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6
시작은 작은 의문이었다·
‘지주대인이 왜 이리 큰돈을 빌렸을까·’
탐관오리에 부정 축재를 밥 먹듯이 하는 놈인데 말이야· 자기 돈을 쓰면 되지 굳이 남의 돈을 빌려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제갈 소저와 함께 답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내가 언제 누구에게 돈을 빌렸다는 것이야?!”
지주대인이 부정해봐야 소용없다· 이미 장부끼리 교차 검증이 끝났으니까· 구죽이 빌린 돈은 고스란히 지부대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제가 포쾌 일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바로 범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비리를 들켜 얼굴이 분홍색 돼지처럼 변한 구죽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범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나는 조금 전 매향이가 노래를 불렀던 자리에 자연스레 섰다·
범인을 위한 재현 공연을 시작해볼까· 한쪽 발목을 기준 삼아 방향을 바꾸며 일인이역의 연기에 몰입하자·
“범인은 어느 날 지부대인이 한 말에 당황합니다· 오늘 안으로 돈을 내놓아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땅을 사뒀으면 사뒀지 누가 손에 그런 막대한 현금을 쥐고 있어? 고민된다· 어떡하지· 무한에서 누가 그만한 돈을 금고에 두고 있을까· 그래· 만금전장이 있었지!”
“빌리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분노에 찬 돼지의 멱따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지주대인님· 그 말은 돈을 갚고 하셨어야지요·”
내가 돼지 잡는 칼이니까·
“뭐? 설마?!”
“너무 큰돈을 빌리시고 입을 닦으시면 어떡합니까· 평범하게 탐문조사만 해도 술술 나오더군요·”
“크윽···!”
굳이 불가 장부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왜 정보가 쉽게 새어 나갔는지 채무자 본인이 스스로 납득할 테니까·
“이해는 합니다· 예상에도 없는 지출이었을 테니까요· 지나치게 큰돈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래도 이자라도 갚으셨어야죠·”
“····”
“최소 파직일 겁니다· 귀양살이도 하실 수 있겠군요· 증거가 나왔으니 지부대인 일과 함께 엮이시겠지요· 압송당하여 국문(鞫問)이 열리면 지부대인 옆자리가 비어있을 겁니다·”
이 세계에선 평범한 부정 축재이지만 하필 상황이 안 좋다·
지부대인은 목 간수 잘해야 할 상황이라던데· 같이 엮이는 상황이라면 평생 외딴섬에 갇혀서 살아야겠네·
“그 그럴 수가···· 오해다! 오해야! 지부대인께서 돈을 달라고 하는데 내 어찌 거절할 수 있었겠느냐! 어쩔 수 없었다!”
아하· 증거는 밝혀진 거 같으니 억울한 척을 하시겠다·
“빼앗은 땅들도 어쩔 수 없었나 보군요·”
내가 빈정거리자 지주대인의 안색이 바로 돌변했다·
“큭! 네놈···! 내가 고작해야 이런 일로 끝날 것 같으냐! 내가 한낱 포쾌 하나를 어쩌지 못할 것 같아!”
“상대는 제가 아니라 감찰어사 정문원입니다·”
“빌어먹을···!”
구죽의 앙다문 이 사이에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참담함이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대는 어명을 받든 감찰어사· 정문원· 심지어 지부대인의 죄를 낱낱이 밝혀냈으니 체급이 올라도 너무 올라버렸다·
천하의 지부대인도 어쩌지 못한 상대를 구죽 따위가 어떻게 하겠는가·
구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도살장 앞에 선 돼지가 된 기분이겠지·
“물론 감찰어사께서 제 자료를 보셨다면 앞으로 벌어졌을 일이었겠지요·”
이제 그럼 은인이 되어 살려줘 볼까·
“그 그게 무슨 소리더냐· 설마?!”
구죽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료는 이미 감찰어사께 넘겼습니다· 하지만 워낙 공사다망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며칠 급한 일부터 처리하시겠다면서 한쪽에 밀어두었습니다·”
나는 뭘 그리 놀라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문원이가 아직 증거를 보지 못했다고?”
“참 공교롭습니다·”
지주대인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무엇이 말이냐?”
이제 연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내 가슴을 두드린다·
정치싸움에 낀 청년· 명 포쾌· 두 모습은 어디까지나 겉에서 보는 나의 모습· 하지만 그 안에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속내를 보여 주자·
“자료는 감찰어사님밖에 손댈 수 없는 곳에 있지만 유일하게 보충이 필요하다면서 자료에 다시 손댈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는 게 말입니다·”
살고 싶어? 그럼 내 손을 잡아· 비싼 대가를 치르고 말이야·
절호의 기회 앞에서 욕망에 번들거리는 강윤호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엇을 원하느냐·”
지주대인의 눈에서 순간 놀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입은 더 빨랐다· 역시 정치판에서 오래 구른 지주대인이야· 상황 파악이 빠르네·
“글쎄요· 무엇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일부로 공명첩이 들어있는 통을 차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미관말직(微官末職)이라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냐? 그래· 이리도 계획을 하고 나에게 접근했으니 성에 차지 않았겠지· 좋다· 내 모든 힘을 써서 더 높은 품계의 관직을 마련해주도록 하마·”
“흐음····”
관직은 필요 없다니까·
“관직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냐? 여자는 어떠하냐? 내 명문가의 여식과 너를 혼인시켜주겠다· 관직과 처가의 힘이라면 나중에 포두 자리까지 쉽게 노릴 수 있을 것이야·”
“남부끄럽지 않은 여인과 이미 미래를 약속했습니다·”
제갈세가 하오문 사천당가 살막 모용세가에 한 사람씩 있거든요·
“돈이 필요한가? 내가 다스리는 도시에 자네를 위한 저택을 마련해주도록 하지· 아! 매향이도 자네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던데· 저 아이의 기적을 사서 자네에게 주지· 여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기녀 할당제는 이미 찼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원하는 건 이미 말했었는데 계속 다른 말만 하시는군요·”
지주대인이 눈치가 없네· 왜 계속 헛다리를 짚고 있어· 나는 웃으며 지주대인을 바라보았다·
“뭐? 무슨 말을 했나· 말해보게· 내가 주겠네!”
지주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원하는 건 말이야·
관직도 여자도 돈도 아니다· 그런 저열한 대가가 아니야· 한번 주고받으면 잊어버릴 거래 관계가 아니라고·
내가 원하는 건·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지주대인에게 당당히 다가간다· 내 눈에는 여전히 욕망이 끓고 있다· 그 욕망을 가까이서 확인시켜주자·
“지주대인님· 이번엔 제 술을 좀 따라주시겠습니까·”
내 눈에 들어있는 것은 저열한 욕심이 아니라 불타고 있는 야심이라는 걸 말이다·
———
내 목적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만금전장의 후계자 시험을 치르는 중이지 감찰어사 시험을 치르는 게 아니야·’
감찰어사는 지주대인이 잡혀들어가는 게 좋겠지만 나는 채무자가 감옥 들어가서 파산 선언하는 걸 넋 놓고 봐야 한다· 내 최우선 목표를 해결해야 감찰어사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내 내가 술친구에게 한 잔 따라줘야겠군· 받게·”
“역시 지주대인님이 따라주셔서 그런지 술이 참 달군요·”
강윤호 출세했어· 시장님이 두 손으로 공손히 술도 따라주고 말이야·
“안주도 먹겠나?”
자기가 쓰던 젓가락으로 안주를 내미냐· 하여간 예의가 없어요·
사내놈이 젓가락으로 집어주는 안주를 먹을 생각은 없거든요· 나는 정중히 사양하고는 지주대인과 연거푸 술잔을 나누었다·
“오늘 술도 얻어먹었으니 저도 이제 할 일을 해야겠군요·”
“저 정말 나를 도와주는 건가···?”
지주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게 물었다·
“술친구 좋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왜···· 아니! 내가 자네를 잘못 생각했었군···!”
질문의 답은 이미 했다·
정치판에 감찰어사와도 지주대인과도 친구를 하고 싶다· 구죽은 이제야 깨달았는지 경악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 할 일도 하겠지만 지주대인께서 서둘러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검은 머리 오랑캐· 상대는 까마득하게 높은 지주대인·
지주대인과 반목하고 대립하여 원하는 것을 가져오려는 행위는 하책 중의 하책(下策)·
저울눈을 마음대로 속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를 상대로 거래를 통해 원하는 것을 가져오려는 행위는 고작 해봐야 중책(中策)·
그렇다면 상책(上策)은 무엇인가·
“서둘러 해야 할 일?”
“만금전장에서 빌린 돈을 갚아 채무 기록부터 지우시지요· 증거를 없애는 게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면서 상대방에겐 자신이 빚을 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상책(上策)이었다·
“증거를 없앤다고?”
“설령 제가 자료를 다시 빼돌린다고 하더라도 눈치 빠른 감찰어사가 언제 만금전장을 찾아갈지 모릅니다· 최우선으로 채무 기록을 지우시지요·”
“나도 안 하려고 했던 게 아닐세· 근데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지부대인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아니! 무영신투 말일세!”
지주대인은 이를 갈며 외쳤다·
“무영신투요?”
왜 갑자기 여기서 하연 소저가 나오지·
“그놈이 돈 갚으려고 모아둔 패물들을 하루아침에 훔쳐 가지 않았겠는가!”
“아····”
당신의 돈· 빈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하연 소저와 꾸몄던 무영신투 활동이 비리 증거로 연결될 줄이야·
“나도 갚기 힘든 목돈일세· 큰돈이 그리 쉽게 마련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너 갚기 힘들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미리 조사를 좀 많이 해왔어요·
“무한에 재산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사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서둘러야 합니다!”
나는 결정을 망설이는 주군 옆의 책사라도 되는 양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인지는 아네· 하지만 무한에 있는 거라곤 땅과 건물뿐이야· 둘 다 파는 데만 한세월일 텐데 무슨 수로?!”
“제가 해드리지요·”
내가 다 준비해 왔단다·
“자네가?”
“제가 실은 만금전주님과 깊은 연이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독대할 만큼 친분이 깊지요· 저에게 땅과 건물 문서를 주시면 가치를 평가하여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돈이 없으면 문서로 내놔· 이미 만금전장과는 말 다 끝내놨어·
“어허··· 그건 또 몰랐군· 정말 그래 주겠나?”
“지주대인님과 이렇게 술잔을 나누는 사이인데 이 정도 수고는 해드려야지요·”
지주대인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돈을 갚아야 하고 나는 지주대인의 귀찮을 일을 떠안는 사람처럼 포장한다·
누군가의 강요도 거래도 아닌 필요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
“내 바로 자네의 집에 사람을 보내겠네!”
방금까지 도살장 앞에 있었던 돼지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못 할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돼지를 가게 하기는 너무나도 쉬웠다·
“문서를 확인하는 즉시 감찰어사님의 집무실로 향하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제가 더 고맙죠·
————
“정말 아무 욕심도 없는 건가? 원한다면 관직도 여자도 돈도 주겠네·”
지주대인의 눈은 이미 감동하다 못해 경외 섞인 눈으로 바뀌어있었다·
“지주대인님과 이리 술친구를 할 수 있는데 무슨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정문원이 그 자식의 마음에 드는 법도 있었을 텐데·”
구죽은 내가 배신한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옅은 한숨까지 쉬며 중얼거렸다·
“제가 술을 사줘야 하는 분보다 술 사주시는 분과 술친구 하고 싶은 것도 있지요·”
썩은 줄도 좋지만 더 좋은 줄도 잡고 싶다· 은근슬쩍 지주대인을 치켜세웠다·
“하하하! 그래! 그런 이유였군· 이해하네! 암 이해하고 말고!”
“감찰어사님은 이미 지부대인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른 상황이 아닙니까· 배탈 나지 않도록 걱정해주는 것도 술친구의 할 일이지요·”
뻔뻔하게 변명한다· 욕심과 야심이 섞여 참과 거짓이 아니라 이득으로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겸사겸사 다른 곳에서 술도 얻어먹고 말인가?”
“감찰어사님과 마시는 싸구려 백주 맛도 좋지만 화월루에서 마시는 술이 더 각별하군요·”
내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백하자 구죽도 그제야 껄껄 웃었다·
“사내가 그런 욕심도 있어야지! 인제 보니 내가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그래! 정치판에 친구는 많이 만들어놓으면 좋은 거지! 받게! 내 앞으로 자네의 뒤를 봐주겠네!”
거의 다 왔다·
이제 술자리를 끝내고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한 가지 일만 더 해결하면 말이다·
“취하는 것도 좋지만 그전에 술친구의 우환을 하나 더 해결해드려야겠습니다·”
“우환?”
“제지소 말입니다·”
우리 왜 이 자리에서 만났는지 까먹은 건 아니시죠·
“맞아! 제지소! 내가 깜빡했군· 그 그래! 제지소는 어떡할 건가· 시위대를 해산해줄 텐가?”
나는 구죽의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구죽 어르신과 감찰어사 나리 두 분과 술친구 관계를 유지하려면 해산은 조금 곤란합니다·”
“곤란하다고? 그럼 다른 해결책이 있다는 뜻인가?”
“제가 감찰어사님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서 지주대인께서도 이번 일을 깔끔하게 해결할 방법이 하나 있지요·”
“깔끔한 방법?”
내가 이번에 꾸민 일은 단순히 지주대인의 채무를 상환받기 위함이 아니다· 나도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까·
이제 우리 두 사람의 문제를 끝낼 마지막 해결책을 제시할 차례· 나는 사심 하나 없는 눈으로 지주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제지소를 저에게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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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안드로몬’님 후원 감사합니다! 웹툰화라! 언젠가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참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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