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1
백소아의 아버지.
그리고 탐색꾼 협회를 이끄는 남자.
협회장은 대한민국 최강의 탐색꾼이라 불리며 탁재환 교관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실력자다.
나는 그런 남자와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
넓은 저택과 상반되는 작고 조촐한 식탁이라 거리도 가까웠다.
‘백소아 얘는 자기 집에서 단 둘이 식사하자더니….’
협회장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
처음에 짧게 인사를 나눈 뒤로 쭉 적만만이 감돌았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일까.
괜히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조용하니까 더 어색하네.’
이 공간에만 따로 음소거라도 한 것 같다.
식사 자리에서 흔히 들리는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왜 안 먹어?’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
연장자가 먼저 숟갈을 뜨기 전에 식사를 시작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 일이다. 적어도 내 상식 선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협회장은 식탁에 손만 올리고 있을 뿐 요지부동이었다.
뭔데 대체?
같이 밥 들자며?
먼저 먹어야 나도 먹지….
이런 불편한 자리가 1분 넘게 지속되고 있던 중.
나와 협회장을 번갈아보던 백소아가 침묵을 깨고 식사를 시작했다.
“지금 뭐 눈치싸움해? 이상한 짓들 하지 말고 밥이나 빨리 먹어!”
그러면서 고기반찬을 전부 내쪽으로 밀었다.
협회장은 심기가 불편해진 듯 헛기침을 하며 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불편한 겸상이 시작되었다.
***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
협회장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밥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았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식사를 마치고 그만 불편한 자리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내 딸을 잘 부탁한다. 겉보기에는 철이 없어 보여도 알고 보면 속이 깊고 여린 아이니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보듬어줬으면 좋겠구나.”
협회장이 뜬금 그런 말을 내뱉더니 습관적인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나를 안 좋게 보고 있던 건 아니었나 보다.
그보다 잘 부탁한다니….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 백소아를 빤히 쳐다봤다.
“아. 미안. 일단 너하고 연인관계라고 얘기해 뒀어.”
“연인관계?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우리 아빠가 교제하고 있는 남자가 아니면 말도 섞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사상을 가지고 있거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소아가 다시 말했다.
“진짜 미안해. 혹시 기분 나빴던 건 아니지?”
“…괜찮아.”
어쩐지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했다.
왜 그렇게 죽일 놈처럼 쳐다보다 했더니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딸이 웬 놈팡이 같은 남자를 데려오면 아니꼽게 보일만도 하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자 백소아가 나를 불렀다. 갑자기 진중해진 말투로.
“현성아.”
“응?”
“…말 나온 김에 그냥 우리 사귈래?”
뜬금없는 고백이 훅 들어왔다.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백소아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짧은 침묵 뒤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미안. 지금 네 마음은 거짓된 감정이라 받아줄 수 없어.”
백소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에게 품고 있는 마음은 머지않아 사라질 거짓된 감정이라는 것을.
방금 한 고백도 진심을 담아서 한 것이 아닌 마음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서 답답함을 토해낸 거겠지.
거절할 것을 예상했는지 백소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시선을 피한 채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아직도 모르겠어. 정말로 지금 내 마음이 조작된 게 맞는 걸까? 나는 현성이 네가 몸을 날려서 화살을 막아준 것도 고마웠고 다혈질적인 내 성격을 보고도 질색하지 않고 계속 곁에 남아준 것도 고마웠어. 그리고 얼굴하고 성격도 내 이상형이었고…. 비록 알고 지낸 기간은 짧지만 충분히 반하고도 남을만하지 않아?”
조작당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너를 좋아했을 거다.
그런 말까지 덧붙이는 백소아였다.
“있잖아. 만약 3개월 뒤에 다시 고백하면 받아줄 거야?”
“그때도 마음이 변치 않으면 생각해 볼게.”
“…응.”
우리의 이 아슬아슬한 관계가 과연 엔딩을 맞이하고도 지속될 수 있을까?
그날이 다가올수록 불안감도 배가 되고 있었다.
***
이른 새벽.
끊임없이 진동하는 핸드폰 탓에 잠에서 깼다.
보니까 전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문자 테러를 당했을 뿐이다.
“…누가 이 시간부터 문자를 이렇게 보내?”
핸드폰의 켜고 문자를 확인했다.
[서한빛]
-아침이에요! 일어나세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저를 잡는다!
-현성 님?
-아직 주무시나요?
-이른 시간부터 전화 거는 건 예의가 아니니 계속 문자로 보낼게요!
-ㅇㄹㄴㄷㄴㅁㅇ
-ㄹㄴㅇㄹㅈ
-ㄹㄴ
·
·
·
·
·
“제일 심각한 건 서한빛이네….”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바로 씻고 외출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서한빛과 어울리는 날.
일정은 따로 정해놓지 않았다.
아마 하루종일 산책 같은 걸 하지 않을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서한빛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요!”
“지금 새벽 4시인데요.”
“오늘부터 데이트인데 벌써 4시간이나 지났잖아요!”
서한빛은 자정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갈수록 사람이 이상해지네….
뭐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해결되겠지.
“오늘 일정은 하수도 산책입니다! 제가 사전에 탐방을 해놨으니 따라만 오세요!”
코스를 미리 준비했다는 듯 말하는 서한빛은 들뜬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영 내키지 않는 코스였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으니 군말 없이 따라가기로 했다.
***
서한빛과 함께하는 날은 대게 험난했다.
그리고 오늘은 모든 날을 통틀어 최악이었다.
하수구 냄새를 맡으며 하염없이 걷기만 했으니까.
“어때요? 재밌지 않으셨나요?”
“예 뭐…. 쥐들이 참 귀엽네요.”
“후후. 그렇죠?”
불평은 하지 않았다.
서한빛은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였던 것 같으니.
대체 이게 뭐가 즐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장소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더 의의를 두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즐거웠어요! 제가 애용하는 미행 루트를 소개해드릴 수 있어서 기뻤답니다!”
서한빛은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서한빛과의 하루도 마무리되고 다음 날은 차유라와 함께였다.
오전에는 차유라의 아버지 차병호의 면회를 갔다 왔다.
그녀는 가끔씩 면회를 가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했다.
따라가는 건 처음이었다.
“아직 안 죽었네. 꽤 살만한가 봐?”
“….”
“웬만하면 사회로 나오지 말고 안에서 자살하는 걸 추천할게. 밖에는 당신한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넘쳐나거든.”
차유라는 매정하게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나도 이제 안 올 거니까 그렇게 알아. …뭐 가끔 영치금 정도는 넣어줄게.”
차유라는 미련 없이 면회를 끝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현성아 미안. 이런 곳까지 따라오게 해서.”
“괜찮아.”
이후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바닷가에 가서 바람이나 쐬다가 복귀했다.
차유라와 함께하는 하루도 이렇게 지나갔다.
아. 그리고 중간에 이유나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녀 또한 작가의 개입을 받았는지 감정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유나에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라고 말해주고 웬만하면 내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위로해 주거나 신경 써줄 겨를은 없었다.
다른 지인들도 챙기기 바쁜데 그녀까지 신경 쓸 수는 없으니까.
그 뒤로 이유나의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다.
차유라와 만난 다음 날에는 탁재환 교관과 함께였다.
김영지도 가끔씩 덤으로 함께했다.
김영지는 작가의 개입을 받지 않아서 굳이 따로 날을 잡고 만나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내킬 때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편이었다.
“음? 김영지 갑자기 뭘 그렇게 적는 거냐?”
“아. 교관님도 보실래요? 자요.”
“역전 이후 관측하게 될 세계의 설정…. 여자는 군대를 안 가고 남자만 국방의 의무를 진다…. 이게 뭐냐?”
“미래 밥통이가 저한테 심심하면 관측할 세계의 설정도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해서 구상 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재밌는 설정이 떠올라서 적어봤죠. 흐흐.”
“그 미래 철밥통은 우리와의 접촉을 지양하지 않았었냐?”
“이상하게 유독 저하고는 만나주더라고요.”
“…그러냐. 아무튼 이 설정이라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군. 지금 네가 쓴 여자만 군대를 안 간다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집어넣으면 그쪽 세계의 상식이 그렇게 바뀐다는 건가?”
“그렇다고 하네요?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아무런 이상함도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요.”
탁재환 교관과 김영지는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김영지가 탁재환 교관한테 한유미 교관을 꼬시는 법을 전수해주고 나서부터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다. 김영지 덕에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니까.
“그래도 너무 작위적인 설정 아니냐? 한쪽 성별만 안 간다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세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인간들이 속출할 텐데.”
“으으음. 그냥 여자가 남자보다 신체 조건이 불리하니 안 간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좋아! 바로 설정 보충!”
“아니 군인이 꼭 몸을 쓰는 보직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냐.”
“에이.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끝도 없어요. 어차피 대충 설정해도 눈치 못 챌 텐데요 뭘.”
“…근데 굳이 그런 설정을 넣는 이유가 뭐지?”
“흐흐. 남녀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초석 중 하나라고나 할까요? 저희 세계를 유희거리로 취급하던 세계인데 평범하게 흘러가도록 놔둘 수는 없죠.”
“…악마가 따로 없는 발상이군.”
“전생에 악마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랬었지…. 근데 나도 설정 하나만 넣어도 되냐?”
“뭔데요?”
“동양인의 음경은 대체로 작은 사이즈라는 설정을 넣었으면 좋겠군.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와. 교관님도 악마스러운 발상을 하시네요.”
“뭐 나도 직업이 악마니까 말이다.”
카페에서 날이 저물도록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추억을 쌓는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며 어느덧 리버레이션을 와해시킨 날로부터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파사삭 맨션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얼핏 보면 철밥통과 똑같은 외모.
자세히 보면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여자였다.
머리색도 완전히 흑색으로 뒤덮여있었다.
“반갑습니다.”
그녀는 미래에서 온 철밥통이었다.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다.
내 얼굴을 볼 자격이 없다며 찾아오지도 않던 녀석이니까.
미래 철밥통은 한동안 나를 아련하게 쳐다봤다.
그러다 자신이 온 목적을 떠올렸는지 정신을 차리고 본론을 꺼냈다.
“역전의 준비가 끝났기에 찾아왔습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마 다음이 마지막 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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