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
한적한 주방·
화려한 손기술로 파프리카를 썰고 있던 나는· 챙그랑 소리와 함께 식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짜증이 담긴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 또 이러네·”
파프리카를 잡고 있었던 왼손을 봤다·
작은 상처 없이 멀쩡한 왼손·
다행히 파프리카를 잡고 있던 왼손은 다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엇나갔으면 크게 다칠 뻔했는데 다섯 손가락이 멀쩡하게 붙어있는 왼손에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왼손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는 문제의 오른손을 봤다·
작게 떨리는 오른손·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오른손이 눈치 없게 말을 안 듣는 때가·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오른손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흑염룡이니 또 다른 자아가 숨어 있다던가 이런 게 아니라· 손끝부터 시작해서 오른팔 전체가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달달 떨고 있는 오른손을 봤다· 주먹을 쥐기 위해 손가락에 아무리 힘을 줘봐도 꿈쩍도 안 하는 오른손·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쉽지 않네·”
흑마법에 실패한 아가씨를 구할 때 생긴 후유증인데 좀처럼 낫지 않았다·
가끔 통증이 몰려오기도 했고·
진짜 심한 날에는 팔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있기도 했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고·
흑마법 내성도 올리고 좋은 거니까·
[‘흑마법 내성’이 ‘괴사’를 억제합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쓰읍···’
그런데·
오늘은 유독 아프네·
“미친·”
나는 쓰러지듯 주방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떨리는 오른손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자· 통증이 그나마 덜했다·
아팠다· 어떤 말로 표현할까·
벌레가 살을 파먹는 듯한 통증?
이게 딱 맞는 표현인 것 같다·
까득· 이를 꽉 물었다·
혹시나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까 싶어서 숨을 꾹 참고 아픔이 가시길 기다렸다·
수십 번을 참아본 통증이지만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몸이 달달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마른다·
“후으아·· 참자···· 참자·”
큰소리를 지르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2층에 있는 아가씨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진짜 별거 아니니까·
아주 조금 아프긴 한데·
충분히 참을 수 있는 고통이라· 괜찮다·
***
식사를 준비하고 올라온 2층의 아가씨의 방·
나는 새까맣게 타버린 스테이크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이게 뭐야?”
아가씨는 내게 물었다·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모양·
그게 그럴 게 스테이크는 고기의 의무를 잊어버리고 나무가 된 건지 새까만 숯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주방 구석에 박혀있느라 불 위에 고기를 올려둔 걸 새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아쉽게도 여분의 고기가 없어서 이거라도 조심스럽게 가져왔다·
아가씨는 내게 물었다·
“숯?”
뒤통수를 어색하게 긁었다· 평소에 밥만 잘 차려주던 집사가 사람이 먹지도 못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지금 시간이 오후 9시인데 말이지·
배가 고플 대로 고픈 아가씨에게 이런 돌맹이를 줘서 죄송했지만 여분의 고기가 없던 탓에 다시 만들어 올수도 없었다·
나는 죄송함을 담아 말했다·
“오늘 저녁입니다·”
“오···?”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를 띄우는 아가씨·
“저녁?”
비극적인 상황을 이해한 건지 아가씨는 머리에 느낌표를 띄우고 말했다·
“아하· 육포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소 갈빗살로 만든 스테이크입니다·”
“오···”
아가씨는 접시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킁킁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
“흐음·”
턱을 한 번 쓸고·
진지하게 한 번 생각을 한 뒤·
-콕·
손가락으로 찍어서 핥아보고·
-서걱·
작게 쓸어서 입으로 음미했다·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이 나온 모양·
어느 때 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아가씨는 다시 한번 내게 말했다·
“···저녁?”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지그시·
아가씨는 다시 접시를 바라봤다·
먹을 수 있는 부위가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
아가씨는 말했다·
“이거 먹으면 죽어·”
“안 죽습니다· 오붓하게 독버섯 수프를 먹은 적도 있는데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건 예뻤잖아·”
“이것도 자세히 보면 예쁩니다·”
나는 숯보다 새까맣게 탄 고기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이프로 열심히 발굴하다 보면 먹을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파프리카와 브로콜리는 타지 않았으니까· 먹을 게 없으면 이거라도 먹으면 됐다·
아가씨는 재차 말했다·
“먹으면 죽어·”
“안 죽습니다·”
“죽는다고·”
“그럼 어쩔 수 없군요·”
한숨을 쉬는 모습에 아가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사람인지라 요리를 실수할 때가 있는 데 이럴 때마다 나는 아가씨가 좋아하는 케이크나 번화가에서 음식을 포장해 주곤 했다·
그것을 아는 아가씨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고·
“초콜릿 케이크?”
“에이 설마요?”
“그럼?”
나는 아가씨의 강렬한 기대에 화답하든 신선한 파프리카를 포크로 찍었다·
-푸식·
순간 아가씨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파프리카는 왜?”
“신선하고 맛있는 거잖아요·”
“그게?”
“네·”
차라리 숯 검댕이가 된 고기를 먹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는 아가씨였다·
“아· 하세요·”
휙· 아가씨는 격렬하게 고개를 돌렸다·
“싫어·”
포크를 들어 ‘휘이잉~ 비행기 날아간다·’ 소리와 함께 파프리카 1호기를 이륙시켰다· 목적지는 아가씨의 입속·
“싫어·”
이번엔 입을 꾹 닫고 식사를 거부하는 아가씨· 새초롬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 싶었다·
꼬마들한테 비행기 날아간다고 하면 어지간해서 먹던데· 이세계에는 비행기가 없어서 안 통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럼 이번에 이세계에 있는 걸 말하면 다르지 않을까·
공감대를 파악하고 2호기를 출발시켰다·
“휘이잉~ 드래곤 날아갑니다!”
툭· 아가씨는 작은 손짓으로 드래곤 2호기를 격추시켰다· 한순간에 드래곤슬레이어가 된 아가씨·
아가씨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악한 드래곤을 잡았어·”
“오···!”
나는 바닥에 힘없이 추락한 드래곤 2호기를 봤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장렬히 전사해버린 파프리카가 불쌍해졌다·
아가씨는 불시착한 파프리카를 보며 말했다·
“나는 드래곤학살자·”
‘힛’ 비웃음으로 잔꾀를 간파해낸 아가씨· 이제 이런 잔꾀는 안 통한다 이 말인가····
나는 새로운 포크를 꺼냈다·
이럴 줄 알고 수십 개의 포크를 준비했으니까·
“편식은 나쁜 겁니다·”
“괜찮아· 그건 사악한 파프리카 드래곤이었어·”
“파프리카는 사악한 드래곤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가씨의 건강을 지켜주는 선량한 드래곤이죠·”
“아니야· 사악해·”
아가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맛이 없잖아·”
아가씨는 파프리카를 혐오했다·
특유의 비린 맛이 싫다고 하시는데 왜 싫어하시는지 모르겠다·
아삭아삭하니 맛있기만····
사실 나도 싫어한다·
나는 아가씨의 입에 잔반처리를 위한 목적으로 3호기를 출발시켰다·
“아· 하세요·”
“거절·”
“저도 거절하겠습니다·”
아가씨의 입에 욱여넣었다·
“으엑·”
“뱉으면 안 됩니다·”
“왜?”
“파프리카는 건강하니까요·”
“내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데·”
“그건 파프리카가 알아서 해줄 겁니다·”
씹지 않고 뱉어내려는 아가씨· 나는 아가씨의 턱을 잡고 우걱우걱 씹게 만들어줬다·
아가씨의 냥펀치가 날라오긴 했지만 아프지 않아서 괜찮았다·
꿀꺽· 파프리카를 삼킨 아가씨는 포크를 들었다·
던지기 위해 들었다고 착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접시에 있는 파프리카와 브로콜리로 꼬치를 만드는 중이었다·
콕·콕·콕·
생각보다 입에 맞나?
3호기로 입맛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아·”
아가씨는 나를 향해 포크를 내밀었다·
“리카르도도 이거 먹어·”
“주시는 건 감사한 데·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차가운 눈으로 내게 말했다·
“건강해야지·”
“저는 건강합니다만·”
“더 건강해·”
“그렇다고 파프리카만 주는 건 학대 아닙니까· 이거 집사 인권 위원회에 신고해야겠습니다·”
아가씨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런 게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포크를 던지는 아가씨였다·
작은 공방을 마치고 아가씨에게 초코케이크 주는 거로 식사를 마친 우리였다·
***
아가씨는 하품하며 노곤하게 누워있었다· 나는 아가씨의 침대 맡에 앉아서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씨·”
“응?”
“저 내일부터 휴가인 거 아십니까?”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휴가를 인지하고 있는 모양·
까먹은 것 같아서 말해봤는데 기억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번에 던전에 가서 비싼 것들을 많이 가져와야 할 텐데· 걱정과 기대감이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다·
아가씨는 내게 말했다·
“잘 다녀와야 해·”
“네·”
“내가 말했지? 나쁜 사람 조심하고 맛있는 거 사준다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잘 알고 있죠·”
아가씨는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혼자서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모양·
서로 걱정하는 건 똑같은 모양이다·
“그리고 있지·”
아가씨는 내 손을 잡았다·
어딘가 애달픈 눈으로 내 손을 바라보는 아가씨· 손등을 쓸어내리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가씨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으····”
한 번 더듬고 아가씨는 말했다·
“휴가 돌아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물어보고 싶은 거 말입니까?”
“응”
아가씨는 주먹을 꼭 쥐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걸 물어보려는 모양· 여자친구 있었냐고 물어볼 생각인가· 그런 거면 지금 물어봐도 되는데·
전생도 현생도 모솔이니까·
나는 아가씨에게 말했다·
“지금 물어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마음의 준비요?”
아가씨는 허공을 보며 말했다·
“응· 아직 덜 됐어·”
***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저택에 남아계신 아가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하녀님께 넉넉하게 보너스를 챙겨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말씀드렸다·
제일 중점적으로 말한 게·
초콜릿은 하루에 한 개·
이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녀님과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곧바로 출발했고· 지금 하멜 산맥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넓은 경관이 탁 트이는 정상·
산뜻한 공기가 가슴을 뻥 뚫리게 했고 차가운 공기가 머리카락을 흩날리니 휴가를 나왔다는 기분을 느꼈다·
빨리 털고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던전의 입구를 찾아 들어가려는 순간·
“이게 누구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reader님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작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수면의 요정 혼내주고 왔습니다!
후원 감사 인사는 다음 회차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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