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2
아이페로스 후작과의 만남을 끝내고 하르니에와 함께 말에 올라 루스마이어로 향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한 상태창이 뜨고.
▶서브 에피소드. 주점의 난동을 클리어했습니다!◀
▶야리크 부족 아이페로스 후작가 지역의 인식이 상승합니다!◀
▶폴룩스 투툴룸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 현재 수치 : 12% ]
나도 몰랐던 서브 에피소드가 클리어되었단 사실을 그때야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페로스 후작은 그저 에피소드 진행 중에 만나는 등장인물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서 그를 먼저 만나 이렇게 친밀도를 올리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그냥 친밀도가 오른 것도 아니다.
아이페로스 후작이 아닌 폴룩스 투툴룸이라는 본명으로 나오기까지 한 걸 보면 분명히 영향이 있을 법했다.
나는 루스마이어의 영주로서 영지를 부흥시키기 위해 반드시 아이페로스 후작과의 거래가 이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과의 거래는 순탄치 않다.
폐쇄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아이페로스 후작가와 거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시험을 거쳐야 한다.
-거래는 네놈과 검을 부딪쳐 본 뒤에 결정하지. 어디 증명해 보아라.
게임 속 이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그건 바로 검을 맞대는 것이다.
검을 맞대고 나면 상대의 진위를 알아챌 수 있고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어 이를 우선한다는 논지지만…
후작은 정해진 합격점을 넘지 못하면 절대로 이 거래를 승인해주지 않는다.
즉 아이페로스 가문과 거래하기 위해선 먼저 힘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 합격점을 넘지 못하면 이런 대사들이 나오곤 한다.
-우리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놈이로군. 끌어내 버려라!
-흥. 그딴 검을 쥐고 있는 놈이라면 불 보듯 뻔하지. 베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
-우린 약해빠진 놈과는 말조차 섞지 않는다!
대사에 큰 의미 같은 건 없다.
단지 약해빠진 카르세인과는 절대 거래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신념이 데드 플래그로 작용할 뿐이다.
그렇기에 스텟이 부족하고.
이 에피소드를 앞당겼기 때문에 이 스텟을 채워와야 했지만.
‘이렇게 접점이 생겼지. 아이페로스 후작이자 폴룩스 투툴룸과 말이야.’
분명 루스마이어의 영주로서 그와 거래할 때는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을 만들어 준 한 사람에게 감사를 전해야겠지.
“고맙습니다. 하르니에.”
“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그냥. 저한테만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당신 덕에 아이페로스 후작과 만날 수 있었잖아.
감사하고도 남을 일이지.
그러자 하르니에가 내 가슴을 툭 쳤다.
“무무무무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갑자기!”
말 고삐나 똑바로 잡으라며 잔소리하는 그녀를 보면 아직 함부로 입을 여는 건 무리겠구나.
“…근데 그렇게 떨어지실 필욘 없잖습니까.”
“말 걸지 말아요.”
“아니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말 걸지 말라니까요!”
원래는 참 알기 쉬운 사람이다 싶었는데. 이럴 때는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등짝에 스파이크 자국이 새겨지기 전에 입을 꾹 닫고 가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자잘한 해프닝이 생긴다.
겔게튼 자작가의 별장이 귀족들의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말을 타고 루스마이어 영지에 도달하는 데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이 먼 길에 와글루 산이라는 산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보니 점점 해가 지기 시작했고.
“으음…”
하르니에는 조금씩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툭.
그러다 이내 수면욕을 이겨내지 못한 그녀의 머리가 내쪽으로 기울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내 피부를 살짝 간지럽힌다. 그다지 무겁지도 않은 머리에서 따스한 숨결이 새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영 적응이 안 된다.
‘위험한 장소들은 거의 다 지나쳐 갔으니 크게 문제는 없지만…’
이렇게 잘 자고 있는 사람의 수면을 방해하기도 좀 그렇지.
나는 일부러 말의 속도를 조금씩 늦춰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서 홱 떨어져 있었던 그녀가 더 편한 잠을 잘 수 있도록.
***
따뜻하고 포근하다.
어디엔가 누워 있지는 않지만 잠이 솔솔 오는 이 이질적인 기분.
하르니에는 그제야 자신이 또 잠들었음을 깨닫고 눈을 번뜩 떴다.
“헉!”
고개를 홱 들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피식 웃고 있는 카르세인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꿈뻑 꿈뻑.
눈을 깜빡여 자신이 보고 있는 게 꿈이길 바랐다.
근데 꿈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카르세인이고.
말에서 잠든 건 자신이었으며.
그의 가슴팍을 빌려 또 잠들어버렸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르니에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어 어떻게 또 이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부끄럽다.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어지간해선 하인들 앞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이 사람에겐 벌써 두 번이나 보여 버렸다.
한 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넘어가겠지만 두 번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루스마이어에 도착하기까진 아직 좀 남았습니다. 좀 더 주무셔도 될 텐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털이 삐죽 곤두선다.
“이 잊어 줘요.”
“예?”
“잊어달라구요! 방금 있었던 일! 아니면 잊어버리는 비용이라도 필요해요?”
카르세인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굳이요…? 그냥 제 쪽에서 약혼녀가 일 때문에 피곤해서 잠들었구나 하고 넘기면 될 일 같은데요.”
더군다나 남들에게 보여지지도 않아서 상관없고. 설령 보여졌다 한들 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표면적으로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그러다 보니 묘하게도 하르니에가 설득당하고 있었다.
“아니면 뭐… 제가 아직도 당신 몸이라도 건드릴 치한으로 보이는 겁니까?”
“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 몸이 기대봤자 얼마나 무겁다고요.”
열기가 확 올랐던 얼굴에 이제야 찬바람이 스며든다.
그래도 미온의 온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제가 기대서 불편하진 않았나요?”
“딱히요. 오히려 안 기댈 때보다 품으로 들어와주시는 게 덜 위험하니 이쪽이 나았죠.”
“그랬… 어요?”
그건 몰랐는데.
괜히 카르세인에게 미안해졌다.
무어라 한 마디 건네려고 했을 때는 이미 루스마이어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먼저 말에서 내린 뒤 카르세인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건넸다.
그리고는 잡을 흠 하나 없이 깨끗하게 말에서 내려 주었다.
이것도 귀족의 예법이니 언젠가 날을 잡고 알려주려고 했는데… 이미 완벽하게 연습이 되어 있었다.
“이런 건 제가 안 가르치지 않았어요?”
“몇 번 연습해봐서요.”
“…연습 이요?”
“네.”
연습을 했다는 건 다른 여인을 말 위에 올려 태우고 다시 내리기도 했다는 뜻이었다.
그래. 딱히 잘못된 건 아니다.
귀족의 예법인 만큼 익혔을 수도 있겠지.
근데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자꾸만 묻게 된다.
“연습할 땐 누굴 태웠어요? 자매 분들인가요?”
“아니요. 제가 미쳤다고 걔넬 태웁니까.”
가족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바그란드에서도 그는 하나뿐인 남성이다 보니 누나들이나 여동생을 에스코트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근데.
다른 여성이라고 하니 묘하게 질문이 더 길게 이어진다.
“그럼요? 누구랑 연습했는데요?”
“어… 그냥 하녀입니다.”
“하녀요? 그 카밀라라는 하녀인가요?”
“예. 뭐. 그렇죠.”
하르니에의 눈이 좁혀졌다.
“흐응. 사실상 귀족 여식과 함께 말을 탄 거나 다름없긴 하네요. 데올 가도 귀족 가문이긴 했었으니.”
“그거야 그렇긴 한데… 지금은 어차피 하녀고… 아니 그보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뭐 제가 잘못했습니까…?”
“아니요. 잘못한 게 아니라 칭찬하는 건데요. 제가 딱히 안 가르쳐도 잘 배우셨으니까 칭찬이죠.”
“그 그렇습니까? 어… 그런데 혹시 속상하신 점이라도…”
“제가요? 무슨 속상한 게 있어요?”
“…”
카르세인은 차마 하르니에에게 솔직하게 답하지 못했다.
기분이 상한 건 확실하다.
근데 그 이유는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변명하듯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카밀라랑 말을 타게 된 건 물건을 사러 갈 때 뿐이었습니다. 혹시 약혼 관계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날까 걱정하시는 거라면 안 그래도 됩니다.”
구태여 카밀라를 이성으로 보고 있지도 않고 카밀라도 제게 한 명의 주인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그 그런 건 신경 안 쓰거든요?! 당신이 그렇게 말을 하면 제 입장에선 약혼자가 바람이라도 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잖아요!”
“어… 그거 아닙니까?”
“아니거든요? 벌써 잊은 거에요? 당신이랑은 어차피 계약으로밖에 안 이루어져 있는데 그걸 왜 걱정해요!”
하르니에가 루스마이어 영지 쪽으로 카르세인의 등을 떠밀었다.
“이 이야긴 됐고 얼른 당신 영지 안내나 해줘요.”
“예. 뭐… 그러죠.”
“그리고 계속 말하는데! 아까 그 일은 잊어요. 폴룩스가 했던 말도요!”
“어… 예. 알겠습니다.”
카르세인이 루스마이어로 향하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카르세인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하르니에는 홀로 중얼거린다.
“…왜 그랬지?”
정말로.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할 일이었다.
***
막상 루스마이어로 발을 들이자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한다.
영주인 카르세인이 방문했으니 이목이 끌리는 건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목이 더 끌린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예. 당신에게 쏠려 있군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견은 했었다.
루스마이어는 근방 영지로부터 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다.
한 파티장을 망칠 각오까지 했었던 만큼 귀족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나쁘겠는가.
카르세인이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반응이 어땠는지만 생각해보면 그녀를 향한 반응도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제가 나서서 불안을 잠식시켜보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카르세인이 하르니에에게 소리를 낮춰 전하려 하자.
한 여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이 예쁜 언니는 누구야? 설마 오빠 애인?!”
“…어?”
“응…?”
카르세인과 하르니에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자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영주님은 이 누나랑 만나는 거야?”
“바보야! 만나는 게 아니라 사귀는 거라고 해야지.”
“그래. 저기 반지 안 보여? 딱 한 쌍이잖아.”
“얼레리꼴레리! 둘이 사귄대요!”
아이들은 카르세인의 불안과는 달리 이상한 쪽으로 열렬한 환호를 보이고 있었다.
“얘 얘들아!”
“그러면 안 된다! 영주님한테 그러면 못 써!”
머지않아 어른들이 기겁하며 아이들을 부른다.
일제히 몰려들었던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 말하는 부모들에게 붙잡혀 갔다.
“애초에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던 모양이네요.”
“예?”
영문 모를 소리에 카르세인이 그리 묻자 어안이 벙벙해진 그에게 마침 바라크가 찾아와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아이들의 잘못이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큰 잘못은 아니니까… 그보다 아이들이 왜 저러는 거지? 다들 귀족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도련님께서 데려오신 분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카르세인도 눈치를 챘다.
‘아니. 그래서였어?’
지금 보니 영지민들의 눈은 그렇게 사납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그것도 귀족을 데려왔음에도.
“영주를 향한 절대적 신뢰가 이루어지고 있는 영지라. 흔치 않은 광경이네요.”
“허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던지라.”
“그럼요.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카르세인 공자는.”
“이봐.”
그쯤 하라는 듯 카르세인이 눈치를 주었다.
자신만 모르는 말들이 또 오가고 있다니.
어차피 이쪽도 얘기해줄 것 같진 않으니 그냥 일 얘기로 넘어가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보다 바라크. 시켰던 일은 어떻게 됐지?”
“아 예. 그 부분 말입니다만…”
바라크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뚫으려면 뚫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조각 기술만으로는 저 산을 기간 내에 뚫을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비용 때문입니다. 어딜 어떻게 부수고 뚫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지만 저 산은 돌산이지요. 장비가 존재하지 않으면 작업이 불가능합니다.”
장비를 마련할 돈.
바로 그게 문제였다.
대부분의 산은 조사하면 전리품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광물이 묻혀있든 보석이 묻혀있든 귀한 약재들이 묻혀있든 어느 쪽으로든 그 돈을 확보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러나 루스마이어는 그럴 수가 없다.
와글루 산은 돌밖에 묻혀있지 않아 비용 마련이 불가능하고 특히나 고립된 영지에서 보유 중인 생활 용품도 기껏 해봐야 3주면 전부 동나 버린다.
통행료로 돈을 받는다 한들 근방 영지에서는 루스마이어를 꺾어버리고자 시세에 큰 변동을 준 상태. 큰 의미는 없다.
기간을 줄일수록 힘들어지는 건 루스마이어였다.
“와글루 산은 역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있는 거라곤 그냥 나무와 돌뿐이었지요. 내부로 들어간들 마수들 몇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아 물론.”
바라크가 고개를 돌려 돌무더기가 쌓인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도련님이 말씀하신 대로 혹시 몰라 돌덩어리들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어디에 쓰이는지는 모르겠어 한곳에 모아 두었습니다만…”
그러자 카르세인이 피식 웃으며 답한다.
“그게 너희의 전리품이야. 이 산에 묻힌 가장 값비싼 전리품.”
“예…? 하지만 이건… 감정을 받아봤을 때 아무 곳에도 못 쓰는 돌덩어리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더 중요한 거야.”
“무슨 얘길 하나 했더니. 그랬군요.”
덩달아 하르니에가 피식 웃었다.
“그럼요. 돌이라는 건 여러모로 중요하다구요? 나무와 흙만으론 역시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가장 돌이 많이 필요한 곳이 있죠.”
“어딥니까? 어디에 팔면 되는 겁니까!”
미소를 머금은 하르니에가 카르세인과 눈을 맞춘다.
이 답은 당신이 하라는 듯.
“견고한 성벽을 지으려면 역시 튼튼한 골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 순간 바라크는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가 된 것마냥 영지민들을 향해 뛰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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