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서둘러라·”
단호한 명령과 함께 산을 오르는 수십의 말발굽의 소리가 들려왔다·
중갑을 입은 기사부터·
견갑을 찬 기사까지·
히스타니아를 상징하는 사자문양의 깃발이 산 중턱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로웬은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막강한 적과 싸우는 일도 아니다·
마왕 군과 싸우는 일도 아니었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 보다 로웬의 입술은 바짝 타들어 갔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아버지께서도 막내가 겁이 많은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겁쟁이는 자기 목숨을 걸 정도의 도전을 할 성격이 아닙니다·”
첫째의 비아냥이 섞인 위로와·
“맞아요· 지난번처럼 여관에 숨어있다가 돌아올 거라니까요· 분명 저택으로 복귀할 때쯤이면 자기 방에 콕 박혀 있을걸요?”
둘째의 짜증 섞인 맞장구가 들려왔지만 로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이렇게 죽기는 싫어요·
지금 로웬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오직 한가지· 푸른 창이 보여준 막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환각을 본 거겠지·’
막내딸이 오크에게 처참하게 죽는 모습·
피에 젖은 손으로 검을 들고 아비를 찾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환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었고 자신을 찾는 딸의 목소리도 또렸하게 들렸었다·
한나가 죽다니 말도 안 되지 않는가· 히스타니아 가문의 딸이 고작 오크한테···?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로웬은 고개를 크게 젖고는 잡념을 떨쳐냈다·
‘첫째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런 거겠지· 상황이 겹쳐서 이상한 생각이 든 거야’
‘요즘 과로를 너무 해서 그런가·’
‘둘째의 말처럼 막내는 겁이 많으니까· 집에 가면 분명히 있을 거다· 돌아가면 반드시 검을 그만두게 해야겠어·’
오만가지 핑계가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로웬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본 환각은 단순한 피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왜 그런 게 보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딸에게 모질게 대했던 벌일까 아니면 예언가들이 꾸는 예지몽이라도 꾼 걸까·
확실한 건 환각이나 마법 따위에 걸린 것이 아닌 실제 기억과 같은 거였다·
육체에 정점을 찍은 소드 마스터가 정신계 마법에 당한 다라·
걸릴 수도 없고 걸릴 방법도 없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지금 제국에는 마법사로 가득 찼겠지
‘단순한 기우일 뿐이다·’
로웬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막내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단지 다른 자식들에 비해 눈길이 가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 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비는 이것보다 더 심했으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후회가 드는 건 왜일까· 만약에 막내딸이 죽는다면 푸른 창이 보여줬던 환각처럼 오크의 대검에 숨이 멎는 순간까지 자신을 찾으며 외롭게 죽어갔다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딸아이를 본다면 과연 자신은 어떻게 될까·
히스타니아의 이름을 실추시킨 딸에게 화를 낼까· 아니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을까·
로웬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자신이 딸 아이의 시신을 꼭 끌어안고 울고 있는 연약한 모습이 뒤늦게 후회하는 모습도 상상하기 싫었다· 꼴불견이지 않나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후회하는 모습이· 그럴 거면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기사라면·
적어도 기사라면 죽음이 항상 가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정지··정지!”
선발대에 선 기사 한 명이 우거진 수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달려오는 무리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고 말하는 여기사·
“시체가 있습니다·”
여기사의 시선이 가리킨 수풀 사이에는 차갑게 식은 시체 한 구가 있었다·
순간 로웬의 심장은 멈추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손에 쥔 고삐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수풀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손·
기다란 머리카락과 1m 정도 돼 보이는 검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했다·
로웬은 빠르게 말에서 내렸다·
‘아니다·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아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우습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기사단장이란 사람이 표정 관리도 안 하고 말에서 내린 다라·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런 사소한 것을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로웬은 오로지 수풀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기사는 쪼그려 앉아 시체를 살폈고·
곧이어 손에서 작은 명패가 들려졌다·
로웬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
‘제발·’
‘아니어야 한다·’
‘그딴 건 환상에 불가하니까· 겁 먹지 마라· 로웬·’
순간 로웬은 자신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오빠랑 아버지가 이야기할 때 엿듣길 잘했어· 아버지가 어릴 적에 하멜 산맥에서 오크를 잡으면서 실력을 늘렸다고 했으니까····
첫째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주워들은 한나가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산을 오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아···아아버지라면 이 정도는 겁먹지 않고 싸웠을 거야· 분명 잡고 나면 아버지가 칭찬해줄지도 몰라·
자신보다 4배는 큰 오크를 향해 검을 들고 떨고 있는 모습까지·
로웬의 눈은 질끈 감겼다·
‘신이시여 제발····’
자신이 신을 찾는 날이 올 줄이야·
교황이 자신을 보면 웃을 거다·
얼굴이 뭉개진 신체를 뒤지던 기사는 손에 모험가 패를 들고 말했다·
“나이는 51세· A급 모험가입니다·”
로웬의 파랗게 질렸던 안색은 차츰 온기를 찾아갔다·
“지금부터 나는 혼자 움직이도록 한다· 기사단들은 5조로 찢어져서 오크 군락 위주로 탐색을 진행하도록·”
“예!”
우렁찬 기사단의 대답을 끝으로 로웬은 차갑게 말했다·
“서두르도록·”
***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하멜 산맥의 정상에 있는 오크 군락지· 그곳에는 분홍색 돗자리가 가지런하게 깔려있었다·
피크닉에 온 것처럼 샌드위치와 감자 샐러드를 차려놓고 녹차를 따르고 있는 한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걸 제가 어떻게 해요!”
“간단합니다· 경동맥을 향해 휙 하고 검을 휘두르면 풀썩하고 쓰러집니다· 쉽죠?”
“집사님이라서 가능한 거잖아요·”
“아니요· 한나 씨도 가능할걸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나에게 말했다·
“아마도?”
돗자리 주변에는 오크의 시신이 난잡하게 깔려있었다·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소문난 적색 오크의 시체는 물론이고 오크 전사의 시체도 몸뚱이와 목이 사이좋게 분리되어 세상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제 한나가 보여줄 차례·
나는 기대를 한껏 안고 한나를 바라봤다·
“이 정도는 가능하겠죠?”
“어떻게 가능해요!”
우린 산의 정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트라는 수식어가 붙은 몬스터는 비싼 값을 자랑하는 희귀 몬스터다·
같은 이름의 몬스터라도 엘리트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3배에서 4배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지·
원작에서 미하일이 엘리트 몬스터한테 자주 밟히고 다녀서 서식지의 특징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첫째로 엘리트 몬스터는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아야 한다·
엘리트 몬스터의 부속은 비싸기 때문에 모험가의 손이 많이 타고 희귀종이기 때문에 고립된 지역에서 주로 무리를 이루고 서식하지·
때문에 한나와 나는 사람이 안 다닐 법한 산 정상에 자리를 잡은 거고 제법 많은 엘리트 오크의 서식지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생각 이상으로 엘리트 오크가 많아서 문제기도 했다·
‘시체가 너무 많네·’
주변에는 모험가의 시체가 탑을 이룰 정도로 쌓여있었다· 좋은 장비를 하고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배테랑 모험가들의 시체가 비정상적으로 주변에 깔려있었다·
중간중간 오크의 소행이 아닌 사람이 한 짓도 보이기도 했지만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한나의 성장이 중요하니까·
괜찮은 오크 한 마리를 도륙하며 공략을 보여주자 한나는 한숨과 함께 내 자세를 하나하나씩 뜯어보고 있었다·
좋은 자세였다·
“그동안 썰어본 오크 대가리가 몇 개인데 겁을 먹고 그럽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일반 오크였잖아요··· 이번에 엘리트 오크는 처음 잡아본다고요·”
“괜찮습니다·”
나는 한나를 믿는다·
내가 지키고 있고 한나의 실력이라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오크는 둔하다·
무거운 대검을 들고 강력한 한방만 노리는 녀석들이지· 그에 반에 한나는 날렵하고 빠르다·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 한나는 피하고 반격까지 할 수 있는 충분한 민첩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아마 모르겠지만 나는 한나의 재능이 민첩이라고 확신했다·
원작에서는 오크에게 치명상을 줄 만큼의 근력이 부족해서 실패했겠지만 지금은 다르겠지·
한나는 자신의 무릎을 지지하며 일어섰다·
“그래요· 그까짓 거 한번 해보죠· 무슨 일 생기면 집사님이 도와주실 거죠?”
“물론이죠·”
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도와주면 되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산기슭 끝에 보이는 거대한 오크를 향해 돌멩이를 들었다·
“어라? 왜 그쪽으로 손을 뻗어요···? 저기 작은 오크 있잖아요·”
거대한 오크를 향해 손을 뻗자 어색하게 웃는 한나와 눈이 맞은 나는 그녀를 향해 아가씨에게 배운 도발적인 미소를 보여줬다·
이왕 할 거면 강한 놈으로 해야지·
“자· 준비하시고·”
“아니· 집사님 잠시만요?”
“쏘세요!”
-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오크의 비명·
-우오오오오오오오!!!
나는 재빨리 한나의 뒤에 숨었다·
“화이팅!”
응원도 잊지 않았다·
“이 씨발··!”
나는 한나가 그렇게 욕을 잘하는지 처음 알았다·
***
한나는 성공적으로 오크를 잡아냈다·
치명상도 입지 않았고·
가벼운 자상만 입은 채 훌륭하게 전투를 끝냈다·
“고생하셨어요·”
“알아요· 고생한 거·”
뻔뻔해지는 게 나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역시 겸손하면 아무도 안 알아준다니까·
대견한 그녀에게 물병을 건네줬다·
“완벽했습니다· 특히 옆구리 사이를 파고들어서 급소를 노린 점 정말 대단했어요·”
“정말요?”
“네· 물론 조금만 늦었으면 여신님과 소개팅 할 뻔했지만요·”
“칫···· 그리고요?”
“네?”
한나는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다는 듯이 나를 힐끗 보고는 휙 하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그 나이 때 소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없어요? 오··오늘 칭찬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풉·”
“왜 웃어요!”
“그냥요·”
아직 칭찬이 부족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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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단명하는 비운의 엑스트라 ‘한나’]
1· 자존감을 올려주는 칭찬하기·
(9/10)
2· ‘호감도 40’ 이상으로 만들기·
[호감도: 51]
3· ‘엘리트 오크 검사’ 처치하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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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를 잡고 칭찬해주면 퀘스트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해줬던 칭찬에 내성이 생긴 모양인가·
칭찬하는 게 힘든 것도 아니고 오늘은 정말 잘하기도 했으니까· 아끼지 말아야지·
단지·
불청객이 없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여기 손님이 오셨네요?”
사마귀처럼 생긴 남자가 나무 뒤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기척을 숨긴 상태로 우리를 관찰하다가 한나가 리타이어 된 것을 확인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 같다·
그는 한나와 나를 보고 실실 쪼개고 있었다·
허리춤에 맨 단검·
당랑권이 어울릴 법한 관상과·
친해지면 뒤통수를 때릴 것 같은 비호감 3종 세트가 모인 남자·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산적이었다·
단지·
좀 많이 나쁜 산적이라는 게 흠이지만·
산적의 옷에는 모험가 패가 가득하게 붙어있었다· 수집품이라도 된 듯 자신이 입은 갑주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꼴이 상당히 아니 꼬았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나를 모르겠지만·
저렇게 비호감 인상에 요상한 복장을 하고 다닐 사람은 소설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모험가 사냥꾼·
소설 중반에 수많은 모험가를 사냥하고 이교도에 들어가 광기의 대주교가 되는 악역이었다·
까다로운 마법과·
특별한 흑마법을 사용해서 루인에게 큰 상처를 입힌 나름 강자였다·
‘이래서 모험가의 시체가 비정상적으로 많았구나· 충분히 엘리트 오크를 잡을 수 있는 실력자들인 것 같았는데 말이지·’
중간중간에 바닥에 보이는 검은 마법진도 그렇고 실실 웃고 있는 사마귀도 그렇고·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우와· 악당이다·”
실실 쪼게는 사마귀·
나는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나도 악당인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reader님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작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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