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7
만개한 벚꽃은 사람의 시선을 불러일으키고.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은 자연스럽게도 담화의 장소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이유로 귀족들도 자기들끼리 뭉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었다.
때문에 이곳에도 한 귀족 무리가 모인다.
여느 무리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법했으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케케묵은 가래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불만의 음성이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다과회장의 죄가 내게 있다니!”
헴넌이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부채를 핀 영애 중 한 사람이 무심하게 답했다.
“실제로 그렇잖아요? 피테아 영애께서 준비한 밥상에 당신이 재를 뿌렸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카르세인을 몰아붙였어! 분위기를 못 잡고 나를 내팽개친 건 영애들이지 않소!”
“전부 당신 덕에 분위기가 흐려진 거 아니었나요? 귀족의 품위를 천민보다 못하게 떨궈놓고!”
“아 아니… 그거야 놈의 영지에서 일부러 손을 써서 마차를…!”
“심지어 거기서 우리는 동부 귀족 회의 얘기로 잘 돌려줬어요. 거기서 다시 찬물을 끼얹은 건 기사들 관리조차 못한 당신 잘못이 아닌가요?”
“그 그렇다 한들…!”
탁.
헴넌이 변명하려 하자 한 영애가 부채를 접어 말을 끊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셔야죠. 헴넌 영식. 결국 당신의 잘못이 가장 큰데 이걸 인정하지 않겠단 건가요?”
“헤 헬리 영애!”
“당신 덕분에 우리까지 발이 묶일 지경이야. 클레어 영애께서 단단히 화가 나셔서 우리도 같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맞아요!”
“게다가 당신 자신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루스마이어는 곧 망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영애들이 입을 모아 긍정하자 헴넌은 점점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변명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헴넌이 동부 귀족 회의에서 비리를 통해 수상을 도운 장본인들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비밀의 전반을 전부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란 말이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헴넌은 묻는다.
“허 지금 그걸 저희에게 묻는 건가요?”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방법은 없잖나. 클레어 영애가 알아차린 이상 상대는 바그란드 공작가인 데다 나 혼자서 뭘 할 수도 없어!”
“뭐라도 해요! 당신이 잘못한 걸 책임지고 수습해야 할 거 아니에요!”
“헬리 영애는 어찌 그런 억지를 부리는 겐가! 나도 팽당해서 혼자 죽진 않을 것이오!”
“뭐 뭐라고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신들도 숨길 게 있는 건 마찬가지지 않나! 켈비아 열매를 먹이려 했던 계획은 겔게튼 자작가뿐만 아니라 그대들도 함께였지. 또한 클레어 영애께 들킨 건 그대들의 잘못이 아닌가!”
서로 물귀신이라도 되어 잡아먹을 것처럼 언성을 올리는 양측.
이곳은 이미 헴넌의 파벌과 헬리의 파벌로 갈린 상태였다.
바로 그때.
문이 덜컥하고 열렸다.
감히 어떤 멍청이가 허락도 없이 이 장소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자연스레 귀족들의 시선은 노크도 없이 들어온 방문객에게 향했다.
썩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까!
어느 쪽이든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축객령을 담지 않았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데. 나도 끼워주지 그래?”
덤덤히 걸어온 사내를 향한 반응은 정확하게 둘로 엇갈렸다.
“저기 저 사람 누구에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에게 초대를 받았을까요? 일단 귀티가 나기는 하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훤칠… 하네요?”
몇몇 여인들은 사내를 보며 얼굴을 붉히거나 신나게 눈동자를 굴리는 중이다.
이름 모를 사내를 보며 누구냐 물은 헬리 역시 마찬가지.
옷차림을 보면 귀족일 텐데 누군지는 전혀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반응은.
“허 다들 미쳤습니까?”
“영애들께선 저 자가 누군지 잊어먹기라도 한 겁니까?”
“정신들 차리세요!”
왜 저 사람을 모르고 있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었다.
“저 자는 카르세인이잖소!”
“뭐 뭐라고요?!”
헴넌의 일갈에 얼굴을 붉히던 영애들과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던 영식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푸른 선이 살짝 보일 정도일 뿐인 검은색 머리카락.
시간이 지날수록 공작가의 벽안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쇠해지듯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눈동자.
그 자리에 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르세인이었다.
‘어째서 저 자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거지?’
이유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이 자리에 있는 어떤 사람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기회이지 않은가.
주변을 암만 둘러봐도 대동해 온 사람 한 명 없다.
카르세인은 혼자다. 반면 이쪽은 귀족 여럿이고.
헴넌은 목소리를 낮추어 헬리에게 당장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 전하려 했다.
“…”
그런데 어째 헬리의 눈이 카르세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귀족에게 있어 공공의 적인 자를 향해 멍이나 때리고 있다니!
‘이보시오 이보시오!’
어깨를 꾹꾹 누르고 나니 그제야 헬리는 “아?” 하고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당장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
‘원인은 사실 저놈이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놈부터 구워삶아 보자고. 무슨 말인지 알 테지?’
여론이야 이쪽에서 조작하면 된다.
이곳은 귀족들의 소굴이니까.
먼저 손을 쓰고자 헴넌이 시동을 건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아. 공작저에서 가족 초상화를 새로 만들자기에 왔지.”
“아하. 초상화를 위해서? 하긴 그렇겠군! 날씨도 좋으니 말이야.”
비열한 눈웃음을 보인 헴넌이 카르세인의 옷차림을 스윽 훑었다.
가족 초상화.
그렇다는 건 저 옷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를 알아채고 한 영애는 하녀에게 새 차를 내려오라 명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어이쿠.”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찻물이 카르세인의 옷을 물들였다.
의복에는 향긋한 차향과 함께 진한 색의 얼룩이 들러붙었다.
초상화를 그리기엔 결코 적합하지 않은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거 실수로 내가 찻잔을 쏟아 버렸군? 미안하네.”
행동을 주도한 헴넌이 밉살스러운 연기를 해 보인다.
결코 진심은 담기지 않은 사과였다. 카르세인도 이를 쉽게 눈치챘을 만큼.
그리고 바로 옆에 보이는 한 상자.
저것에도 눈길이 갔다.
딱 좋은 타겟이 아닌가.
틀림없이 제 가족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구입한 것일 터다.
헴넌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상자를 은근슬쩍 팔꿈치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콱!
안에 있던 것을 사정없이 밟은 뒤 대놓고 보란 듯이 으깼다.
“어이쿠! 또 실수를 해버렸군. 정말 미안하다네.”
당연히 실수 따윈 없는 고의다.
그럼에도 헴넌은 씨익 웃어 보인다.
이곳은 귀족의 소굴.
아무리 천민인 카르세인이 발버둥쳐봤자 빠져나갈 수 없는 장소다.
설령 빠져나가 이를 고한다 한들 카르세인의 아군은 없다. 공작가의 양자일 뿐인 카르세인은 두 누이와 여동생에게도 배척받는 사실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뻔뻔하게도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어차피 공작가의 힘은 자신들에게 미치지 않을 테니까.
‘흐음. 바로 날뛰지는 않는 건가.’
이전처럼 바로 날뛰는 것이 오히려 누명을 씌우기 좋은데.
부족한 거라면 좀 더 긁어줘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를 골려줄까 헴넌은 머릿속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풋.”
그때.
카르세인이 피식 웃었다.
“엉?”
“실수라.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찻주전자를 들더니.
정확히 헴넌의 정수리에다 남은 찻물을 졸졸졸 붓기 시작했다.
-촤르륵.
“어푸프…! 뜨헥! 떽! 뜨헤에에엑!!!”
혼비백산한 헴넌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우적거렸다.
마치 뜨거운 물에 삶아지는 돼지마냥 헴넌의 입에서는 멱따는 소리가 나다시피 했다.
“저 저런 망측한!”
“품위 없이 그딴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돌발스러운 행동에 귀족들이 지적했으나 카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짤막하게 답한다.
“아 미안하군. 실수라서.”
“뭐 뭐?!”
“실수라니. 네놈은 명백히 고의가 다분한 짓을 저질렀지 않나!”
“이런. 너무하네. 내 행동은 고의가 다분하고 헴넌의 행동은 아무 문제가 없단 건가!”
“됐어!”
헴넌이 소리쳤다.
찬물을 머리에 들이부어 연기가 피어 오르는 머리를 충분히 식히고 난 그의 눈에는 잔뜩 충혈된 눈동자가 깃들어 있었다.
“하 하…! 네놈이…! 오냐. 이딴 식으로 나오겠단 말이지!”
바짝 약이 오른 헴넌이 이를 바득 물었다.
이에 눈치를 챈 귀족들도 하나둘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그러게 적당히 설쳤어야지. 천민 주제에.”
“날뛰게 내버려 두니까 여기가 네 마당처럼 보이나?”
“이번 기회에 아주 손을 제대로 봐주자고!”
호랑이 소굴에 들어온 겁 없는 개 한 마리를 일방적으로 물어뜯겠다는 의도였다.
그런 확신과 함께.
헴넌은 소리친다.
“여기 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어라!!”
카르세인에게 일제히 가해지는 귀족들의 공격.
영애들은 이를 부풀릴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뜨허억?!”
“컥!”
“으윽!”
예상치 못한 카르세인의 힘에 남자들은 곤죽이 되기 시작했고.
눈웃음짓던 여인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지는 남자들을 보며 점점 안색이 파리해져 갔다.
카르세인은 단순히 외형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
오늘은 왠지 일이 자꾸만 꼬이는 기분이다.
출발도 전에 언니와 싸우며 분위기가 틀어지질 않나.
마차에서 단둘이 대화를 좀 나눠보려 했더니 갑자기 말을 타고 먼저 달려가버리질 않나.
동부에 도착했을 때 말을 꺼내려 했더니 또 일이 미뤄진 데다 그걸로도 모자라 4인 제한으로 인해 카르세인만 따로 떼어놓고 오는 상황이 나와버리질 않나.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진짜 답답한 건 따로 있었다.
카르세인과의 대화야 나중에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지만 오늘부터였을까. 아니 정확히는 휴식기에 벚꽃을 보러 간다는 일정이 생겼을 때부터였다.
이때부터 뭔가 놓치고 있는 듯한 찝찝함이 느껴진 것이다.
‘…대체 뭐지? 뭘 놓쳤길래.’
문제는 그게 뭔지 손에 잡힐 듯 말 듯하다는 점이랄까.
그게 자꾸만 클레어의 속을 바짝 뒤집어놓고 있었다.
“클레어. 클레어!”
“응? 어 언니?”
“너 왜 그래. 집중 안 해?”
언니가 어깨를 흔든 탓에 클레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헉!’
아차 2황자 전하 알현 중이었지!
“하하하. 클레어 영애는 오늘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죄 죄송합니다. 이런 무례를…”
“뭐라 하는 건 아닐세.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전하.”
“에이 아리나 영애까지 왜 그러나. 솔직해지자고. 이런 좋은 날에 가족끼리 놀러 왔는데 지루하게 황가와 알현이나 하고 있으면 딴생각이 들 법도 하잖나?”
딴생각이 많아진 게 이상하지 않다는 듯 2황자는 털털하게 웃어 넘겼다.
“헌데… 좀 아쉽군. 이놈의 고지식한 인원 처리 때문에. 쯧.”
“왜 그러십니까?”
“네 명까지만 불러들인다는 게 참 아쉬워서 그러는 거네. 카르세인 공자만 동떨어져 있으니 선물을 못 주잖나. 대신들도 참 딱딱하다니까?”
어?
클레어의 어깨가 순간 흠칫했다.
“전하. 방금 뭐라고 하셨… 는지…?”
“응? 대신들이 딱딱하다고 했네만?”
“아 아뇨. 그 전에…”
“아하. 카르세인 공자에게 오랜만에 선물을 주려 했네. 공자와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잖나. 몇 년은 지났을걸?”
“…”
동떨어진 카르세인에게… 선물?
서서히 입이 떡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클레어는 심각성을 느끼고 말았다.
그간 이 위화감을 도대체 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2황자 전하. 죄송하지만 먼저 나가볼 수 있을까요.”
“클레어? 너 오늘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니?”
“나는 개의치 않네. 그보다는… 표정을 보니 뭔가 중요한 걸 떠올린 것 같은데 어서 가보게.”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전하.”
클레어는 고개를 숙인 뒤 알현실에서 벗어났다.
황자의 시선이 사라진 뒤로는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왜 이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까.
과거에도 분명히 지금과 유사한 상황이 펼쳐졌었는데.
‘설마. 설마 카르세인이 그때처럼 다쳐오는 건… 아니겠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선 벚꽃 머리핀을 내밀었던 카르세인.
그 모습을 떠올리자 클레어의 발걸음은 더욱 급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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