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3
제단을 쌓는 것은 중노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철근을 조립하고 용접하는 과정· 철로 된 방벽을 쌓고 옥좌를 정상에 올려놓는 과정·
바나듐으로 된 드럼통에 로드스톤 네 개를 놓고 마법진을 그리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군의 모든 인원은 싫어하는 기색 없이 제단을 완성했다·
의식이 시작되기 전 부하 한 명이 물었다·
“각하 마왕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보면 알게 될 겁니다·”
길라흐는 오랜만에 평범한 미소를 지었다·
제아무리 교만한 그라도 마왕 앞에선 비릿하게 웃을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다·
“마왕님께선 우리 금안의 희망이라·”
의아해하는 후임들을 위해 파스모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분께선 차별과 기아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금(金)으로 된 동아줄을 내려주셨다·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자라도 마땅히 공경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신참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군은 크게 두 세대로 나뉜다·
마왕의 얼굴을 본 고참과 그렇지 않은 신참들·
신참들이 본 적도 없는 마왕을 따르는 이유는 금안인 그들이 자유롭게 살 만한 곳이 이곳 마왕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시작하지·”
탁·
마법진 구축을 끝낸 요르문간드가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물러나고 제단 위로 파스모가 올라갔다·
파스모는 하나씩 로드스톤에 마력을 불어넣고는 기조 연설을 시작했다·
“전기(電氣)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시절· 여신은 한순간의 설계 실수로 우리 종족을 전부 결함품으로 만들었다·”
모두의 귀가 한곳으로 집중된다·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제단을 거니는 파스모·
“교만한 인간과 엘프는 우리를 학대하고 박해했다· 수많은 동족을 노예로 만들어 노리개처럼 부렸다·”
그 얼굴에 보이는 것은 일말의 슬픔 그리고 분노·
“그러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수인과 같이 땅에 묻었노라·”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말· 금안족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비애· 오죽하면 길라흐조차도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였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그렇게 고통받아왔다· 나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상놈과 몸종 취급을 받아왔다·”
인간 엘프 수인 드워프·
기존의 종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으니·
“허나·”
파스모가 말을 잇는다·
“마왕님께서 우리를 금안족이라 칭하신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우리는 더는 미천하지 않게 되었으며 대륙의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보라! 그 교만했던 인간과 엘프놈들이 지금 우리를 무엇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마수·
정체를 숨긴 금안들은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전계마도를 막 깨우친 그들이 만들어낸 전쟁 병기들이 상상 이상으로 괴이했기에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 그리 불리는 것이다·
오죽하면 기계 무리를 본 종말론자들은 어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제 우리는 전계의 창시자이자 우리의 구원자이며 유토피아를 몰고 오실 은인을 직접 만나 뵙고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우우우웅·
연설이 끝나자마자 진동하기 시작하는 봉인석들·
“오오·”
통에 담긴 네 개의 로드스톤이 공명하기 시작하더니 영롱하게 빛나며 웅혼한 패기를 내뿜는다·
그 광경이 너무나 신성해서·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절했고 또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이비 종교와도 같았다·
강력한 기운을 느낀 각 사천은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셨도다·”
주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텅 빈 옥좌·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제단에 마련되어있던 의자 위로 어둑하게 빛나는 물체가 내려앉는다·
그것은 어스름이었다·
해 뜰 녘의 거미인가 해 질 녘의 그늘인가·
마왕군에겐 전자가 다른 종족에겐 후자가 될 존재의 현현이었다·
“마왕이시여·”
파스모가 더욱 고개를 조아린다·
“금안의 정당한 지도자를 뵙습니다·”
“····”
옥좌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전부 덮는 자줏빛 로브를 두르고 있었으며 어둑한 얼굴 사이로는 수십 줄기의 노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인간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외형이었다·
“···짐이 오랜 잠에 빠진 지 1천 년 하고도 69년이 더 흘렀으니·”
남자가 무겁게 입을 뗀다·
“오늘 깨어나 거사를 벌이기 참으로 적절한 시기이니라·”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에선 군중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사천들은 더욱더 고개를 조아렸다·
마왕 파스켈수스·
이 자에겐 그럴 만한 능력과 권세가 있었다·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던 마왕은 느긋한 투로 입을 열었다·
“창천 보기보다 끼가 늘었구나· 호천은 변함없이 정령을 좋아하는 듯하고· 민천은 가족이라도 잃은 듯한 표정이라·”
마왕의 말에 각 사천이 어깨를 움찔거린다·
“그런데 상천은 어디로 갔는가?”
드드드드·
마왕성 전체가 좌우로 흔들린다·
“창천이 말해보거라·”
“예 주군· 상천께선 주군께서 잠들어 계신 사이에 정령족과 손을 잡고 우리를 배신하였습니다·”
파스모는 눈치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마왕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알 듯했다·
“계속하라·”
“해서 민천의 육촌을 참살하고 동지들을 엘프에게 팔아넘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기회가 주어지자 술술 불기 시작하는 파스모·
그런 파스모를 막을 자는 없었다·
길라흐는 상천이 어찌 되든 상관없었고 요르문간드는 해룡의 일로 인해 동요하는 중이었다·
나머지 마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에테르를 따르던 마수들은 이미 축출되거나 마왕성을 떠났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톡 톡 톡·
마왕은 철사 같은 손톱으로 옥좌를 두들기며 코웃음을 쳤다·
“다른 놈도 아니고·”
벌떡·
“그 상천이?”
마왕의 어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곧 터질 것이라는 걸·
“다른 놈도 아니고 짐을 총애한다고 말하던 그 머리 검은 계집애가· 짐이 2인자로 꼽아 두었는데 감히 투항을 해?”
“그렇사옵니다·”
“돌아오자마자 계획이 무너지는구나·”
마왕은 우드득 하고 목을 꺾었다· 그러면서 애통하다는 듯이 가슴팍을 두들겼다·
“상천이 없으면 이 전쟁은 진 것이나 마찬가지로다·”
“···?”
예상과는 다른 마왕의 태도에 파스모와 길라흐는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쩌적!
그사이에 마왕은 옥좌를 들어서 박살을 냈다·
철로 된 거대한 의자가 색종이 접듯이 접힌다· 그 모습을 본 하급 마수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주춤거렸다·
그러나 충격적인 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으적·
마왕은 구겨진 옥좌를 얼굴에 꾸역꾸역 넣기 시작했다·
“···!”
물리법칙에 반(反)하는 기현상에 사천을 제외한 나머지 마수들은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파스모는 정황상 저것이 어떤 행동인지 알고 있었다·
‘일부러 저러시는군·’
거짓으로 화를 내고 계시다·
막 부활한 참이니 신참인 마수들에게 영향력을 보여주려는 것이겠지·
자신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또 얼마나 기이하고 뒤틀린 존재인지· 제 이능을 과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그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 파스모조차도 손이 덜덜 떨려왔다·
꿀꺽·
옥좌를 말 그대로 ‘흡입’한 마왕은 조금 전보다 부피가 늘어난 것 같았다·
파스모는 일련의 계산을 거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왕이 가장 바라고 있을 제안을 시도했다·
“주군이시여 상천은 은총을 모르는 년입니다· 속히 엘프국을 침공하여 목을 치심이 어떨지·”
“음·”
예상대로 반응은 좋았다·
“다른 이는 어찌 생각하는지 말하라·”
“저야 마왕님의 뜻대로 할 것입니다·”
“····”
길라흐는 최선의 답변을 내놓았고 요르문간드는 침묵했다·
“민천· 의견을 내지 않으면 목소리만 작아질 뿐이다·”
“···이견 없습니다·”
군내 목소리가 작아지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을 테지· 요르문간드는 지금 자기 감정을 추스르기도 바쁠 테니까·
“좋다· 분노는 가장 무용한 감정이지· 지금 상천의 배신 소식에 화를 내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심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왕은 요르문간드에게 나름 도움이 되는 조언을 읊어주었다·
“중요한 건 과거를 반사하여 미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 치하를 먼저 하자꾸나· 누가 짐의 부활에 공을 세웠는가?”
올 것이 왔다·
파스모는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충성심을 표했다·
“세계수에 잠들어 있던 공(空)의 로드스톤은 제가 가져왔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머지는?”
길라흐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발언권을 얻었다·
“땅의 로드스톤은 저의 공덕입니다·”
“호오· 그 또한 훌륭하도다·”
“예 더불어····”
길라흐는 조금 전 엔테로가 했던 충고를 착실히 이행했다·
여기에 약간의 살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고·
“그렇군·”
길라흐의 시적인 표현에 마왕은 흡족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과 물은 누가 가져왔는지 말해보거라· 짐이 친히 두 사천과 함께 포상을 내리겠도다·”
“····”
그러나 두 로드스톤에 대해선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선 파스모와 길라흐는 아니었다· 둘이 봉인되어 있던 곳이 각각 불과 물의 로드스톤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게·
– 누가 가져왔지?
– 민천이신가?
마수들이 쑥덕거렸다·
“빨리 말하거라· 누가 공을 세웠는가?”
파스모도 길라흐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로즈마리 타르케닐입니다·”
민천 요르문간드·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발언했다·
“로즈마리? 처음 듣는구나·”
“타르케닐 왕국의 마지막 왕녀였습니다· 마왕께서 도중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흠·”
전혀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매만지는 마왕·
“그 로즈마리라는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아이는 상천의 심복입니다· 지금 이곳엔 없습니다·”
“상천을 따라 투항했다는 말이로군·”
“····”
“···결국 민천과 상천은 한 것이 없고 상은 창천과 호천에게만 내려야 한다는 뜻이렷다·”
장탄식한 마왕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첫째 너희 둘에겐 포상을 내리마· 그리고 둘째 그 전에 배신자를 처단하겠도다·”
“그렇다면····”
“군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다·”
파스모와 길라흐의 눈에 기대감이 깃들었다·
“창천·”
“예 주군·”
“자네를 육군총사령에 임명하마· 그대는 짐과 함께 엘랑카야를 넘어 그 너머에 있는 나라들을 차례로 궤멸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전면전을 펼치는구나·
“민천·”
“네 주군·”
“자네를 공군총사령으로 임관한다· 수인족을 규합하여 피치블렌드의 서쪽부터 남쪽 티림스 강까지를 우선으로 제압하라· 이후 창천과 합류하여 카우렐리아의 북서부로부터 엘프들을 압박할 것이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길라흐는 안달이 난 표정을 최대한 숨기며 명령을 기다렸다·
이다음은 틀림없이 자신이니라·
“호천·”
그리 기대하던 길라흐가 눈을 부릅떴을 무렵이었다·
“이리 나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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