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아그작·
우적·
대공성으로 복귀 중인 마차 안엔 두 개의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같은 과일을 씹는 다른 소리가·
차창 밖 설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놓인 상황들을 대강 조합해보니 여주인공께서 카일이 가져온 대공가의 문양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개최장을 떠나버린 듯 했다·
크나큰 점수를 하사하겠다던 약속을 어긴 채 매몰차게 떠나버린 것이다·
그것은 곧·
‘화가 무진장 났다는 거겠지·’
최후의 통첩이자 낚시를 위해 온갖 양념을 발랐던 미끼까지 실패했으니 화가 나리란 건 예상했었다·
더욱이 원수에게 사랑 고백까지 하며 펼친 회심의 묘책이었기에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도 입었을 터다·
그럼에도 기권 의사를 철폐할 생각도 그녀의 복수를 위해 원작 캐릭터의 업보를 짊어질 생각도 없었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울타리를 벗어난 방관자에게 집착하는 것보다 묶어둔 주동자들에게 집중하는 게 더 현명할 일이다·
이미 그녀는 목줄을 스스로 풀어낸 기권자에게 집착하느라 좋은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부디 내가 그것을 쓰지 않길 바랐다·
진심으로써·
그저 인간의 천성이 바뀔 수도 있음을 하늘이 두쪽나도 바뀌지 않는다는 그 천성의 변화에 탄복한 하늘이 두쪽날 수도 있음을 고려해주길 바랄 뿐·
다른 차원인이 빙의한 걸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라도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나로 인해 여주인공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 계획에 나를 끌고 들어가겠다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억울과 원통 속에서 몸부림쳤던 전생을 반복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녀를 구태여 자극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던진 미끼들을 물지 않고자 해내는 몸부림일 뿐이었고 그것이 설령 그녀를 자극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번복될 일은 없었다·
비위를 맞춰주고자 어쭙잖은 촌극을 펼칠 일도 없었다·
얄팍한 수라 읽히는 순간 빈틈을 보이는 순간 그녀는 더욱 집요하며 노골적으로 공격할 테니까·
차라리 당당히 현대인 이준우를 보여주어 하늘이 두쪽날 수도 있음을 주입시키는 것이 옳았다·
영문도 모른 채 후피집이 예정된 악질 캐릭터에 빙의당한 현대인은 그래도 되니까·
그저 행복과 동경을 찾아 떠나고 싶을 뿐인 빙의자에겐 그것이 최선의 길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변하는 건 없다·
그녀가 화살비를 쏘면 철우산을 펼치고 그녀가 뙤약볕을 내리쬐면 그늘로 피하고 그녀가 태풍을 휘몰아친다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쉬면 그만·
그렇게 버티고 피하고 쉬다보면 혼약대전이 끝나있을 테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만일 터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빠르게 지나가는 설경을 바라보며 얼마나 잠겨있었을까 불현듯 들려온 레이첼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 뭐·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이거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레이첼이 앙상해져버린 과일을 들며 그리 인사를 전했다·
딱히 인사를 받고자 함이 아니었기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레이첼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공자님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요즘 들어 이상하십니다·”
“자주 듣는 질문이군· 식상해· 다음·”
“····”
농담 섞인 대꾸에 레이첼이 벙쪘고 보기 드문 그 반응이 웃겨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풋· 농담이야· 스승께서도 드디어 제자에게 관심이 생겼나보군?”
“교육에 참고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럼 스승께서 보기엔 어때? 제자의 변화가 조금이나마 진실되어 보이는가?”
내뱉고 난 직후 위화감이 드는 질문·
그것이 내 속에 은근히 쌓인 답답함이 토해진 것임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 번 천 번 외쳐도 내가 이준우임을 믿어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겠지·
시답잖게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 질문을 덮으려 했는데····
“예·”
레이첼의 입에서 의외의 답이 들려왔다·
백번 양보해야 들을 수 있는 답이 ‘모르겠습니다’ 정도일 거란 예상과 달리 레이첼이 서슴없이 대답한 것이다·
“···그 그런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어정쩡한 인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레이첼이 앙상해진 과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아 이상하긴 했습니다만 그 덕분에 별채에도 큰 활기가 띄고 있습니다· 시녀들도 미소를 찾고 있고요·”
원작의 엘든이 군림하던 별채는 당연하게도 매일이 폭풍의 연속이었다·
하루도 고성과 비명과 난동이 떠난 적이 없으며 매일 아침 그 잔해를 숨 죽여 수습해야 했던 시녀들이었다·
그 악행들을 잘 알고 있기에 괜히 내가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혹여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라·
거창하게 이유랄 것까지 없었다·
악인의 삶을 살아온 인간이 그것을 후회하고 반성하여 새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눈부신 설경을 바라보며 답해주었다·
유달리 빛나는 찬란한 백색의 빛이 부서지는 설경을 바라보며·
“그저 나도 눈부신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을 뿐이야·”
지하골방에서 빛을 갈구하며 살던 삶·
그토록 빛을 갈구했으나 빛 대신 빚만 짊어졌던 삶·
이제라도 빚을 내려놓고 빛을 짊어져보리라·
그러한 생각에서 툭 내뱉은 답이었고 또 다시 의외의 답이 들려왔었다·
“응원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유독 살갑게 구는군·
말 한마디 잘 붙이지 않던 무뚝뚝이 스승께서 연거푸 질문 세례도 하고 말이다·
“고맙군· 근데 며칠 전만 해도 날 ‘저질’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낯간지러운 걸 오래 참지 못하는 성미라 그리 농을 던졌는데··· 경멸서린 눈빛으로 가슴팍 쪽으로 제 검을 들어올리는 레이첼에 의해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건 변함없습니다만·”
아·
음·
그래·
역시 넌 주관이 확실하구나?
**
벌떡!
오늘은 엘든의 2차 평가전으로 인해 점심을 굶은 채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아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텅빈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엘든이 앉아있던 자리였다·
우연한 재회부터 어제까지·
‘····’
고작 며칠 함께 독서했을 뿐인데 맞은편 빈자리가 왜 허전하게 느껴질까·
독서를 시작한 이래 늘 빈자리였던 곳인데 왜 채워져 있어야 하는 곳이란 막되먹은 생각이 드는 걸까·
오늘만큼은 기다릴 이유가 없건만 왜 기다려지는 걸까·
모를 일이었다·
‘····’
멍하니 빈자리를 응시하던 아리엘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작 며칠 됐다고·
웃긴 일이야·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엘든이랑 같이 책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별꼴이야·
그리 자신을 책한 아리엘이 잡념을 털며 독서를 이어갔다·
스륵·
스륵·
스륵·
힐긋·
‘····’
하지만 저도 모르게 도서관 입구쪽으로 향해버린 시선·
그 시선에 자신이 추천해준 책을 든 엘든이 다가오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
그리곤 자리에 앉으며 엄청 재미있었다는 둥 감명 깊었다는 둥 비슷한 거 추천해 달라는 둥 듣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 줄 것만 같았다·
아리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참·’
망상도 지나쳐·
책 그만 읽어야겠어· 아주·
함께 읽고 감상을 공유하는 것이 독서만큼이나 큰 기쁨이고 재미라는 걸 이제야 알아서 그런 것일 뿐·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해주고 그것에 대한 감상을 듣는 게 행복한 일이란 걸 깨달아서 그런 것일 뿐·
엘든 라펠리온이란 동급생은 우연히 만난 인연이었고 그렇게 찰나로 지나갈 인연일 뿐이다·
지나친 기대고 과대한 바람이리라·
‘게다가 내가 직접 대공녀님의 고백도 전해줬는걸? 지금쯤 2차 평가전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라고·’
아침에만 해도 대공가의 사위가 되길 진심으로 응원해놓고·
그래놓고 이제 와 맞은편 빈자리가 아쉽다고?
수천 일도 비어있었던 그 자리가 고작 며칠 채워져 있었을 뿐인데 아쉽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그저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던 이에게 기쁨을 돌려주고 싶어 해낸 것이었고 미련이나 아쉬움 따위를 남기고자 해낸 것이 아니었다·
대공녀님을 돕기 위해 엘든을 돕기 위해 해낸 것뿐이었다·
이제 엘든은 제 3대공녀님의 남편이 될 일만 남았고 대공가의 사위가 되어 더 위대한 공적을 세울 일만 남은 이다·
자신과 사는 세계가 달라지고 서는 곳이 달라진다·
각자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엘든은 대공가의 사위로 자신은 예전처럼 도서관이란 정적 속에 홀로 앉아 독서하는 고독한 객인으로·
다만 그 전에 한가지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혼약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같이 읽고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생각이 큰 오산이었음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던 아리엘이었다·
‘아··· 안되겠구나·’
엘든이 도서관에서 빈둥거리며 독서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기권자’였었기 때문·
이제 기권자가 아닌 유력한 우승 후보가 되었기에 남은 평가전 준비를 위해 소설 탐독이란 것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을 것이다·
자격이 부족하다는 그를 너그럽고 자애로우신 제 3대공녀께서 기꺼이 포용하셨으니 말이다·
그렇게 혼약대전이 끝나고 나면 대공가의 사위가 되어 얼굴 한번 마주치지 못 하게 될 테니 당장 지금부터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평범했던·
그날들로·
‘그래·’
아쉽지만 어쩌겠어·
모처럼 찾은 독서벗이 한여름밤의 꿈보다 짧게 스쳐간 것이 아쉽긴 하지만 잘된 일이야·
솔직히 최종 후보에서 기권한다는 게 말이 안되는 일이었잖아?
그리고 뭐·
내가 아쉽다고 해서 어쩔 거야·
‘맞아· 너 뭐 돼?’
안되지·
그래·
그럼 책이나 읽어·
‘응·’
그리 생각을 단념한 아리엘이 재차 독서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갑작스레 일어나는 웅성거림 속에서 ‘카일 공자가 승리했대’라는 말을 들은 아리엘의 발끝이 서서히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2차 평가전의 점수가 가장 높다고 하던데·
‘바보·’
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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