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악마왕 비르델·
심연 어비스의 모든 악마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이자 마신으로 추앙받는 악마·
눈만 마주치면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칼부터 들이대는 살육 병기 용사대와 사보타주와 테러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용사를 저지해 마계 전역을 수호한 자·
악마왕 비르델·
마계에서 그녀를 거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감히 대들 수 있는 배짱 있는 녀석들은 이미 고혼이 된 지 오래다·
그녀는 검에 있어 하늘도 오시할 재능을 지녔으며 커뮤니티 내 다양한 유저들에게 두루루두 인정받은 네임드다·
ㄴ한 수 배웠습니다· 다음에도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ㄴ(악마왕비르델) 시간이 허락한다면·
ㄴ감사합니다· 덕분에 검술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ㄴ(악마왕비르델) 흥·
물론 ‘비공식 논검 랭킹 3위’에 등재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ㄴ(철마쌍협) 갈! 거기서 맹호출수의 초식으로 왼쪽 하단을 노린다!
ㄴ(악마왕비르델) 흠···· 그렇다면 몸을 반의반 바퀴 회전 후 칼등을 축으로 가볍게 검을 좌로 비틀지·
ㄴ(철마쌍협) 맹호출수에 이어서 앞발로 진각을 찍은 뒤 승천각을 사용하겠다·
ㄴ(악마왕비르델) 그건 어떤 초식이지?
ㄴ(철마쌍협) 왼발을 축으로 시계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켜 회전력을 고스란히 실어 차올리는 각법일세· 각도는 정방향 27도다·
ㄴ(악마왕비르델) 역시· 승부는 난 것 같군·
ㄴ(철마쌍협) 뭐라?!
ㄴ(악마왕비르델) 여기서 몸을 앞으로 15도 숙이며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 올리면?
ㄴ(철마쌍협) 허엇!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참으로 어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ㄴ(철마쌍협) 이럴 수가···! 이미 두 수 전에 준비했단 말인가?
ㄴ(악마왕비르델) 흥· 성장해서 돌아오도록·
말로 떠벌리는 검술 대련이라니·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허나 실상은 달랐다· 이곳 차원 통합 커뮤니티엔 무수한 무림인과 기사가 있었고 오랜 세월 축적해온 경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꽤나 정확한 대련이 가능했다·
ㄴ무협 초식은 내공이 없으면 실전에 쓸모없는 판타지 체조 아니냐 ㅋㅋㅋ
ㄴ흥! 전신 갑주만 믿고 나대는 겁쟁이들이 감히 초식의 오묘함을 알기나 하는가?
ㄴㅋㅋㅋ중세 검술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ㄴ하하· 너야말로 초식의 현묘함을 발끝이라도 볼 수 있겠느냐?
ㄴ논검ㄱ
ㄴㅅㅂㄱ!
논검·
차원 통합 커뮤니티의 꽃이자 격렬한 논쟁으로 빚어진 키보드 배틀의 정수였다·
누가 누가 더 강한가·
누가 최강자인가·
그간 끊임없는 논검으로 인해 커뮤니티가 너무 혼잡해 관리자가 부임되자마자 [논검 투기장] 탭이 개설됐으니· 그 열기를 알 만했다·
물론 검으로만 논검을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내공과 오러 그리고 마법까지 계량해 논검을 펼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발도vs쌍검
-냉법vs불법
-외공vs내공
-청룡vs드래곤
-대마법사vs소드마스터
서로의 자존심을 건 진검승부의 장!
그곳이 바로 논검 투기장이다·
-조선 시대에 예송논쟁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최강 논쟁이 있고 차원 통합 커뮤니티엔 논검이 있다!
그러한 논검 투기장의 검술 분야 비공식 랭킹 3위란 위치는 그녀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전 차원의 날고 긴다는 검사들을 상대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은 단순히 검을 좀 쓴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검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 그것이 바로 커뮤니티의 ‘악마왕비르델’이었다·
***
철썩-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이며 그녀 ‘악마왕비르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 미친년이 또 허공을 보면서 쪼개고 있어?”
철썩- 퍼억-
“크흐윽!”
150cm도 되지 않은 가녀린 체구의 소녀가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렸다·
퍼억- 퍽- 촤악-
“상품 가치 떨어지니까 정신 나간 짓 하지 말랬지?”
어느새 채찍까지 꺼내든 매질에 그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촤악- 철썩-
“독한 것 봐라· 하하· 네년의 기개가 안타깝구나·”
촤악-
촤악-
“허억· 허억· 네년의 몸은 튼튼해서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이렇게 팔다리의 힘줄을 끊어놔도 겉으론 멀쩡하잖아?”
채찍을 휘두른 육중한 거구의 중년인은 가학적인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중년인은 소녀의 피부가 기이할 정도로 붉게 변하고서야 만족한 듯 채찍을 거두었다·
“더러운 이종족년이·”
그렇게 씩씩대던 중년인은 침을 퉤 뱉고는 두꺼운 자물쇠로 철창을 잠그고 떠났다·
중년인이 떠나자 소녀의 몸에 어리던 붉은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피기침을 뱉어낸 그녀는 차가운 석벽에 기대어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붉게 변했던 피부가 원래의 창백한 색으로 돌아왔다·
커뮤니티에서는 무려 악마왕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현실은 지독스럽게도 차가웠다·
악마라니····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변방의 북방계 이민족의 작은 부락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차가운 겨울바람과 황폐한 토양의 척박한 곳이었지만 부락민들끼리 힘을 합쳐 아이들의 미소를 지켜내는 그런 곳이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서로를 위해 온기를 나눠줄 줄 아는 이들·
다만 가끔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피부가 붉어지는 독특한 특성이 있었을 뿐·
그런 그녀가 이민족이 아닌 ‘악마’의 자식들이라며 이종족 취급을 받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쿨럭·”
그녀는 쇠창살 사이로 달빛을 올려다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비르델· 어린 나이의 너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맡기는구나·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부족장이었던 할아버지의 피를 토하는 비통한 심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오열하며 끝내 혼절하신 어머니가 아직도 눈에 그리듯 선명했다·
제국의 기사에게 머리채가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그녀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부족민 전원을 살려주마· 어쩔 테냐? 부족을 위해 지옥길을 걸어가겠느냐?
-그리하겠습니다·
그녀는 제국 기사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감사했다· 제국 기사가 부족민의 학살을 막기 위해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국의 깃발 아래 대륙의 통일을 앞두고 있다· 그러기까지 참으로 무수한 피가 흘렀어· 그런데 참담한 것은··· 앞으로 흐를 피가 더욱 많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인간··· 의 피는 아닐지라도·
이종족 말살 정책·
그때의 제국 기사는 참으로 인간적인 눈빛을 보였던 것 같다· 안쓰러움 비참함 슬픔 죄책감·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였다·
-제국의 기사인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어떡하라는 건가요?
-···네 말이 맞다·
쓴웃음을 지은 기사가 말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제국 내부에서도 말이 많다· 아무리 승전했다고 한들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
-그래서 위쪽에서는 제국민의 분노를 받아줄 선전물을 강하게 원해·
-····
-이를테면 ‘악마를 멸절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포장하기 위한 그런 증거를·
-그래서 저를 선택하신 거군요· 특히나 저는 눈에 띄게 붉은 피부로 변하니까요· 게다가 부족민이라는 인질이 있는 이상 쉽게 목숨을 끊지도 않을 테고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알겠습니다·
-아마 쉽지 않을 거다·
그녀는 제국 마탑에 의해 여러 신체 강화 시술을 받았다· 제국민 10억의 분노를 받아야 하는 만큼 몸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 때문에 더는 성장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 더해서 눈동자의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뒤바뀐 역안 시술도 받아야 했다· 시력을 거의 잃는 대가였다·
또한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사지의 근맥도 잘라내야 했다·
더도 덜도 말고 제국민의 분노를 받기 위한 살아있는 인형·
그것이 비르델의 현주소였다·
그런 그녀에게 [차원 통합 커뮤니티]의 초대가 도착한 것은 죽지 못해 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제2의 인생을 선물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이곳에서도 우울하게 지낼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게 그녀는 컨셉이라는 가면을 착용하고 무수한 세계를 상상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꾸었다·
그들의 모험은 반짝이는 별과 같았다·
허나 움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그녀는 별이 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별을 빛나게 해줄 밤하늘이 되기로 했다·
밤하늘이 되어 가슴에 별을 품기로 했다·
그녀는·
가슴 속에 소중한 것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었다·
별 하나에 할아버지를 담았다·
할아버지는 억센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별 하나에 어머니를 담았다·
어머니는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별 하나에 아버지를 담았다·
아버지의 어깨에 앉아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에 꿈을 담았다·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자유로웠을 그녀를·
그리고 이웃을·
또 그녀를 반겨주는 가상의 짓궂은 친구들을·
그녀의 흐릿해진 시야로는 밤하늘을 올려다봐도 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건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가슴엔 무수한 별들을 담고 있었으니까·
가슴 속에 세상을 담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툭·
그런 그녀에게 자그마한 선물이 도착한 것은 어쩌면 희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별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재울다님 SleepMan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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