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1
잠에 빠져든 제니얼이 눈을 뜬 시각은 느지막한 점심이었다· 피로가 다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여름의 태양이 방 안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하자 저절로 눈이 떠진 것이다·
‘그런데···’
푹 자긴 했다지만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몸이 납 덩어리처럼 무겁고 머리가 아프다· 몸살이라도 난 건가 싶어 상체를 들어 올린 제니얼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몸이 말이 아니군·’
아무래도 오늘은 저택에서 푹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이 망가지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라드네에게도 말해둬야겠는데·’
혼자 쉴 수는 없으니 라드네에게도 휴식을 권할 생각이었다· 어제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을 보면 라드네 또한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려면 일단 일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제니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멈칫하였다· 방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끼익─
경첩이 젖혀지는 소리가 울리며 방문이 열린다· 열린 문 너머에서는 단색의 원피스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라드네가 있었다·
라드네는 문을 열자마자 제니얼과 시선이 마주친 덕에 잠깐 놀란 기색이 되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는 두 눈을 반개하였다·
“뭐해?”
“방금 자고 일어난 참이다만···”
“지금 점심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고는 있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난 건가·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잠을 청하였는지 깨달은 제니얼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미안하다· 어제의 나는 많이 지친 모양이라· 나도 이렇게 늦잠을 잘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면목이 없군·”
“···그렇게까지 사과하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나쁜 사람이 되라고 사과한 게 맞으니 개의치 말거라·”
제니얼의 농담에 라드네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더 놀렸다가는 아무래도 삐질 것 같았기에 제니얼이 화제를 돌리고자 말을 덧붙였다·
“그보다 라드네· 오늘은 일을 하지 않고 쉬어도 된다· 나 또한 몸이 좋지 않아 하루 정도는 쉴 생각이니 말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그보다 몸이 많이 안 좋아?”
제니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몸에 누적된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루 정도만 더 쉬면 회복될 것 같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쿨럭! 제니얼이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두어번 하였다· 단순한 재채기였지만 그 모습을 본 라드네의 안색은 낮게 가라앉았다·
“정말 하루만 쉬면 괜찮은 거 맞아?”
“···이틀은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아무튼 내가 몸을 회복할 때까지 라드네 너 또한 쉬면서 제도에서 여가를 보내도록 해라·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말레이그 가문의 이름을 대면 다들 외상을 허락해 줄 터이니·”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쉬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라드네는 마뜩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 몫까지 신나게 놀고 올 테니까 여기서 푹 쉬고 있어·”
“그래· 잘 놀다 오거라·”
어색한 미소를 짓는 제니얼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라드네가 방을 나선다· 라드네가 사라진 걸 확인한 제니얼은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피곤하니 조금 더 잘 생각이었다·
*
제니얼의 방에서 나온 라드네는 나중에 쓰려고 모은 개인 비상금을 들고 저택을 나섰다· 제니얼이 가문의 돈을 써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건 뭔가 빚지는 것 같았으니까·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어서 가급적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제니얼의 몰골을 보니 저택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제도의 상점가로 걸어간 라드네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블린들이 쓰던 무기와 잡동사니들 구경하고 가세요! 저 멀리 북방에서 긴히 구해온 물건들입니다! 기사가 꿈인 자녀분들에게 교육 자료로 안성맞춤이지요!”
“기초 마법 서적 대폭 할인중입니다! 제도에서 이 가격에 마법 서적을 파는 곳은 저희 가게가 유일합니다! 한 번 보고 가세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마도 공학의 결정체인 이 스태프를 한 번 보십시오! 말레이그 가문에서도 인정한 고성능의 스태프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여러분들도 마법사의 길을 걸으실 수 있다는 말씀!”
여러 상인들이 길거리에 나와 수많은 행인들에게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지만 라드네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뭘 사야 하는지는 명확했으니까·
확신을 가지고 걸음을 옮기던 라드네는 약초와 물약 그림의 간판이 걸린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약품을 정리하고 있던 주인장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본다·
“으응? 손님이신가?”
외눈 안경을 끼고 있던 주인장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으며 라드네에게 다가갔다· 척 봐도 곱게 자란 것 같은 소녀가 이런 곳에 들어오니 여러모로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다·
“보아하니 학자도 모험가도 아닌 것 같은데 여긴 어인 일로 오셨나? 호기심에 구경을 온 것이라면 상관 없지만 여긴 별로 재미있는 물건이 있는 곳이 아닌데· 우리 가게 건너편에 신기한 장난감을 파는 곳이 있으니 거기로-”
“비명초 잎·”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짜증났던 것인지 라드네는 그 간단한 인사조차 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만드레이크 뿌리 트롤의 피 정제수· 있어?”
주인장의 얼굴에 묘한 놀라움이 서린다· 라드네의 입에서 나온 재료들을 조합하면 뭘 만드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오호라· 고성능 피로회복제를 만드려는 거구만· 그런데 만들 수 있는 기술은 있고? 내로라하는 박사들도 성공률이 높지 않은데 말이야·”
“몇 번 만든 적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재료를 사면 가게 비품을 써도 괜찮지? 돈은 더 낼 테니까·”
“그거야 상관이 없지만··· 만드레이크 뿌리는 우리 가게에는 없는데 어떻게 할 생각인가?”
“없어? 왜?”
“황실 허가를 받아야 해서 원래 입고가 힘든 물품인데 이번에 네셀라 가문에서 싹 다 매입해버려서 말이지· 듣기로는 자식들에게 먹일 거라던데·”
“다른 가게도?”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주인장은 눈앞의 소녀가 이제 포기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라드네는 당돌한 표정으로 주인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가게 몇 시까지 해?”
“응? 해가 지기 전까지는 열어놓는다만···”
“그때까지 뿌리를 구해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리 말한 라드네가 가게를 나선다· 대체 어떻게 뿌리를 구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으나 저 당돌함에 매료된 주인장은 한 번 기다려주기로 하였다·
가게 밖으로 나온 라드네는 곧장 네셀라 가문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 가주를 보고 싶다고 말하니 얼마 안 가 귀족답게 온갖 치장품을 두른 네셀라 백작이 나왔다·
“말레이그 공작가에서 일하는 여식이 찾아왔다기에 나와보니 정말이구나· 그런데 내게는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나온 거지?”
“만드레이크 뿌리를 받고 싶어서 왔어· 물론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야· 뿌리값에 걸맞은 일을 대신 해줄 테니까· 나는 황실 대학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니 어디든 쓸모가 있을 거야·”
제국의 백작을 눈앞에 두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게 어이가 없었지만 백작 입장에서는 꽤나 신기한 경험이었기에 웃어넘겼다·
“좋다· 그럼 저택 부지에 아들에게 줄 집을 짓는 걸 도와주겠나? 마법사가 도와준다면야 나쁠 건 없겠지· 물론 하루 일당으로 만드레이크의 뿌리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만드레이크가 발견되었다는 산의 정보는 주도록 하마·”
재배는 불법이지만 야생 만드레이크를 찾아 가져가는 것은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니 백작에게도 라드네에게도 서로 이득인 셈이었다·
“응· 열심히 할게·”
저택 부지로 들어간 라드네는 백작의 안내에 따라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건설 현장에는 이미 오크들과 인간 난쟁이들이 각자의 구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안전모를 쓴 라드네도 그 틈바구니에 섞여 마법으로 건축 자재들을 날랐다· 마법사의 도움이 있으니 당연하게도 일의 능률이 대폭 상승되어 마감을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흡족해진 백작은 라드네에게 만드레이크가 자생하고 있다는 산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라드네는 개인 비상금을 사용하여 마차를 잡아 산 근처로 향했다·
제도 외곽에 있는 산인지라 인적이 드물고 산길이 험하였지만 라드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산을 오르고 또 올라서 만드레이크의 기운을 탐지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치에 걸린 바위 때문에 넘어지거나 어지럽게 뻗어나온 나뭇가지에 긁혀 생채기가 생겼으나 라드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 저기···!’
그러던 와중 능선 아래의 땅에서 자라고 있는 만드레이크를 발견하였다·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발을 헛디디는 순간 능선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나 최대한 조심해서 접근한 라드네는 만드레이크를 붙잡는 것에 성공하였다·
‘됐다···!’
만드레이크를 획득하자 성취감이 몰려든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라드네는 가져온 배낭 안에 만드레이크를 넣고 하산하였다·
그렇게 제도의 약물상으로 다시 돌아온 라드네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게 당황스러웠던 주인장이 연고와 반창고를 건네주었지만 라드네는 피로회복제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였다·
덕분에 연금술 기기를 만지는 라드네의 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장은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굴 위해 저렇게 열심인 건지···’
혹여 병든 노모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애인이 죽을 병에 걸렸나? 그러한 추측 속에서 주인장은 안쓰러운 눈으로 라드네를 바라보았다·
*
라드네가 저택에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낮 내내 잠을 청했던 제니얼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을 느끼고는 침대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라드네가 들어온다· 손에는 웬 약병이 들려 있었다· 책을 덮은 제니얼은 라드네의 손에 반창고가 여럿 붙어있는 걸 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손이 왜 그렇게 된 거지? 다친 건가?”
“···놀다가 다쳤어·”
“뭘 어떻게 놀아야 손이 그 모양이 되는 건가·”
제니얼의 질문에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라드네는 제니얼에게 다가가서 약병을 건넸다·
“이거 마셔· 피로회복제니까· 떨이로 팔길래 하나 가져왔어·”
“아 고맙구나·”
인기 제품인 피로회복제가 떨이로 나오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라드네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약병을 건네받아 마셨다·
맛이 조금 쓴 탓에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던 제니얼이 약병을 내밀었다· 빈 약병을 받은 라드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어때? 괜찮아?”
“···시중에 파는 물건은 아니구나· 수제인 모양이지·”
“맛만 보고도 그걸 알 수 있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성화로 인해 하도 많이 마셨으니까· 아무튼 상당한 고품질의 약을 구해왔구나· 실력이 상당한 약재사에게 구매한 모양이야·”
제니얼의 칭찬이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한 라드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별로 그렇게 칭찬할 정도는 아니야·”
냉정한 표정과는 달리 라드네의 머릿속은 화사한 봄날이었다· 자신의 실력이 인정받았다는 것과 제니얼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 라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푹 쉬어· 나도 이제 쉬러 갈 테니까·”
그러며 몸을 돌린 라드네가 방을 나선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니얼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쉬러 간다고?’
여태 제도에서 놀다가 온 것이 아니었나· 궁금증이 동했지만 따라가서 물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제니얼은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책을 조금 더 읽고 잘 생각이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착한유니콘님 1코인]
아이고 ㅠㅠ 그냥 봐주시는 것도 감사하니 무리해서 후원하려고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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