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오늘도 평화로운 저택·
열이 내린 악녀님을 유기하고 농땡이를 쳐보려고 했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셨다·
‘한동안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싸구려 녹차를 우리면서 나는 테이블에 앉은 두 남녀를 봤다·
깔끔한 하얀색 바탕에 황금색 자수가 인상적인 디자인·
1년 전 내가 입던 교복과 같았다·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는 여자와 껄렁거리며 이곳저곳을 눈으로 탐색하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
그 둘은 내가 탁자에 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 씨라고 하셨죠?”
나는 시장에서 1실링을 주고 산 녹차를 손님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흡· 냄새만으로 싸구려 녹차인 것을 알아본 걸까· 녹차를 보자마자 왈칵 표정이 일그러지는 한나·
보는 내가 기분이 다 나빠졌다·
먹어보지도 않고 저러는 건 너무 하지 않나· 나름대로 정성을 담았는데·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실실 쪼개고 있는 연두 머리도 상당히 거슬렸다·
갑자기 찾아온 건 그들인데·
내 꿀 같은 휴식 시간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차까지 뺏어 먹는 무뢰배들이 상당히 아니 꼬았지만·
아가씨의 평판을 위해서 참기로 했다·
잠깐의 티타임 끝나고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황실 아카데미 학생회에서 서기를 담당하는 검술 학부 1학년 히스타니아 한나라고 합니다·”
차갑게 말하는 그녀·
본론만 말하고 싶은 티가 역력했기에 나와 말이 잘 통할 것 같았다·
나도 귀찮게 손님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빨리빨리 하고 갑시다·’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
빚 때문에 왔으면 무릎을 꿇을 거고·
아가씨에게 복수하러 왔다면 검을 뽑을 생각이다·
어떤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든 서로의 의견만 맞는다면 금방 끝날 이야기·
그녀의 목적을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어이 리카르도·”
연두색 머리의 무뢰배가 나를 불렀다·
“부르셨나요?”
“부르셨나요? 푸하핫···· 미치겠네· 진짜·”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건들거리는 미남·
생긴 건 색 빠진 녹차처럼 생겨서 나한테 ‘어이’ 거리는 꼴이 꼴 보기 싫었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본주의로 단련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꼽을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미치신 것 같습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오신 것이 말이죠·”
“하하· 예전하고 다를 게 없네·”
실실 쪼게는 연두 대가리는 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그를 알고 있다·
나와 루인은 아카데미 동기였으니까·
내 나이 22살·
올리비아와 입학 날짜를 맞추기 위해 늦은 나이로 입학한 아카데미에서 나이도 어린 것들의 반말을 들으며 각박한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던 시절·
루인은 만년 2등으로 올리비아 뒤에서 손가락만 빨았던 친구였다·
원작에서는 여주인공 꽁지만 쫄랑쫄랑 쫓아다니면서 집착남 포지션으로 자리를 굳혔던 거로 기억한다·
특히 소설에서 파이어볼 조금 할 줄 안다고 개기는 꼴이 재수가 없던 문제아 캐릭터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런 루인을 곱게 대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올리비아를 괴롭혔던 인물이기도 했고 껄렁거리는 모습이 내 니즈와 맞지 않았으니까·
여성 독자들은 그런 게 루인이 멋이라며 퇴폐 미남이라고 빨아주었지만 내 눈에는 예절을 덜 배운 놈으로 보였다· 빙의해보니 더 그렇게 느껴졌고·
그래서 무시했다·
아카데미에서 그 녀석이 말을 걸어도·
시비를 걸어도·
알빠노 하면서 무시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루인은 금쪽이가 됐다·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너는 여주인공에게 집착하고 나는 우리 악녀님만 신경 쓸 테니 남남으로 지내자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무시했는데·
루인은 그게 도발로 느껴졌나 보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금쪽이였던 루인의 과거를 회상하느라 잠깐 정신을 놓았다·
색 빠진 녹차 말은 무시해도 되지만 혹시나 돈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으니까 정신을 놓으면 안 됐다·
쿵·
루인은 테이블에 도발적으로 발을 올려놨다· 안 그래도 낡은 테이블이 비명을 지르며 신체 포기각서를 쓰려는 것 같았다
-끼이이이이익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뭐···?”
“귀하신 분이 오셔서 너무 긴장해서요·”
좋단다고 웃는다·
“아무튼 오랜만이네· 우리 1년 만이지?”
“네· 그렇죠·”
“네가 그때 우리들한테 쫓겨난 이후로 못 봤으니까·”
우리들·
황태자와 미하일· 기타 등등·
여주의 서브 남들을 말하는 거겠지·
루인은 자신의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눈을 떴다· 나는 그의 청년 치매를 걱정하며 편집된 기억을 정정해줬다·
“저는 쫓겨난 게 아니라 휴학했는데·”
“푸하하하하! 아 맞다 맞다· 그래서 왔었지·”
뚝· 갑자기 폭소하다 정색하는 루인·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워서가 아녔다· 단지·
‘저 친구는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중2병이 안 나았지·’
내 중2병 시절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웃다가 정색하면 상대방이 겁먹을 줄 아는 전형적인 중2병 같은 행동·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평소처럼 해· 리카르도· 너 반말했잖아·”
나는 테이블에 조신이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지금은 데스문트 가문의 집사기에 저는 저택에 오신 손님에게는 반말할 수 없습니다·”
“집사는 뭔 집사· 다 망해가는 가문 주제에·”
“아닙니다· 저희 데스문트 가문은 아직 잘나가고 있습니다만 정확히는 제가 모시는 아가씨가 망한 거지요·”
나는 저 녀석의 저렴한 도발에 응해줄 마음이 없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괜히 얼굴을 붉히면서 싸워봤자· 얻는 게 없으니까· 혹시 돈이라도 주면 모르겠다· 그것도 아닌데 싸우는 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루인을 무시했다·
금쪽이가 찡찡거리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나는 그나마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사람을 쳐다봤다·
[히스타니아 한나 Lv· 28]
[직업 : 아카데미 재학생]
[호감도 : -20]
[좋아하는 대화 주제 : 미하일]
[싫어하는 대화 주제 : 검술]
뭔데 너는 마이너스냐·
머리 위에 잔혹하게 떠 있는 마이너스 호감도에 나는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못생겼나·’
아니면 집사의 응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싸구려 녹차를 줬지만 나름 우리 저택에서 가장 비싼 차를 내 준건데 오랜만에 온 손님이라서 나름 생색내려고 했는데 이런 식의 호감도 암살 시도는 곤란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군·’
집사로나 인간적으로나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그 한나 씨?”
“···”
내 말을 무시하는 그녀·
그녀는 대답 대신 탁자 위에 쾅 하고 편지를 올려놨다·
“이게 뭡니까?”
한나라고 하는 여자는 팔짱을 꼈다·
건방지게 선배 앞에서 팔짱을 끼는 모습이 아니꼬웠다·
얘도 머리에 딱밤 한 대에 갈기면 쓰러질 것 같은데·
심성이 착한 나라서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세기고 잠자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학생회장님이 그러셨습니다· 복학하라고요·”
“학생회장님이요?”
학생회장· 누구지·
아직 여주인공이 학생회장이 되려면 멀었을 텐데·
나는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지금 학생회장님이 누구시죠·”
“샤르티아 황녀님이요·”
샤르티아· 제국의 3 황녀·
기억하기론 원작에서 미하일을 좋아하는 수많은 조연으로 알고 있다·
아마 올리비아처럼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악녀가 아니라 깔끔하게 고백하고 깔끔하게 차였던 거로 기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르티아 황녀님·
접점은 크게 없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나는 탁자에 올려진 편지를 빠르게 읽고 쓰윽 편지를 테이블 앞으로 밀어냈다·
“죄송합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랄”
상스러운 욕설이 들려왔다· 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옆에 앉은 루인를 흘겼다·
아직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방지게 말하는 루인·
그는 정성스럽게 우린 차를 벌컥 들이마시고는 가글하듯 입에서 오물거렸다·
“퉤·”
뱉기까지 하는 그놈의 행동에 당황했다· 동행자인 한나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루인은 말했다·
“시기는 무슨 시기야· 그냥 쪽팔려서 못하는 거지·”
나는 루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 한번 떠들어보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경청했다·
“맞잖아?”
루인은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내 반응을 보고 싶은 모양이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루인은 이런 내 반응이 만만했나 보다· 계속해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올리비아가 나락을 갔는데 누가 오고 싶겠어· 네 돈줄이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말이야·”
-끄덕끄덕·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소리죠·”
-칫·
싱거운 반응에 혀를 차는 루인·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는· 근데 맞잖아· 네 주인이 흑마법 사용하다가 병신 된 거·”
“그렇죠·”
“병신이 병신을 모시는데 누가 돌아오고 싶겠냐고·”
푸하하· 웃어버리는 루인·
나는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선배···!”
무표정을 지키던 한나는 루인의 폭언에 그만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정도로 심하게 말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
본래 한나 자신도 악녀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선을 단단히 넘어버리는 선배의 모습에 뇌가 딱딱히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주인의 욕을 가만히 듣는 집사도 그렇고·
싱거워 빠진 녹차도 짜증 나는데·
동행한 선배까지 이 지경이니 도무지 어떻게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지금·
한나의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오직 미하일이었다·
나는 그 둘을 조용히 지켜봤다·
재밌는 구경이 아닐 수 없었다·
무시란 무시는 다 했으면서 정작 싸움이 나려니까 말리는 여자나·
자기가 잘났다고 킬킬거리는 마법사가 우스웠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쫓겨나듯 휴학을 했고·
아가씨는 피치 못하게 장애를 가졌으니까·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다·
‘싸울까·’
현대인들은 익명이 보장되는 공간이 발전하면서 가장 크게 성장한 것은 힘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었다·
극도로 발달한 말빨·
현대인들은 키보드를 잡는 순간부터 상대방의 멘탈을 박살 내는 방법을 죽을 때까지 갈고 닦는다·
내가 게임이란 잔혹한 세계에서 그렇게 성장했으니까· 고아지만 어딘가에 계실 어머니를 지키려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루인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본인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작을 봤기에 알고·
호감도 시스템으로도 그의 약점을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를 더 건들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악녀님이 들으실까 봐·
항상 조심해야 했다·
마음이 여린 악녀님이 싸우는 소리를 듣기라도 하다간 한동안 저택이 울음바다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열도 많이 나는데 여기서 더 화를 냈다간 진짜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하고만 살 수 없는 노릇·
나는 조용히 그가 가장 발작을 일으킬만한 문장을 곱씹었다· 잔잔하면서 그가 객기를 일으킬만한 문장을 잠자코 생각했다·
“그렇죠· 그러니까 제가 쪽팔려서 복학을 미루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치?”
히히덕거리는 루인·
그는 ‘이제야 좀 주제를 아네’라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에 표정이 썩어졌다·
“평범한 귀족 영애한테 수석을 빼앗긴 마탑주의 제자가 지금 2학년 수석이라서요· 와···”
나는 비열하게 웃었다·
“진짜 수준이 떨어져서···”
순식간이었다·
“이 씨발 새끼가·”
루인의 손에서 붉은 구체를 만들어 낸 것이·
그의 옆에 있던 한나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너무나 빨랐고 눈으로 못 따라잡았으니까·
이것이 1학년과 2학년의 차이인 건가 싶었고·
아직도 멀게만 느껴지는 벽에 한나는 뒤늦게 몸을 움직였다·
“선배···!”
-쾅────!
그때였다·
마법을 발동시킨 루인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힌 것이·
낡은 탁자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소리를 지르려던 루인의 머리는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한나는 눈을 깜빡였다·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라는 말이 맞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는 이 모든 일이 끝나있었으니까·
이 모든 일을 눈 깜짝할 시간에 이룬 당사자는 버둥거리는 루인의 머리채를 잡고 작게 속삭였다·
“아가리 다물라고· 아가씨 주무시잖아·”
집사의 붉은 눈은 빨갛게 일렁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reader님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작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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