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창천의 이름이 아깝구나· 마치 벌레처럼 토굴에 틀어박혀 벌벌 떨고 있는 남궁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하하! 허울뿐인 명성에 집착하는 정파 놈들다운 모습 아닌가?”
“온갖 위선은 다 떨더니 막상 죽을 때가 되니 무서운가 보지요·”
“덕분에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어·”
그들의 대화가 비수가 되어 그의 폐부를 찔렀다·
남궁·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한 행동이 대 남궁세가의 무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짓이라는 것을·
덕분에 놈들의 눈을 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곤 해도····
스스로의 부끄러움 탓일까?
명백히 그가 들으라고 지껄이는 큰소리에도 그는 입술을 깨물며 반박하지 못했다·
-진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가문은 다시 세우면 되는 거야· 그러니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마교의 흉계로 세가가 불타오르던 날 아버지가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
“대꾸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저도 알고 있는 모양이겠지·”
“허! 이 모습을 모두가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만하면 눈치껏 기어 나올 줄도 알아야지·”
“····”
과연 이런 모욕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살아남는 게 맞는 것일까?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어깨가 무거울 뿐·
이렇게 살아남아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 한들 바닥에 내팽개쳐진 체면과 명예는 무슨 수로?
과연 그가 이 수모를 견디는 것이 유언 때문만일까? 혹시 마음 깊은 곳에선 추하게라도 살아남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무수한 상념은 자책을 남기고 깊은 상흔을 남겼다·
허나 그는 곧 깨달았다· 이러한 고민도 사치일 뿐이라는 것을·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제갈가의 친우가 장난삼아 만들어줬던 진법기를 뽑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가만히 누워있다가 칼 맞아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최소한 검이라도 휘두르며 죽어야 먼저 가신 선조들 보기에 덜 부끄러우리라·
남궁진은 허리춤의 검을 꾹 쥐며 지하 토굴에서 천천히 몸을 뺐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토굴에서 몸을 비집고 나가는 중에도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몸을 빼낸 토굴에 남겨진 진법기와 검은색 한 척(1尺 33cm) 길이의 단검을 발견했다·
‘····’
언뜻 보면 시커먼 가시처럼 생긴 납작한 단검이었다· 길쭉한 세모꼴의 검날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물결 모양이 가로로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뭔가 주위에서는 축하한다 부럽다 등의 반응을 보였던 것 같은데··· 전혀 체감되지 않는 외관이었다·
게다가 단검이다· 안 좋은 무기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는 남궁세가의 무인이다· 익숙하지 않은 무기는 짐이 될 뿐이고·
허나 그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관리자가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그가 하는 행동 하나에 태풍이 휘몰아치듯 커뮤니티 전체가 들썩였었다·
그런 그가 준비한 물건이 평범할 리는 없었다·
남궁진은 단검을 조심스레 쥐었다·
차갑고 시리다·
‘허나 깃털처럼 가볍다·’
팅- 팅-
손가락으로 두어 번 튕겨보니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묘한 기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건가?
허나 그는 고민이 되었다·
살아생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니 확실하다· 대 남궁세가의 검법이 오롯하게 하늘을 거닐 마지막 순간·
그렇다면 선대 가주님께 받아 7년이나 함께 해왔던 애검으로 기꺼이 남궁의 기치를 알려야 하지 않을까?
흙과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굴을 빠져나오자 물경 오십에 달하는 무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방도 저러지는 않겠는데? 상거지가 따로 없어· 크큭·”
“하하하! 남궁세가의 말로가 이런 꼴이라니!”
“콧대만 높은 위선자 녀석들·”
“끌고 와라!”
“예 부대주·”
남궁진과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 새까만 무복을 휘날리며 휘릭- 다가왔다·
같은 일류 경지로 보인 청년의 전신에서는 검은색 사나운 기운이 들끓고 있었다·
놈의 여유로운 얼굴에 배알이 뒤틀린다· 마치 ‘너를 짓뭉개고 주위의 인정을 받을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적어도 남궁진은 과시하기 위해 검을 들지는 않았다· 정도와 마도를 떠나 무인의 마음가짐으로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분한 것은 녀석의 내공 수위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점과
쾅-
“쿨럭·”
그의 몸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
남궁진의 애검이 허공을 날아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목이 저릿했다· 기습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애검을 뽑아 대응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전투 중 무기를 손에서 놓치는 것은 무인으로서 최악이었다· 그만큼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하하· 보셨습니까? 온실 속 화초가 따로 없군요· 실전 경험 없는 애송이가 틀에 박힌 초식만 고집하는 모습 좀 보십시오· 딱 봐도 정파 나부랭이의 표본이지 않습니까?”
마치 주변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듯 지껄이는 청년의 말에 남궁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실전 경험이 많은 실력자라는 걸 알리고 싶어 하는 속내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도·
“하하· 칼 든 광대나 다름없구나· 무인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어디 나려타곤이라도 해보려무나! 하하하·”
녀석의 쇄심조(碎心爪)가 공기를 가르며 또다시 짓쳐들었다· 날카로운 칼날 손톱이 달린 놈의 기문병기가 시야를 가리며 쇄도했다·
남궁진은 다가오는 손아귀 뒤로 보이는 비릿한 미소를 보며 놈의 진의를 깨달았다· 일부러 급소를 피해 공격하며 죽음마저도 모욕할 생각이 가득하다는 것을·
‘어디 네 뜻대로 될 성싶으냐?!’
남궁진은 품속의 단검을 꺼내 곧장 놈에게로 뛰어들었다· 죽음마저 도외시한 동귀어진의 찌르기 초식을 꺼내들었다·
‘명예롭지는 못하더라도 죽음마저 모욕당하지는 않겠다!’
허나 단검의 길이가 너무 짧은 탓일까? 아니면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일까·
단검이 놈에게 닿기도 전에 놈이 상체를 비틀며 여유롭게 피해 버렸다·
‘젠장!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궁무애검법의 동귀어진 초식인가?”
“실제로는 처음 보는 것 같군·”
“허허· 정파란 놈들은 참· 어째 동귀어진의 수마저 틀에 박힌 검로인지· 쯧쯧· 안 그렇소 혈혼검 비광?”
“····”
마교의 남궁세가 비고 추격대는 초절정 경지의 대주와 열 이상의 절정 경지 부대주 삼백 이상의 무인들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였다·
그리고 같은 부대주 중에서 가장 강한 혈혼검 비광이 게으른 대주 대신 은연중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비광은 혈마종 종주의 직계로 신분도 범상치 않았다·
그만큼 마교는 남궁세가의 비고에 잠들어 있는 마교의 신물이 꼭 필요했고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천마검(天魔劍)! 전설 속의 검이라는 천마검을 되찾아야 했다·
“비광 부대주? 왜 말이 없으시오?”
“하하· 그러고 보니 저 청년이 비광 부대주와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던 것 같군요·”
“확실히 일류 중에서도 실력이 좋은 것 같더라니·”
허나 어째서인지 평소 자신의 칭찬이 나오면 말이 많아지곤 했던 비광 부대주가 눈을 부릅뜬 채로 말이 없었다·
“비광 부대주?”
그 순간이었다·
“비광 부-”
비광 부대주의 이상함을 눈치 챈 또 다른 부대주의 목소리가 끊겼다·
마침 남궁진과 마교 무인이 한 번 더 격돌했을 때였다·
스르륵- 피슛-
불어오는 바람에 부대주 하나의 목이 흘러내리며 떨어져 나갔고 혈혼검 비광의 심장어림에서 핏줄기가 솟더니 쿵 쓰러졌다·
“어어?”
“어?!”
“비 비광 부대주?”
싸한 정적이 마교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게다가····
“무 뭣?!”
“끄아아악!”
갑자기 너댓명의 무인들이 가슴팍에서 피를 흘리며 풀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어떠한 징조도 없이· 심지어 내공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았다·
“!!”
“누 누구냐?!”
“무슨 일이냐!”
한창 전투 중인 남궁진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경하고 있던 마교인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일·
“어떤 고인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이만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정파의 영웅이신 것 같은데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시지요· 비록 진영은 다르나 저희도 선배에 대한 예의는 아는 놈들입니다·”
마교의 부대주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필시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은둔고수이리라·
절정 무인이 낌새도 느끼지 못할 암습이라니! 그것도 정파에서!
끝끝내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편 남궁진은 단검을 휘두르면서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지? 착각인가?’
마치 검이 늘어나는 듯한 위화감을 잠시 느꼈다· 허나 단검이 깃털처럼 가벼워 착각이겠거니 생각할 뿐·
‘신법(身法)이 예사롭지 않은 놈이다!’
상체를 이리저리 뒤틀며 가벼운 보법으로 그의 공격을 너끈하게 피해낸다·
그런 와중 놈이 고개를 돌려 주위의 소란에 주의를 기울일 때였다·
‘기회!’
남궁진은 단검을 가로로 크게 휘둘러 놈을 베어내려 했다·
“죽어랏!”
“어설프군· 고작 그런 공격에····”
놈이 몸을 뒤로 쭉 빼며 회심의 일격을 회피했다· 상체만 뒤틀어 공격을 회피하던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신법뿐 아니라 보법도 범상치 않았다·
‘제길! 끝인가?’
더는 움직일 힘이 없었다·
‘응?’
그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온 순간 남궁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주변이 온통 거대한 칼에 베인 듯 난도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땅바닥과 바위도 가리지 않고·
주르륵-
그리고 회피했던 상대도 상·하체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끄륵·”
“?!”
뭣?
남궁진은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실로 복잡한 통로야· 마치 뒤엉킨 거미줄처럼 지저분하기 짝이 없군·”
《위대한 세피로트》와는 달랐다·
“어쨌든 여기와 연결되었던 것 같은데····”
크리엘라는 차원 통로의 흔적을 기어코 찾아내 원흉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음이라·
“얼른 처리하고 돌아가야지·”
세피로트 외부의 차원은 심해와 같아서 오래 머물수록 그의 신격에 좋지 않았다· 오염도 오염이거니와 《위대한 세피로트》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아 신력이 줄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흠···?”
그런 크리엘라의 눈에 별빛 머리의 여인이 들어왔다·
“계집!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왠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을 주는 여인·
허나 무슨 상관일까!
그는 한 세계를 관장하는 위대한 주신 크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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