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2
-팍!
도끼를 휘두르자 두꺼운 통나무는 둘로 갈리며 쪼개졌다. 힘 조절이 과했는지 토동- 하고 바닥으로 쓰러져 버린다.
그걸 보곤 무덤덤하게 튀어나간 장작을 다시 집어 밑동 위로 올려 세우곤 무기 힘 조절은 여전히 어렵다는 둥의 말을 담으며 볼을 긁적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토막을 주섬주섬 집어 올리면서도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정말로.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여차저차한 이유로 동부 귀족 회의 이전에 선행으로 수행하게 된 루스마이어 영지 에피소드는 큰 틀은 비껴 나가지 않았다.
이 고립된 영지에서 행패를 부리는 기사들을 잡아다 처벌하고 신뢰를 쌓아 나가는 것으로 한 영지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귀족들로 인해 상처입은 마을 주민의 신뢰를 얻는 건 쉽지 않으며 그들을 돕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더라도 위선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천천히 카르세인이 신뢰할 인물이라는 걸 깨닫게 만들 시간이.
이때 카르세인은 루스마이어의 중심 마을인 렘텐 마을에서부터 차근차근 자그마한 선의를 보여야 하며 그들이 눈치채고 인식을 바꿀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설령 그 기사들을 직접 처리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여태 상처만 받은 이 마을 사람들의 곤두선 경계를 단번에 누그러뜨릴 방법 같은 건 없으니까.
한 마디로 단계를 거치는 것이다.
따라서 키얀의 친밀도를 파티장에서 미리 올려두고 다음으로는 키얀의 친구들인 멜릭과 토니의 친밀도를 올린다.
그리 손을 써두고 나면 마지막으로 디에나의 친밀도를 올림으로써 그제야 렘텐 마을과 루스마이어 영지에 소식이 닿는데 이때 나오는 선택지들을 잘 골라 해결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영지민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자신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 뒤로는 장면이 스킵되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카르세인은 이때 조급하게 행동해선 안 되며 마을에 진입하는 걸 다음날로 미뤄 두어야만 했다. 물론 여기선 다른 선택지를 고른 탓에 내가 직접 돌아가려고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총 며칠을 통으로 날려 먹고 나서야 루스마이어에 진입하는 게 가능해진다. 이곳의 영지민들을 상대로 그만한 시간을 충분히 들이고 나서야 루스마이어의 영주가 되어 저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엔 공작저로 돌아가 저들의 화가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날 찾아야 했는데…
“…”
▶현재 위치 : 루스마이어 령 렘텐 마을.◀
고개를 슬쩍 돌리면 이런 창이 보인다.
그래. 나는 이미 루스마이어 영지 안에 들어와 있다.
게임 속에서는 전혀 진행해 본 적도 없는 디에나 델피나라는 등장인물을 돕는 방법으로.
-팍!
하지만 나는 원하던 대로 루스마이어 영지 내로 진입했지만 그들의 집 앞마당에서 땔감을 패고 있다.
‘나쁜 상황은 아니야. 시간도 아꼈고. 인식도 평판으로 올라가서 랭크 단위로 분류되는 상태야. 움직일 수 있는 구역 자체는 아직 제약이 걸려 있지만…’
역시 마음에 걸린다.
첫날부터 루스마이어에 아무런 리스크를 지지 않고 진입한 이 상황 자체가.
뭐니뭐니해도 가장 걱정되는 건 내가 모르고 있는 전개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
자그마한 변화만으로도 분기나 선택지에 영향을 주는 이 게임의 환경을 감안하면 마냥 좋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답은 하나뿐. 더 철저하게 이 마을을 조사하는 수밖에 없어.’
우유 한 잔에 숨겨진 시험만 해도 그렇지 않았나.
더 꼼꼼하고 철저하게.
이곳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선택지의 영역에 손을 뻗고 있어야 했다.
‘하루 머물고 가란 소리도 들었고 공간 하나를 빌려 집무실처럼 쓰는 건 딱히 어렵지 않을 거야. 그 사이에 이 마을의 모든 정보를 다 캐내야 해.’
-팍! 팍! 팍!
그걸 위한 장작 패기는 아니지만 우선 이 일부터 끝내기로 했다.
-띠링!
“응?”
▶긴급 미션!◀
▶장작 패기의 결과에 따라 스텟 상승량과 패시브 스킬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허 참. 어이가 없네.”
이것도 힘을 쓰는 거라고 운동으로 취급해서 스텟도 오른다 이건가?
검이 아니라 도끼를 휘두르는 거라곤 해도 무기를 휘두르는 취급을 받는단 거고?
“…그래도 뭐 잘 해결해놓으면 좋겠지.”
겸사겸사 해두면 될 일이다.
***
“날이 좀 풀려서 그런지 이젠 낮에 좀 바깥으로 나올 만하네요.”
“요번 겨울은 이상하게 추워서… 어우. 드레스 코드가 죄다 덮는 쪽이었죠.”
“그나마도 클레어 영애께서 새로운 패션을 주도하셔서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전부 감기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네요.”
“거기다 옷에 보온 마법식의 지속 시간을 늘려 주는 기술도 좋았지 않아요?”
“그것마저 없었으면 웬만한 파티에 참석도 못 했겠죠. 생각해 보니 이것도 클레어 영애의 작품이네요?”
“호호호. 그러니까요.”
영애들이 한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고 있는 그녀들은 슬슬 봄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날씨를 맞으며 지난 겨울을 회고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 사람에게 가 있었으니.
“…”
가장 이런 모임을 좋아하던 바그란드 공작가의 셋째가 입을 꾹 다문 채 침음하고 있어 그들은 잔뜩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플로라 영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간 단순히 다과회 파토로 끝나지 않아요. 여러분!’
‘그치만 이렇게 얘기를 해도 당최 들은 척도 안 하시고…’
‘원인이 있을 것 아닌가요! 다들 들은 것도 없나요?’
‘모르겠어요. 뭐죠? 대체 뭐가 문제기에…!’
플로라에게 들키지 않게 진땀을 흘리며 침묵의 토론을 이어가던 그녀들은 이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플로라 영애께선 이미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저 상태였다고요?’
‘네 네에. 비슷한 타이밍에 내리면서 제가 인사를 건넸는데… 플로라 영애께선 그때부터 이미 저런 상태셨어요.’
‘그럼 바그란드 공작가에서부터 이미 기분이 나빴다는 거네요!’
‘어머나!’
‘드디어 갈피를 잡았군요.’
영애들은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받으며 확신했다.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저 상태였다.
그 말은 이 다과회가 지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그란드 공작가에서부터 저러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그란드 공작가에서 기분 나쁜 일이 무엇이 있을까.
다들 속으로 ‘뻔하겠죠.’ 라는 되뇌인다.
한 사람을 떠올린다.
바그란드의 품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을.
귀족이 아닌 천민인 사내를.
공작가의 오점이자 플로라가 결코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거지를.
카르세인 바그란드.
그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플로라는 다과회에서 그를 곱씹고 험담하지 않았던가.
플로라의 기분을 저리 상하게 만든 건 카르세인 때문인 게 분명했다.
영애들은 산뜻하게 웃으며 한참이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지 않았던 플로라에게 눈과 입을 모았다.
“저어 플로라 영애?”
“…아 네?”
“오늘따라 기분이 몹시 나쁘셨던 모양이네요. 다과회라고 하면 대개 발랄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는데.”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플로라가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리려 하자 바로 옆에 있던 영애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마음 쓰지 말아요. 개의치 않는답니다. 저희 다과회가 즐겁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맞아요. 플로라 영애께서도 그만한 고민이 있었을 테니까요.”
“공작가에서도 영애께선 남다른 고민을 하고 계셨겠지요. 오히려 공작가이기에 더 깊은 고민에 들지 않았겠어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결코 이 다과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다 알겠다는 듯.
그녀들은 플로라의 관심을 확실히 휘어잡았다.
또래 영애들이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서로의 시선을 확인하고는 그 계획을 실행하자며 히죽 웃었다.
“사실 재미가 좀 없긴 했을 거에요. 심심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구요.”
“그럼 저희 다음 다과회에서는 사람을 한 명씩 더 불러올까요?”
“사람… 이요?”
“네. 다른 친구를 불러와도 좋고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면 더 좋죠. 누구든 한 사람을 부르는 거에요. 저희끼리만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니 심심하신 거잖아요?”
“자랑이든 뭐든 이야깃거리가 되면 좋죠. 겸사겸사 친목 도모도 가능할 테구요?”
“친목… 도모…”
플로라가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세간은 아직 카르세인을 보는 시선을 바꾸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전히 천민이며 공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뻔하게도 자신이었고.
하지만 친목 도모라는 말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매번 이 자리에서 카르세인을 헐뜯기만 했었어. 그치만 여기 불러와서 사실 날 구해줬다고 말하면…? 테오와 엠마가 나쁜 사람이었던 거라고 말하면?’
카르세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이런 일이 있었다며 조금이나마 그를 향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카르세인의 악명을 낮출 수 있었다.
플로라의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래요. 다음 다과회에는 각자 사람 한 명을 꼭 데려오는 걸로!”
이 정도면 조금이나마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기대감에 부푼 채 플로라는 다음 다과회를 기약했다.
저 영애들이 무슨 뜻으로 이러한 제안을 한지도 모른 채.
***
장작 패기를 끝내자 자그마한 스텟 보상과 함께 몇 방울의 땀방울이 찾아왔다.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막상 해놓고 나니 좀 뿌듯하긴 했다. 이러나 저러나 마을에 땔감으로 쓰일 테니까.
근데 일을 마무리하고 땀을 좀 식히고 있으니 디에나의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한 채 내게 다가왔다.
“이 이걸 전부 다 해달라는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닌데… 죄송해요! 몸을 덥힐 정도로만 부탁드리려 한 건데…”
아무래도 따뜻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머무를 방을 덥혀 두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한 탓에 장작을 부탁한 것조차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마을 사람들 전원이 가져다 써도 될 만큼의 장작을 말끔히 정리해 놓은 걸 보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띠링!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나오는구만.’
내가 모르고 있던 선택지가 떠 버렸다.
내용 자체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으니 다행이지만 글쎄. 이 상황이 지속되다 다른 상황에 처하면 어떨지 모른다.
우선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겠지. 위험에서 벗어나게끔 저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고려해야 할 테고.
그럼 이 선택지가 정답이다.
[ 1. 비용을 지불한다고 생각해. ] ☑
“집무실로 쓸 작은 방을 하나 준비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렇게 미리 정리해 둔 거야. 거기다 식비까지 치면 어떻게 되겠어. 이 정도는 숙박비에 식비 지불이라 생각해.”
“하 하지만… 영주님께 어찌 감히…”
“영주라고 하기엔 아직 인정을 못 받은 상태잖아. 그렇게 따지면 손님이 맞고. 받은 만큼은 일해야지.”
“그런 말씀 마세요.”
디에나의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다가도 영주가 아닌 손님이란 말에 발끈했다.
마치 손님 정도로 취급되는 게 썩 달갑지 않은 것처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의 입장에선 카르세인이 디에나나 델피나를 도와준 인물일 테니 말이다.
이러면 적당히 타협점을 잡아주면 될 일이다.
“그럼 작은 방 하나만 내어 줘. 이미 나무를 해온 건 어쩔 수 없으니 영지 사람들과 나눠 쓰든지 하고.”
-띠링!
▶숙박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해당 장소에서 피로와 수면 상태 이상의 수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선택지가 완료된 것처럼 그녀도 이것까지는 말리지 않았다.
이후 욕실에 준비된 따뜻한 목욕물을 보며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온 뒤로는 마을 지도 한 장을 들고서 다시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영지민들의 행동을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카밀라가 전해준 루스마이어 영지 상황은 굉장히 꼼꼼했고 정확했다. 그렇기에 못 믿는 건 아니나 분명히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내 선택지만 해도 이미 큰 변화를 겪었으며 기존의 우유는 디에나가 아닌 델피나가 마셨다. 이곳에서 머무르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다른 변수가 더 생겨날 수도 있으니 마을 주민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건 당연했다.
또한 카밀라가 전해준 루스마이어의 내용과 비교해 무엇이 다른지 차이가 난다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꼼꼼히 체크할 필요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밖을 나서자 어느새 카밀라가 서 있었다.
“도련님께선 정말이지… 제가 모시고 있는 주인인데도 어떤 수를 썼는지 감조차 오질 않네요.”
언제 찾아왔느냐고. 왜 찾아왔느냐고 묻기도 전에 카밀라는 그리 말했다.
…근데 그게 뭔 소리야.
어떤 수를 썼는지 감조차 안 온 다니?
그리 의문을 갖고 있자 마을 한쪽에서 불길이 피어 올랐다. 얼마 안 가 사내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게 다 도련님 덕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기 카밀라 좀 더 설명을 해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루스마이어는 주기적으로 마수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말이죠.”
“…마수라고?”
순간 마수라는 말에 흠칫하며 저들의 목소리가 닿은 장소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 작대기를 어색하게나마 깎아 날을 만들어 창을 만든 그들은 다시 한 번 함성을 질러대고 있다.
군기가 잡힌 기사들의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으나 만약 싸우기 직전의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저 정도는 상당한 사기를 자랑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내 뒤를 따라온 카밀라가 싱긋 웃었다.
“제가 루스마이어 령을 맡고 있을 때는 한 번도 저들의 주도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시간만 되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곤 제발 행운이라도 깃들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나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마수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음에도 되려 소리를 지르며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다.
카밀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진 알 것 같다.
매번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외부인들에게 의존하던 자들이 스스로 창을 들고 일어섰다는 것. 그건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아냈다는 의미다.
‘드디어 제대로 된 길에 섰네.’
나도 영 맘에 안 들어서 저지른 일이긴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해주길 바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카밀라. 마수들이 오는 방향은?”
“도련님께서 직접 나서실 생각입니까?”
“뭐 이번만이야. 쓸데없이 피해가 늘어나는 건 좋지 않거든.”
카밀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마수들이 나타나는 길목을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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