지를 받은 내가 종이를 펼쳤다· 접선 위치를 암호문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었다· 놈들의 암호를 해석하는 것은 과거에 몇백 번은 넘게 했던 것이기에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대성당 뒤편의 골목길에서 보자니 어처구니가 없군· 그리도 자신이 있다 이건가·’
쓰레기 같은 놈들이 감히 제도에서 활개를 치고 있구나· 손아귀에 불길을 일으켜 쪽지를 태워버린 내가 발두레를 노려보며 말했다·
“앞장서라·”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잘 된 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뱌미님 3코인]
묵묵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낭선님 19코인]
으음··· 후원 감사드립니다!
일러스트가 나왔습니다! 공지에 개시하였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 번씩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사육실잘 아닙니다!
사육실장 맞습니다!
그림작가님께 연락 드렸는데 지금 주무시고 계신 거 같아서···
수정 해주시면 바로 바꾸겠습니다!
저 사육실장 맞아요! 사칭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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