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2
요르문간드의 숨이 거칠어진다·
“여의 육촌(六寸)은 바다에서 가장 강하다· 물속에 있었는데 질 리가 없단 말이다·”
처음에는 짙은 부정이었다·
요르문간드는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첫째는 자기 친척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그 동생에게 해를 입힌 대상이 상천이라는 점이었다·
“다들 똑바로 본 게 맞느냐? 여봐라! 근처에 있는 참모를 전부 소집하거라!”
요르문간드의 부탁대로 더 많은 금안족이 와서 영상을 보았지만 하나같이 아연실색하며 똑같은 사실을 고할 뿐이었다·
“흑주가····”
“···맞는 듯합니다 민천이시여·”
마왕군은 에테르가 개발한 원자폭탄을 흑주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요르문간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낸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지 창천· 네가 작전에 저 무기를 동원했다고 하였지· 그렇다면 저것이 상천이 쏜 흑주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조금 더 앞부분을 보도록·”
파스모는 또 다른 테이프를 올려놓고 영상을 재생했다·
폭탄이 터지기 전 기지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림자가 하나·
해상도를 높여 해당 부분을 확대하자 다른 참모에게도 익숙한 소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천 각하시다·”
“맞다·”
“상천께서 우릴 배신하셨어·”
영상 속 에테르는 홀로 기지에 들어가 폭탄을 설치하고 나왔다· 기지에 있던 마수 중 어느 누구도 그런 그녀를 견제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야 아군인 줄 알았을 테니까·
“상천의 흑주는 캐슬 브라보를 통해 떨어뜨려야 작동하지· 하지만 이전 시간대를 감아도 떨어지는 폭탄은 없었다· 제군들 내 말이 틀렸는가?”
“거짓 한 점 없으십니다·”
“좋다· 그렇다면 떨어뜨리는 것 말고 다른 기폭 방법이 있다는 뜻인데···· 제군들 해당 방법을 누가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나?”
대답 안 해도 뻔했다·
“개발자인 상천일 것입니다·”
“잘 말해주었다·”
요르문간드는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사실이었다·
“여의 얼마 남지 않은 친인척이 이렇게 세상을 떴다고···?”
비극이라는 단어도 못 붙일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요르문간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의 잇새에서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기폭제였다·
강물에 둑 터지듯 실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 년 넘게 살아온 고룡이 정말로 오랜만에 실실 쪼개기 시작했다·
울면서 웃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오랜만에 쌍소리가 튀어나오려던 무렵이었다·
“허나·”
한창 험악하던 분위기에 파스모가 입을 열었다·
“민천이여· 우리는 배신한 상천에게 복수할 수단을 얻었도다·”
그 말을 들은 요르문간드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앞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귀는 그 누구보다도 예민했기에·
때마침 저 멀리서 두 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창천 각하·”
“이번 원정의 결과물을 가져왔습니다·”
끼릭 끼릭·
커다란 외바퀴 수레에 들려있는 옥빛의 보석·
시야가 온통 어두컴컴한 요르문간드라도 두 마수가 가져온 보석이 어떤 물건인지는 단번에 알아챘다·
“설마 로드스톤···?”
“맞습니다·”
돌덩이 내부에서 웅웅거리는 영혼의 울림이 느껴진다·
마왕 파르켈수스·
그 남자가 내는 마력파의 파장이었다·
“이것으로 모든 로드스톤이 모였습니다· 말씀만 해주신다면 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창천 각하 다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는 구천지대계 3석과 5석·
창천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올라간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의식을 거행하고 싶었으나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민천은 어떻게 생각하나?”
바로 요르문간드의 의중을 묻는 것이었다·
마왕의 부활에 관한 건이니 당연히 그녀가 반대할 수는 없다· 반대는 곧 마왕군을 배반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
파스모는 요르문간드에게 다른 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마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복수를 해내고 싶은가?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주군이라도 이용할 수 있겠는가?
대의(大意)는 따르더라도 마왕에 대한 충성도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던 요르문간드였다·
애당초 자신이 속한 종족의 번영을 위하여 움직이던 민천이었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는 거침이 없었다·
“···좋다· 당장 제단을 쌓을 준비를 하라·”
“이제야 대화가 술술 풀리는군!”
파스모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구천지대계 3석인 빌헬름과 5석인 엔테로를 물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그런 생각에 자꾸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나머지 참모들도 볼일을 보거라·”
“예·”
요르문간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물린 파스모는 기다란 팔을 움직이며 허리춤에 걸린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콸콸콸·
아가리에 독주를 들이켠 뒤 한껏 불콰해진 얼굴로 요르문간드를 노려보는 파스모·
휘감은 붕대 사이로 드러난 그의 홍채가 호롱 불빛을 받아 창명하게 흔들렸다·
**
“뭐라?”
콰앙!
정령을 고문하던 호천(昊天) 길라흐는 직속 부하의 전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람의 로드스톤을 빼앗아 와? 언제?”
“그 조금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개새끼가─!!”
길라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하급 정령을 더욱더 갈가리 찢어놓은 길라흐는 이를 갈며 파스모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호천의 그런 태도를 부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좋은 일 아닙니까? 곧 마왕님께서 부활하십니다·”
“아니 아니요· 문제는 그게 아니죠·”
길라흐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파스모 그놈이 느긋하게 움직여도 된다고 말해 놓고 자기 혼자서 일을 벌인 것입니다· 부활하실 마왕님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계획을 같이 세우자던 창천 놈이 멋대로 일을 벌이고 공적을 가로채 갔다·
쉽게 말해 ‘뒤통수’였다·
에테르가 세계수를 불태우면 단물만 쪽 빼먹고 버리려던 길라흐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래서야 자신은 정령만 가지고 놀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억울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려던 참이었다·
“각하 아직 괜찮습니다·”
“···음?”
기둥 너머로 까마귀 부리 가면을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3미터에서 5미터 사이로 보였으며 싯누런 눈동자와 기다란 팔을 지닌 마수·
“5석인가요?”
“그렇습니다·”
구천지대계 5석 ‘역병’의 엔테로 콜리티카·
제국에서 흑사병 사태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절멸급 마수가 길라흐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당신은 이번에 창천의 명을 따라 움직였던 걸로 아는데요·”
“상관께서 명을 내리시는데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요·”
엔테로는 부리 가면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존경하시는 분은 오직 호천 각하뿐입니다·”
“호오·”
엔테로와 길라흐는 공통점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무분별한 살육을 즐긴다는 것· 전염병을 퍼뜨리길 좋아하는 자신은 예로부터 가학성 높은 자를 공경했다· 엔테로는 그리 말하면서 지지 이유를 정당화했다·
이야기를 들은 길라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록 바람의 로드스톤은 창천의 공이나 땅의 로드스톤은 과거에 제가 직접 주도하여 빼앗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래전부터 호천 각하가 마왕님의 총애를 가장 받을 가치가 있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흐음·”
“그래서 그 공을 호천 각하께 헌상하고 싶사온데····”
“흐흐흐·”
길라흐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간다·
그는 화를 내던 것도 멈추고 엔테로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갈고리가 된 팔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다·
엔테로의 손도 철조(鐵爪)처럼 생겼기에 악수를 나누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충신이로군요· 흐하하하!”
길라흐는 자랑스럽다는 듯 엔테로의 허리를 툭툭 두들겼다· 원래 어깨를 두들기고자 했지만 키 차이가 나는 탓이다·
눈매를 샐긋 비틀어 올린 엔테로가 본격적인 말을 꺼냈다·
“창천께서 바람을 가지셨다 하시면 호천께서는 땅을 가지셨다 하십시오· 무릇 귀를 간질이는 바람보다는 딛고 있을 국토가 소중한 법이니 주군을 위하여 땅을 헌상하였다고 비유하시되 상찬을 받으실 기회를 챙기십시오·”
논지를 흐리는 말을 권한 것이었지만 길라흐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마왕님께선 예술적인 표현을 아주 좋아하시니까·
“확실히 그건 달변이로군요· 혹시 또 하실 말씀 있습니까?”
“예 각하·”
엔테로는 말을 이었다·
“또한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의 일이라니?”
“과거란 엎질러진 물과 같아 한 번 지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다릅니다· 호천 각하께서는 정령을 제압하는 데 사천 중 으뜸이시니 정령과의 원한이 깊은 마왕님께선 어쩔 수 없이 각하에게 가장 많은 전공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닥쳐올 전투를 위해서라도 이것저것 준비를 해 두십시오· 엔테로는 그리 덧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별다른 탈 없이 전쟁에서 공을 올리신다면 후계는 각하의 것입니다·”
“흐하하하하!! 과연 그 말이 옳습니다!”
길라흐는 물개박수를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확실히 민천은 멍청하고 창천은 지나치게 몸을 사리지요· 둘 다 전쟁과는 한 발짝 떨어진 연놈이란 말입니다·”
“예· 그러니 제가 안목을 각하에게 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엔테로도 길라흐를 따라 실실 웃었다·
“우선 식을 보셔야지요· 마왕님의 부활을 경하드리러 갑시다·”
“그래요· 그러지요·”
길라흐가 앞서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엔테로가 천천히 뒤따랐다·
엔테로의 눈빛이 현묘하게 일렁였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