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
병사들과 성직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기에 벨로레스와 제니얼은 자리를 떠나 인근의 대성당으로 향했다·
거인이 광장에서 날뛰며 주변 상가를 닥치는 대로 파괴한 덕분에 대성당의 성직자들은 구호를 목적으로 모두 광장으로 나가 있었으니 예배당에는 아무도 없어 한적하였다·
앞서 걸어나가며 천주의 석상을 올려다보던 벨로레스가 몸을 돌린다· 주변에 엿들을 사람이 없으니 이곳이라면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요· 이제 정보를 나누도록 할까요? 우리 공자님은 제게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제니얼이 낮게 숨을 내쉬고는 벨로레스를 응시하였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여동생의 죽음입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세릴은 어머니와 함께 벨로다네아 남작령에 갔을 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살아있는 것입니까· 왜 살아서 제 앞에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까·”
제니얼의 떨리는 목소리가 가엾게 느껴진다· 진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부정하려는 것이 애석하였기에 벨로레스는 조금은 슬픈 눈으로 답하였다·
“예상하셨겠지만 지금 말레이그 가문에 있는 세릴은 도플갱어에요· 성국의 자금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하였지요· 그 과정에는 저도 참여하였습니다·”
“성녀께서··· 참여하셨다고요?”
“네·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저는 교황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기에 도플갱어를 만드는 것에 일조하라는 교황의 명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덤덤하게 인정하는 벨로레스 덕분에 말문이 막힌다· 다소 허탈하게 숨을 내쉬던 제니얼이 재차 질문하였다·
“성국에서 대체 왜 제 여동생의 도플갱어를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리하여 성국이 얻는 이점이 대체 무엇이기에?”
“저도 자세히는 모른답니다· 그러나 교황의 야심을 생각해 보면 추측이 아주 어렵지는 않네요· 아마 교황은 제국을 안에서부터 무너트릴 생각으로 당신의 여동생을 도플갱어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제국을 안에서부터 무너트린다· 그건 적월성의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월성에게 자금을 대주고 있는 존재가 성국의 교황이라는 것인가?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였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제니얼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교황이 제국을 무너트릴 거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겠지요·”
싱긋 웃은 벨로레스가 몸을 돌려 천주의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수수한 베일을 쓰고 있는 천주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지상을 굽어 살피고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대전쟁 이후 대륙에서 성국의 영향력은 막대해졌어요· 마계에서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으니 그 대척점에 있는 성국의 힘이 커지는 건 기정사실이겠지요·”
오래전에 일어난 대전쟁에서 인간 연합은 승리하였다· 강성했던 마계는 영토를 일부 잃으며 북으로 물러났으며 오랜 전투로 인해 성국의 군사력은 더할 나위 없이 강해졌다·
성국은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약소국들에게 연합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하였다· 일단은 마계와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마계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과 기사들로 이루어진 성국의 군대가 무서웠던 약소국들은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이후 성국은 이런저런 명분을 들어 자신의 연합 안에 들어온 나라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대전쟁 이후로 대륙의 패권은 성국과 제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패전국인 마계는 아직도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하여 교황은 욕심이 난 겁니다· 제국만 치워버리면 성국이 이 대륙의 주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욕심· 그 욕심이 교황을 행동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러다 교황은 때마침 제국에 악의를 품는 집단을 찾아내었을 겁니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지요· 제국은 성국과 달리 정복 전쟁을 통해 그 규모를 키운 나라이니 제국의 병사들에게 희생당한 사람의 가족들은 온갖 원한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테니까요·”
제국에 앙심을 품은 자들이 하나 둘 모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교황은 정체를 숨긴 채 그런 자들을 찾아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정말로 이용하기 좋은 자들이 아니고 뭔가요? 그들이 성공한다면 손 안 들고 코를 푸는 격이고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니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지요· 제가 교황이었어도 놈들을 이용했을 거예요·”
이른바 차도살인지계였다· 낮게 웃음을 흘린 벨로레스가 천주를 향해 가볍게 손을 뻗는다·
“그들이 속한 집단의 이름은 바로 적월성! 당신이 그토록 원망하는 집단이자 제국의 멸망을 그 누구보다 원하는 이들이지요· 교황은 아마 이들과 손을 잡고 당신의 여동생을 본뜬 도플갱어를 만들었을 겁니다·”
벨로레스가 천주를 향해 뻗은 손을 천천히 내린다·
“황실 다음가는 권력가인 말레이그 공작가는 제국을 무너트리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러니 여차하면 말레이그 공작가 내부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게 세릴 말레이그의 도플갱어를 만들어 보낸 겁니다·”
“···”
“그리 성공적으로 제국을 무너트리는 것에 성공하면 교황은 이단 말살이라는 명목으로 제국에 군대를 보낼 겁니다· 그리 적월성을 제거하고 다 무너져가는 제국을 점거한 다음 괴뢰정부로 만들 속셈이겠지요·”
적월성을 토사구팽하고 제국을 손아귀에 넣는다면 그 다음은 간단하다·
“이제 화살을 돌릴 상대가 필요합니다· 적월성은 누구의 사주를 받아 제국을 공격한 것인가? 아아 간악한 마계가 기어이 사람들을 현혹하여 제국을 치게 만들었구나· 성전이다! 성전을 벌어야 한다! 마계를 대륙의 지도에서 지워버리자···”
그렇게 하면 성국은 명실상부 대륙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추측을 끝낸 벨로레스가 쓰게 웃으며 몸을 돌린다· 아름다운 예복이 벨로레스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나풀거렸다·
“물론 이 모든 건 제 상상에 불과하지만요·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본 결과 확률이 없지는 않아서 저는 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이것이 벨로레스가 교황을 적대하는 이유였다· 교황이 벌일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성국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벨로레스가 제니얼의 어머니를 몰래 탈출시킨 것이 아마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말레이그 공작가에 경고를 전해주기 위함이었으리라·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하나 둘 채워지고 있었다· 점차 명료해지는 진실 속에서 제니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녀님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니얼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언한다·
“교황의 계획은 통하였고 제국은 멸망합니다·”
벨로레스의 안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러나 교황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적월성은 교황의 생각대로 휘둘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멸망의 날 적월성이 소환한 검은 거인들은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한 숫자였습니다·”
성국의 기사단이 모두 결집하여 덤빈다고 하더라도 검은 거인들을 모두 처리할 순 없을 것이다· 현세에 나타나는 그 괴물들은 대륙의 모든 것을 박살 내고서야 멈출 것이었다·
“그것이 당신이 보고 온 미래인가요·”
벨로레스의 질문에 제니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벨로레스는 두 눈을 감으며 낮게 침음하였다·
그 미래로 가는 길에 제니얼은 분명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으리라· 그제야 제니얼의 마음이 왜 그리도 탁하고 검게 물들어 있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죄송해요· 아마도 저는 교황의 야욕을 막지 못한 모양이군요·”
“죄송할 건 없습니다· 지금부터 하나씩 바꿔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보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벨로레스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간다· 눈을 뜬 벨로레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니얼을 볼 수 있었다·
“제 여동생··· 아니 도플갱어인 세릴은 적월성에게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세릴이 도플갱어가 맞다면 적월성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적월성은 세릴을 만드는 것에 참여하였다· 당연하게도 정신을 장악할 장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어째서 세릴은 적월성에 저항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궁금하여 묻는 말에 벨로레스는 짧은 침묵 끝에 답을 내놓았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일전에 고서에서 본 적이 있어요· 간혹 도플갱어에게 자아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고···”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짜를 가짜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세릴은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제니얼의 여동생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 된다·
그 사실이 제니얼의 마음속에 여러 혼란을 낳는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제니얼이 벨로레스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성녀 예하· 이리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국의 미래에 관해 논의를 하고 싶으나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기에 그만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지금 그 누구보다 마음이 심란할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저 말에 어찌 거절의 말을 돌려줄 수 있을까· 별 수 없었던 벨로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세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여 작별을 전한 제니얼이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제니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로레스가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렸다·
여러 생각 속에서 두 눈이 안타까움에 젖어든다· 벨로레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성당을 벗어나려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군요· 제가 당신이었다면 버티지 못하였을 텐데···”
벨로레스는 제니얼을 연민하면서도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원하였다· 대륙이 멸망의 길로 향하는 것은 벨로레스 또한 원하지 않았으니까·
*
성당 밖으로 나온 제니얼은 차를 몰고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의 앞뜰에 아무렇게나 차를 주차한 제니얼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걸음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저택에서 일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제니얼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걸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제니얼은 사용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으니까· 이윽고 세릴의 방에 도착한 제니얼은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힉!”
방 안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세릴이 깜짝 놀라며 제니얼을 돌아본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연 제니얼 때문에 화를 내려던 세릴은 당황하고 말았다·
제니얼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곤함이 느껴지는 건 물론이고 두 눈은 어딘가 모르게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릴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오빠? 어디 아파?”
그런 세릴의 모습에 눈을 감았다 뜬 제니얼이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세릴· 내게 시간을 조금만 내어주거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대체 뭘 말하려고? 알 수 없었지만 거절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음으로 세릴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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