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3
류승훈.
대한 아카데미 랭킹 6등.
전설급 직업인 ‘바람의 지배자’를 보유 중.
류승훈은 최상급 전설 직업을 가졌음에도 아카데미 첫 랭킹 결정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성능이 뛰어난 직업을 복용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한순간에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복용한 직업이 복용자의 적성에 맞지 않거나 또는 이해도가 부족하여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희귀급 직업을 복용한 것보다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류승훈은 후자에 속했다.
적성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20살이 되고 처음 각성석을 복용한 그는 직업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그의 학기 초 랭킹은 43등.
바람의 지배자라는 직업마저 없었다면 최하위권까지 떨어졌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은 성장하는 법.
점차 자신의 직업에 대한 이해도를 쌓아간 류승훈은 1학기가 끝날 시점에 랭킹 43등에서 6등까지 올라가는 쾌거를 이뤘다. 말 그대로 인간 승리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단기간에 랭킹이 상승하여 높은 공기를 마시면 오만 해질 법도 한데 류승훈은 꾸준히 겸손을 유지했다. 자신이 아직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영웅 아카데미 학생들을 거뜬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있는 최상위권 학생들 중 유일하게 하루도 빠짐없이 대련 준비를 하는 학생이었다. 더해서 영웅 아카데미 학생들의 실습 영상을 수시로 분석하기까지 했다.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주위 친구들은 류승훈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너는 어차피 출전 멤버도 아니면서 왜 준비를 하냐고 비아냥거리는 친구도 있었다.
류승훈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세상 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법.
1위부터 5위까지 학생들 중.
대련 당일에 모종의 사고가 생겨 대련에 불참하게 될 학생이 나오는 경우까지 상정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랭킹 6위인 자신이 대타로 나가게 될 테니 대련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김수한이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됐다.
예상대로 아카데미 측은 곧바로 류승훈에게 대타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류승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전에 응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고 해도 막상 당일에 첫 타자로 출전하게 되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련장으로 향하던 그때.
아카데미 교관 한 명이 류승훈에게 접근해 알약 하나를 건넸다.
“응? 이건 처음 보는 약이긴 해. 그보다 왜 받은 건지 이해가 안 가긴 해.”
“…반말하지 마라. 아무튼 대련 전에 복용해 두면 좋을 거다. 일시적으로 능력치를 상승시켜 주는 아티팩트니까.”
“그건 부정행위긴 해.”
“안 걸리면 부정행위가 아니지. 아티팩트 검사대에 걸리지 않도록 제조한 약이니까 걱정 마라. …뭐 전 국민이 보게 될 대련에서 이현성한테 깨지고 망신당하고 싶다면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 참고로 이유나 학생 말고는 전부 복용하기로 했으니 잘 생각해 봐라.”
“….”
류승훈은 건네받은 약을 손에 꽉 쥐고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걸었다.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련장에 들어서기 전에 마음을 굳힌 류승훈은 약을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부정행위는 부정행위긴 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이기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으니까.
***
‘…그냥 복용할 걸 그랬긴 해.’
류승훈은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지는 건 예상했지만…. 이건 아닌데….’
본연의 실력만으로 이현성에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초라하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닌 실력을 선보이는 게 대련의 주목적이니까. 패배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배하게 생겼다.
영웅 아카데미 실습 영상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소환수 5성 마물 좀비 드래곤이 초장부터 등장했으니까.
‘좀비 드래곤을 어떻게 이기라고.’
전의를 상실한 류승훈은 작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좀비 드래곤도 좀비 드래곤인데 이현성 쟤는 대체 뭐야? 소환사가 뭐 저리 딴딴한데?’
싸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좀비 드래곤만 문제인 게 아니라 이현성이라는 인간 자체도 문제였다.
최근 비약적으로 성장한 류승훈의 바람칼날은 강철도 벨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사람 몸을 절단낼 수는 없으니 처음에는 힘을 조절해서 이현성을 노렸다. 그런데 통하지 않아서 위력을 조금씩 조금씩 계속 올렸다. 결국에는 강철도 베어버릴 정도의 위력까지 끌어올렸지만…. 이현성의 몸에는 흠집하나 내지 못했다. 그저 옷만 찢어버릴 뿐이었다.
‘항복할까? 공격이 안 통한다고 바로 항복하면 너무 없어 보일 텐데….’
멍하니 고개를 치켜든 류승훈은 좀비 드래곤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좀비 드래곤은 입을 꾹 닫고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아….”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했다.
드래곤이 볼을 부풀리고 있는 경우가 뭐 더 있겠는가.
“좆됐긴 해.”
브레스가 날아올 것을 예측한 류승훈은 그대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추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즉사를 막아주는 아티팩트가 대련장에 설치되어 있어 죽지는 않겠지만 좀비 드래곤의 브레스를 맞아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
좀비 드래곤이 입을 오물거리더니 이윽고 대량의 연녹색 액체를 뿜어냈다. 닿은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효과를 지닌 브레스였다.
사방으로 퍼진 눅진한 액체가 대련장을 뒤덮고.
“으아아악!!! 존나 아프긴 해!!!!”
류승훈의 다리에도 정확히 명중했다.
류승훈은 다리가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자 바닥을 데굴데굴 굴며 괴성을 내질렀다.
물론 다른 곳은 멀쩡했다.
이현성이 용용이에게 다리만 노리라는 주의를 사전에 준 덕이었다.
“음. 항복 안 하나? 용용아 다음은 팔 노려.”
─다 썩게 만들면 먹을 부위가 안 남지 않습니까 주인님?
“…쟨 먹을 거 아니야. 간식은 집 가서 줄 테니까 좀 참아.”
─알겠습니다.
용용이가 다시 볼을 부풀리던 그때였다.
눈물을 글썽이던 류승훈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 항복! 항복! 항복!!!”
살려달라는 듯 애원하며 계속해서 항복을 외치는 류승훈.
“호루라기 빨리 불어 교관 시발 새끼야!”
삐이이익-!
결국 욕까지 튀어나오고 나서야 교관은 호루라기를 불어 대련 종료를 알렸다.
동시에 이현성은 재빠르게 류승훈에게 접근했다.
류승훈은 지레 겁을 먹고 옆으로 굴러 도망치려 했다.
“히 히익! 항복했긴 해!”
“싸우려고 온 거 아니야.”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류승훈을 짓밟아 움직임을 저지한 이현성은 도감에서 난쟁이 한 마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최상급 회복 포션을 건네받은 뒤 류승훈의 다리에 거침없이 쏟아부었다.
“어? 포션은 왜….”
“임시조치라고 생각해. 치유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고통을 참고 있긴 힘들잖아?”
“고 고맙긴 해…?”
“고맙긴 뭘. 넌 양심 있게 약 같은 건 복용 안 했으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으 응? 약이라니…. 금시초문이긴 해….”
“그래 너도 네 입장이 있으니 금시초문이라 치자. 아무튼 수고했어.”
이현성은 빈 플라스크를 류승훈의 머리맡에 놓은 뒤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휴식 시간 없이 곧바로 다음 대련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설렁설렁 뛰어와 한참 뒤늦게 도착한 치유사들은 류승훈을 대련장 밖으로 부축했다.
이후에 다음 순번인 학생이 대련장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두 번째 대련 상대는 이유나였다.
***
관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랭킹 6위 류승훈.
여러 대형 길드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인재가 죽도 못쓰고 패배했으니까.
“마물 소환사도 5성급을 소환할 수 있었군요. 이건 또 새로운 정보네요.”
“그러게요. 좀비 드래곤이라….”
“조금 아쉽긴 해요. 한 마리밖에 계약할 수 없는 5성급이 하필 좀비 드래곤이라니.”
“좀비 드래곤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거 아닙니까?”
“흉수나 신수들에 비하면 택도 없죠. 그리고 더 강력한 5성 마물들도 많은데 좀비 드래곤은 좀….”
“그래도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최상급 4성을 양산할 수도 있다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역대급 인재 아닌가요?”
각 길드에서는 이현성에 대한 갖가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충분히 영입해 볼 만한 인재라고 떠들어대면서.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때 이유나가 대련장에 올라서고 있었다.
“이유나 학생이군요.”
“5성 마물이라고 해도 빛의 심판자한테는 버겁겠지.”
“특히 좀비 드래곤이니까. 언데드에다가 마물이면 이중으로 카운터 맞는 거잖아.”
“흐음…. 이건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네요.”
“과감하게 최대 전력인 좀비 드래곤은 배제하고 4성 마물들로만 싸워야지 뭐. 최상급 4성을 꽤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맥없이 패배하진 않을 걸?”
상당수 관객들이 이유나의 승리를 장담했다.
대한 아카데미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영웅 아카데미 측 인원들은 일동 비소를 머금고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지체 없이 대련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이이익-!
이현성은 곧장 도감을 펼쳐 좀비 드래곤의 옆으로 소환수를 한 마리 더 소환했다.
─크.
─하.
─하.
─핫!
─이.
─몸.
─강.
─림!
─…내 대사는?
대련장의 반절을 차지할 정도의 거대한 크기.
가지각색의 머리가 아홉 달려있는 5성 마물 히드라… 아니 용식이가 관객석 한편을 무너뜨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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