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9
에테르가 아직 노예였던 시절·
주인으로서의 클라이스는 사담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마법에만 몰두했으며 마도학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당시의 에테르도 딱히 클라이스와 소담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최소한의 대화를 제외하곤 제대로 말도 섞지 않았다·
그러나 예외는 있는 법·
어쩌다가 클라이스가 동료 교수와 술자리를 가진 직후에는 어김없이 에테르에게 주사를 부렸다·
술주정이라고는 해도 고까운 편은 아니었다· 개차반인 평소 성격과는 다르게 클라이스는 위스키를 마시면 제법 유순해지는 스타일이었다·
그때만큼은 마법이고 뭐고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정감 어린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했다·
솔직히 말해 에테르는 그걸 마음에 담아 듣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의 과거사 따위 뭣도 중요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것보다는 언제쯤 화계마도를 송두리째 익힐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그런데도 금안족의 머리는 클라이스의 주사를 일일이 기억에 각인시켰고 그때 에테르는 클라이스의 위로 죽은 형제자매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클라이스의 알코올 섞인 토로에 따르면 병으로 죽은 둘째 언니를 제외한 모든 친자매가 전부 마수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때 감상은 ‘뭐 그렇구나’ 정도에 불과했다·
솔직히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는데 남의 친인척 죽음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의 에테르에게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어 언니가 살아 있다고요?”
스크롤을 깎던 일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클라이스·
그녀의 눈빛에는 당혹감과 기대감 머뭇거림과 함께 일말의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 어떤 언니요? 둘째? 셋째? 넷째? 이름이 어떻게 되죠? 아니 외모는 어떻게 생기셨어요? 쌍꺼풀이 있었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낯빛이었는데 말 한마디에 이렇게나 생기를 되찾을 줄은 몰랐다·
제 처지도 망각한 채 절제를 잃어버린 모습· 이런 클라이스는 3년을 부대끼면서도 한 번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이게 그녀의 본모습일지도 모르지·
하기야 친하게 지냈던 형제자매가 죄다 마수에게 당했으면 사람이 그리 피폐해질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클라이스가 에테르의 대우를 형편없이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앉아·”
클라이스가 환하게 웃던 것도 잠시· 곧 에테르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고는 눈을 내리깔며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겉으로 내비치는 표정과는 반대로 속은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좋아 죽는 중이다·
“어 언니 이름이라도····”
“그 스크롤을 완성하면 알려줄지도 모르지·”
에테르는 입매를 비틀며 그리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이스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미친 사람처럼 스크롤을 조합해나가기 시작했다·
스크롤을 다루는 일에 천부적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손놀림을 빠르게 하는 것은 진짜로 처음 본다·
똑똑·
“언니 주문한 책 가져왔어요·”
로즈마리가 두꺼운 책을 들고 들어왔다·
“저쪽 앞에 가져다 놔·”
“넹·”
꼬부랑 지팡이를 짚으며 열심히 책상까지 걸어가는 로즈마리· 쿵 하고 클라이스의 앞에 1200페이지짜리 전문 서적이 떨어진다·
“필요하면 그걸 참고해서 작성하면 된다·”
에테르가 주문한 책은 스크롤에 관한 것이었다·
스크롤에 관한 이론이라면 전부 빠짐없이 짜 넣은 책· 이는 다름 아닌 로즈마리가 직접 집필한 도서였다·
“뭐예요? 언니 노예가 읽는 거예요?”
“왜 문제 있어?”
로즈마리는 언짢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얼굴을 풀었다·
클라이스는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었지만 언니가 이런 걸 원하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로즈마리는 에테르의 품에 강제로 골인했다·
“언니가 그러는 거라면 저는 문제없어요·”
“···그런데 왜 안기는데·”
“책 가져다주면 한 번 안아준다고 했잖아요·”
로즈마리는 지팡이를 내려놓고는 꼬옥 안겼다·
다른 마수가 본다면 수백 살 먹어 놓고 왜 어리광을 부리냐고 조롱할 법한 일이었지만 사실 여기에는 고도의 노림수가 숨어있었다·
쉽게 풀어서 얘기하자면 죽고 싶지 않았다·
지금 에테르는 ‘증기의 비’ 사건 이후로 세계 멸망에 완전히 미쳐있었다· 인간에 대한 화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면 가장 친한 동생인 자신이 손수 나서서 언니의 기분을 풀어주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건 결코 사심 같은 게 아니다·
대륙이 흑주 폭격으로 유리화되는 걸 막기 위한 계책이지!
에테르는 끄응 하며 두 손을 들었다· 다릿심이 풀린 로즈마리는 의자매를 더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제 충분하잖아· 떨어져·”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로즈마리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에테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직 백야를 맞은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이다· 당분간은 절름뱅이 신세로 살아가야겠지·
물론 로즈마리는 다 낫고서도 한동안은 꾀병을 부릴 생각이었다·
“하아 제발·”
에테르는 로즈마리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잠깐의 시간을 낭비했다· 이는 명백한 연구 방해 행위다· 마음 같아선 길라흐에게 했던 것처럼 으름장을 놓고 싶었다·
그러나 이 동생에게는 그러지 못하겠다·
시원한 물로 닦아낸 포도처럼 싱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즈마리·
내쫓고 싶은 마음과 그냥 응석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머릿속에서 공존한다·
여기서 후자에 해당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굳이 인상을 쓰며 떠올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또 다른 인격이겠지· 이 인격이 튀어나오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에테르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나가·”
“조금만 더요·”
“연구에 방해되니까 나가라고·”
“····”
로즈마리는 절뚝거리며 나갔다· 얼굴은 잔뜩 울상이 된 채였다·
“···작은 언니한테 갈래·”
“아카샤라면 출장 갔다·”
“····”
덜컥 하고 문이 닫힌다·
불쌍하다는 것쯤은 안다· 내친 것에 칼에 베인 듯한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리따운 동생의 응석만으로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전부 게워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로즈마리처럼 친하게 지냈던 이에게도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몇 번씩이나 존재했기에 경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젠 지쳤다· 더는 감정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당신···· 방금 건 너무하는군요·”
클라이스는 그런 에테르가 지나치게 냉혈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스크롤을 다듬다 말고 에테르를 흘겨보았다·
“둘이 자매 아니었나요? 왜 그리 냉랭하게 대하시는 거죠?”
“뭐냐 갑자기·”
이곳에 해후하고 나서 그동안 빌빌 기기만 하던 그 클라이스가 로즈마리를 변호하다니·
간덩이가 부은 건지 동정심이 든 건지·
“예전에 저 아이한테 두들겨 맞았다고 하지 않았나? 남남이면서 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건지 모르겠군·”
“쓸데없는 참견은 아니에요· 가족이면··· 여동생이라면 소중하게 대하시라고요·”
“네가 뭘 아는데?”
“가족의 소중함이라면 당신보다 잘 알아요·”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씨불이기는· 그걸 아는 년이 예전에 나한테 그따위로 대해?”
“그 그건····”
클라이스가 꺼낼 말을 찾고자 우물거리는 사이 에테르는 이를 갈며 단언했다·
“다시 한번 얘기한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라·”
그 말에도 클라이스는 홍옥빛 눈동자로 에테르를 쏘아보았다· 간만에 보이는 독기 어린 눈빛이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표독스럽게 시선을 던지자 에테르의 머리에 핏기가 쭉 가셨다· 아무래도 교육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에테르는 가져온 비닐봉지를 들썩이며 무겁게 말했다·
“그 이상 나불대면 오늘 저녁은 없다·”
“···상관없어요·”
의외의 반응이다· 그러나 당황할 필욘 없었다·
몸은 말보다 솔직하니까·
에테르는 보란 듯이 봉지에서 방울토마토를 한 움큼 꺼내서 자기 입에 집어넣었다·
오물거리며 톡톡 튀는 방울토마토 소리에 클라이스의 침이 꼴깍 삼켜졌다·
청각적인 자극이 강해도 너무 강하다· 클라이스는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했다· 흔들림 하나 없던 동공도 좌우로 단진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오늘 저녁부턴 미음이나 빵조각 말고 새로운 걸 배급할 예정이었다·”
“뭐 뭔데요···?”
“완두콩과 양파를 넣고 숯불에 볶은 스테이크 요리와 시금치 키슈· 목 막힐 수 있으니까 우유는 따듯하게 덥혀서 내어 오고 오늘 성취가 있으면 후식으로 몽블랑이나 군만두를 줄 생각이었다·”
클라이스는 펜을 쥔 손을 미묘하게 떨었다·
이건 반칙이다·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요리뿐이었다· 그런 걸 오랜만에 맛보고 나면 좋든 싫든 잊지 못하게 될 터였다·
이러다간 진짜 큰일 날지도 모른다·
지금 반사적으로 방울토마토를 받아먹는 것처럼 나중 가면 음식에 조련돼서 식사 시간만 되어도 개처럼 침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스펠트 가문의 품위가 완전히 박살 나고 말겠지·
“저를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식사를····”
“열심히 한 만큼 돌려주려는 것뿐이다·”
“···당신 마수잖아요·”
“당연한 걸 묻는군·”
“왜 저한테 그렇게나 잘해 주려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호의호식한다는 게 이상하다·
물론 온종일 스크롤만 작성하고 있는 것이 인간다운 삶은 아니었지만 저쪽 철병팔진에서 피를 뽑히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포로들에 비하면 양반인 편이다· 아니 여긴 고문 환경치고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잘해 준다고? 본관이 너한테?”
소가 콧김을 내뿜는 것처럼 픽 하고 웃는 에테르·
“그래 넌 하나도 모르겠지·”
에테르는 방울토마토를 집어 사뿐하게 던졌다· 포물선 궤적을 그리는 토마토를 클라이스는 양손으로 착실하게 받아냈다·
클라이스는 잠시 눈치를 보았다·
“먹어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조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하스펠트 공작가의 자랑스러운 후계· 최소한의 품위는 지킬 필요가····
꼬르륵·
“읏····”
클라이스는 울분과 함께 방울토마토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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