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4
지하실로 향하는 길을 내리 걷던 클리온의 발치 아래로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황실 감옥·
일반 감옥과는 달리 황실에서 직접 고른 1등급 역적들만 모인 곳이다 ·
‘오랜만에 오는군·’
제아무리 황자라고는 하나 클리온이 이곳에 멋대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다· 본래 이곳에 출입하려면 아버지의 허가가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여독으로 인해 골골대고 계시다· 그리고 블랜튼은 그 딸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지금 아니면 구출하지 못하겠군·’
클리온은 크게 심호흡했다·
끼익·
쿠쿵!
커다란 철문이 우레처럼 요란한 소리를 토해내며 열렸다· 클리온은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는 퀴퀴한 냄새가 몰려오는 지하실로 발을 내디뎠다·
그곳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존재했다·
“이럴 수가···· 2황자 아닌가? 나 좀 꺼내 주게!”
“몰라보는 새에 얼굴이 많이 바뀌었군요! 폐하께선 아직 건재하신지····”
“야 이 색정광아! 날 여기에 처박아 둬야만 속이 후련했냐!”
황실에 의해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헛된 희망을 품고 자신을 존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짜고짜 쌍소리를 해대며 삶에 미련을 버린 듯한 이도 있었다·
클리온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직진뿐이었다·
감옥 끝까지 걸어간 클리온은 독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딸깍·
문 앞에 열쇠를 걸고 돌리자 내부에서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어둠이 가득하던 독방 내부로 한 줄기 빛이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뼛가죽만 남은 남자의 신형이 드러났다·
그 남자를 클리온은 안타까운 투로 불러 깨웠다·
“형님·”
그가 그리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렌스 대륙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알리온 필리우트 1황자·
“···무어냐·”
검댕이 묻어 얼굴은 볼품없었으나 쪽빛처럼 푸른 눈동자에선 감정의 편린이 엿보였다·
분노 절개 기대 무념 그리고 형언하기 힘든 수백여 가지의 감정·
“형님 접니다· 클리온·”
“그래 아우냐·”
클리온은 고개를 숙여가며 정중히 인사했다·
“예 10년 만에 뵙습니다·”
“10년이 아니라 9년하고도 8개월 만이다 멍청한 동생아·”
알리온은 긴 머리를 흔들거리며 맥없이 일어났다· 그 순간 무언가가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쇠사슬이었다·
“못난 형을 비웃으러 온 거라면 그만 돌아가라·”
“10년 전의 일 때문이라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클리온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알리온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10년 전· 블랜튼의 세뇌에 걸린 클리온은 황제와 함께 알리온을 이곳 황실 감옥에 가두었다·
알리온이 마수의 세뇌에 걸리지 않는 특성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제국을 좀먹어야 하는 마수들에게는 1황자가 골칫덩이나 다름없었고 반드시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였다·
알리온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바꾸어 보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황실 일가는 몰락했고 제국은 이제 끝났다·
그리 생각하며 살길 어언 9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이곳에 집어넣었던 혈육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알리온이 독방 늙은이처럼 끌끌거리며 웃었다·
“네가 세뇌가 풀렸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알다마다!”
클리온은 알리온에게 채워진 수갑을 전부 풀었다·
1황자는 진달래나무 가지처럼 여윈 손목을 어루만지며 씁쓸히 웃었다·
“일이 끝나면 운동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군· 해서 아우의 계획은 무엇이지? 날 여기서 풀어놓은 다음에는?”
“어느 소녀에게 형님을 데려갈 생각입니다·”
“혹시 예쁘냐?”
“····”
“농이다· 계속해 봐·”
아무래도 여자를 밝히게 된 건 형의 탓이 큰 듯하다·
“···그 소녀가 절멸급 마수에 대응할 수단을 만들었습니다·”
“정령 없이?”
“정령 없이요·”
클리온은 지난날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소상히 설명했다· 두골 윤곽이 보일 정도로 야윈 알리온은 때때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채로 동생의 말을 경청했다·
“흐음 그렇게 된 거로군·”
모든 걸 이해한 알리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클리온은 미리 가져온 로브를 형에게 씌워준 뒤 감옥을 빠져나왔다· 철창살 바깥으로 고성이 와글거렸지만 두 황자는 들은 체도 안 하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두 황자가 몸을 숨길 곳은 황성 구석에 있는 별채밖에 없었다·
“여기라면 아무도 안 오겠지·”
“지금 블랜튼 공작도 어딘가로 가고 없습니다· 당장 시간은 번 셈이죠·”
“일단 이 고약한 냄새부터 빼고 싶군·”
알리온은 잘 씻은 뒤 머리를 대충 다듬고 나왔다· 흑단나무처럼 시커먼 머릿결을 뒤로 묶어 조랑말 꼬리처럼 내리자 제법 볼 만한 몰골이 되었다·
직후 조촐한 식사가 이어졌다· 엘랑카야 산맥도 식후경이라고 뭐라도 먹어야 힘을 내는 법이다·
밀이 몸에 잘 받지 않는 제 형이었다· 클리온은 문밖에서 시녀를 시켜 쌀로 만든 요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엘프 산모들이 먹는 숭늉으로 위장을 덥히고 새우와 청경채를 볶아 올린 리소토로 요기했다· 10년 만에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 식사치고는 단출했다·
“현재 국정 상황은?”
“많이 안 좋습니다·”
밥을 먹는 도중에도 알리온은 제국의 현태(現態)를 물었다·
계파갈등은 어떻게 되었는가 경상수지는 어떠한가· 국민들은 잘 살고 있는가 북부 전선은 어떠한가·
밥을 한 숟갈 물 때마다 열 마디가 오갔다· 그로 인해 밤에 시작했던 식사가 자정이 넘어서 끝났다·
기운을 차린 1황자는 기거 장소를 옮기자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진 한가운데다· 여기 너무 오래 머무를 수는 없지·”
“그럼 틸레트로 갑시다·”
오밤중· 두 황자는 누더기 로브를 두르고 황성을 탈출했다·
“아카데미 북서부에 공용 축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묵으면 아무도 모르겠지요·”
클리온의 말대로 축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종이 몇 장이 남아있군·”
수개월 전까지 누군가가 생활했던 흔적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형님은 여기서 잠시 눈을 붙이십쇼· 제가 밤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흐음·”
알리온은 말없이 짚단에 누웠다· 난파선의 돛대처럼 삐죽 튀어나온 볏짚이 등을 쿡쿡 쑤셨다· 그렇다고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구멍 뚫린 헛간 천장을 올려다보던 알리온이 탄식했다·
“제국도 밸 날이 머지 않았구나·”
“불길한 소리 마십쇼 형님·”
“아니 별이 운행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그렇다· 조만간 꼬리별 하나가 떨어지고 말 것이야· 누군가가 안타까운 일을 당할 것이라는 징조이기도 하지·”
알리온의 특기는 점성술이었다·
별의 운행은 곧 정령의 운행이었다· 그는 정령 자체를 다루는 대신 정령의 사념이 흐르는 모습을 관찰하고 미래를 예지해내는 기술을 익혔다·
이 능력으로 제국의 운명은 물론이요 블랜튼 공작이 벌일 일도 얼추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명운은 거스를 수 없지만 최대한 완만하게 떨어지도록 할 수는 있지·”
알리온은 짚단을 짚고 일어났다·
“음?”
볏짚 사이로 꼬깃꼬깃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알리온은 반사적으로 종이를 꺼내 올렸다·
[플레어 연구실 주소 옮김]
[카레야스관 301 (마도연성부 동아리 부실)]
그곳에는 예상외의 행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
그것이 두 남정네가 내 작업소로 쳐들어온 경위였다고 한다·
“사실 동이 틀 때 한 번 방문했었는데 그때 자네가 없어서 말이야· 내 갑작스레 쳐들어온 건 무례한 줄 아니 일단 사과를····”
“···됐으니까 거기 앉아 보시고요·”
한껏 폼을 잡던 1황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는 황자들이 한 말을 되짚었다·
“흐음·”
옛날 마이홈에 내가 그런 쪽지를 남겼던가?
아니 절대 아니지· 내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는데?
틀림없이 버멜이 벌인 일이었다· 그래야만 말의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그나저나 스태프 좀 치워주면 안 되나? 그 모양이 이상해서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네·”
그러게 누가 노크도 없이 들어오래·
“사정은 대충 알겠습니다·”
일단 존대로 말을 바꾸었다· 클리온과는 달리 1황자는 초면인 데다가 아카데미 바깥사람이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로드스톤을 감상하고 1황자의 석방까지 알게 된 나는 그러려니 하며 동아리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방에는 엘프 친구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로드스톤이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레이는 여전히 퍼질러 자고 있었고 그랬기에 나 혼자 EMP 발생원을 만들고 있었다·
출출해진 탓에 캔커피라도 하나 사러 나갔다 올까 생각하던 참에 얼굴을 가린 남자 둘이 내 방으로 쳐들어왔다·
처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딜 봐도 수상한 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
일하고 있는 걸 방해했기 때문이다·
‘내 나와바리에 들어오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새끼들인가’ 싶은 마음에 스태프를 꺼냈다· 여차하면 캘리퍼스로 면상에 독니자국을 만들어 줄 심산이었다·
결과적으론 실패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이 나라 황자들이었으니까·
그렇게 장장 30분에 이르는 해명 겸 사연을 듣게 되었고 이들이 찾아온 경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시간이 없네· 내가 감옥에서 나왔다는 게 공표됐다는 건 블랜튼이 알아챘다는 뜻이야·”
“그래서 제 플레어가 필요하신 거고요·”
1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든 걸 짊어지고 놈을 여신 곁으로 보내버리겠네·”
글쎄· 무모한 짓일지도 모르겠는데·
딱히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직 고민해 볼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혹시 그 뒤에 있는 게 플레어인가?”
“아뇨· 발명대회 출품작인데요·”
“그렇군···· 뭔가?”
“마수들 눈깔 뒤집히게 하는 장치요·”
지금 제작하고 있는 EMP 발생기·
왜인진 몰라도 버멜이 만들어달라고 했다· 설마 이 황자들이 찾아온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리 추론하던 와중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황실 친위대에서 잠시 검문이 있겠다! 알리온 황자께서 그 안에 계신가?
이런·
“큰일이군! 친위대는 모두 한가락 하는 녀석들인데····”
“그럼 비품실로 들어가 있으세요·”
“소용없을 거다· 쟤넨 다 뒤집어 놓고 가는 걸로 유명하거든·”
두 황자는 기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탈출구를 찾기 위함이다·
3층 뛰어내린다고 죽을 높이는 아니다· 하지만 바깥에는 더 많은 경비인력이 있었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실종된 1황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주목받고 말 겁니다 형님!”
“이제 어떡해야 하는가···!”
머리를 싸매는 것도 둘이 똑같다·
– 문 열어라!
쾅! 쾅! 쾅!
발로 세차게 두들기는 듯한 소리·
– 협조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내 얼굴에 불퉁한 감정이 어렸다·
솔직히 다른 인간다운 방법을 강구해서 잘 돌려보내려고 했었는데····
“이 호로새끼들이 감히 내 연구실 문에 발길질을 해?”
더는 급발진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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