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기필코 대공가의 데릴사위가 되어 하찮은 네놈의 쓸모를 증명하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약 상대가 되어라· 뒷일을 자연스레 해결될 테니· 넌 우리의 희망이다·》
《북부대공의 사위가 되지 못 하거든 사위의 수족이라도 되어 가문에 도움이 되거라·》
*
저마다의 특명을 받은 채 북부대공가 혼약대전에 참가한 100인의 귀공자들·
신분과 계급이 심사에 반영되지 않는 그저 귀족 혈통이기만 하면 되는 혼약대전이라 총 1000장에 가까운 지원서가 접수됐었고 그 중 100명이 심사를 통과해 보름 동안 예선과 본선을 치뤘다·
그리고 내일이면 드디어 마지막 평가가 시작되고 15일 간의 합숙이 끝나면 최종 승자가 가려진다·
25%란 높은 확률로써·
누군가는 쓸모를 증명하게 되고 누군가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는 도움이 되는 것이다·
15일이다·
15일만 버티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찬란히 빛날 신 역사를·
그렇기에 최종 평가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상상 속에서도 꺼내어보지 않은 일이었고 미치지 않고서야 해낼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미친 일을 해낸 엘든 라펠리온을 광인(狂人)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시선이었다·
작은 파란(波瀾) 속 침묵·
먼저 깬 이는 백작가 장남 카일이었다·
“···기권? 자네 낮술이라도 한 건가? 귀하신 분들 앞에서 농담이 지나치군·”
“하하· 그러게 말일세· 허겁지겁 먹던 것이 최후의 만찬이라도 된다는 겐가?”
블런드가 기권 선언을 우스갯소리로 치부하며 카일의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엘든 라펠리온은 경쟁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좋은 평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아카데미에서 그랬듯 늘·
그런 엘든의 기권 선언은 그들에게 악보(惡報)였다·
도구로 소비해야 할 공공재(公共財)가 없어지는 거니까· 애당초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보니 공공재의 이탈이 우승 확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었고·
침묵을 지키던 데론이 흥미로운 눈으로 엘든에게 물었다·
“···이유는?”
“저 같은 악인이 어찌 대공녀님의 남편 후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제 파악이 늦었을 따름입니다·”
달그닥·
데론이 수저를 접시 위에 놓으며 입을 닦았다·
“주제 파악이라··· 이해는 한다만 결승점을 코 앞에 두고도 경기를 포기할 만큼 나약한지는 몰랐군·”
“누군가를 짓밟아가며 살아온 생입니다· 고결한 북부대공가의 사람이 되기엔 너무도 불결한 생이지요·”
엘든이 모두를 아울러보며 그리 얘기했다·
나름대로 힌트를 주는 것이지만 대공녀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에겐 한 악인의 자조적인 성찰일 뿐이었다·
물론 그 뾰족한 성찰에 찔리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블런드가 식사를 마무리하곤 와인이 든 잔을 돌렸다·
핏빛과 같은 와인이 크게 출렁인다·
“···누구나 상처를 입으며 입히며 살아가는 법이라네· 세상은 짓밟고 일어선 자를 추앙하지 짓밟힌 자를 추앙하지 않아· 자네도 그쯤은 알고 있지 않나·”
엘든이 미소지었다·
속세를 내려놓은 이가 지을 수 있는 초연한 미소였다·
그리고 악행을 추앙하는 귀공자에게 보내는 쓴웃음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단지 누군가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만든 자가 감히 고결한 척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거북해져 기권하는 겁니다·”
다소 날이 선 목소리가 악단의 아름다운 운율 속에서 재차 울려퍼진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지 않습니까?”
악행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내막을 아는 이에겐 들릴 섬짓한 경고·
그만큼 엄중한 마음을 담아낸 것이지만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선조님들의 격언을 실감할 뿐인 엘든이었다·
데론이 청록빛 동공에 노기를 벼리기 시작한 것이다·
“···꼭 누군갈 겨냥한 듯하군· 자네 이제 와 속죄라도 하겠단 건가? 그런다고 해서 이미 흐른 타인의 피눈물이 맑아지진 않는다네·”
그리고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데론이 불쾌감을 표하자 블런드와 카일 역시 팔짱을 끼거나 미간을 찌푸리며 동조했다·
“엘든 공자 못 본 사이 꽤 유해졌군· 아니지· 유약해졌다···가 옳겠군·”
“타고난 피는 순리라네· 순리는 거스를 수 없으며 거스르기 위해선 피를 빼내어야 하는 법이지·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을지 모르겠군·”
엘든이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흐름이었다·
무료편수 후반쯤부터 시작된 참교육에도 반성보단 기만을 택했던 이들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과오를 꼬집는 말에 외려 훈수를 두고 있는 3인방·
자아성찰하는 이를 못난 인간 취급하며 자기들만의 사상을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하고 있다·
자신의 성찰을 도구로 이용해 이득을 노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엘든은 그들을 이해했다·
그들은 애당초 후피집을 찍기 위해 창조된 캐릭터다·
수박 겉핥기 식의 경고로 반성과 갱생을 바라는 게 어불성설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성찰을 비난하며 이용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블런드와 데론의 말대로 귀족가 영식이 보이는 나약하고 유약한 모습은 감점요인이다·
혹한의 땅을 지배하는 북부대공가의 사람이 되기엔 자격 미달의 모습인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기권을 선언한 패배자 그 점을 깊이 파고 들어와 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상부상조 좋은 흐름이다·
엘든이 웃어보였다·
“하하 별 뜻은 없었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이유를 물어보시기에 제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홀로 탈주하려는 이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도리는 보여주었다·
티가 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어찌됐든 그들은 제 3 북부대공녀의 칼부림을 받아 마땅한 이들이니까·
이 이상 간섭하는 건 여주를 위해서도 지양할 일이었다·
엘든이 빈 잔을 놓았다·
이제부턴 천명에 맡기고 흐름을 좌시할 뿐이다·
빙의자의 책임감은 시원하게 덜어내고서·
“그리고 기권 의사를 전달했을 뿐· 아직 별다른 답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여러분들을 경쟁보다 ‘동료’라 생각해 미리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빙의자인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들을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피해를 끼친다면 그때부턴 달라질 얘기겠지만 말이다·
엘든의 말에 데론이 평가단 쪽을 한 번 흘긴 후 입을 열었다·
“뭐 괘념치 않는다네· 자네의 의견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럼 다들 드셨으면 식사를 마치도록 하지·”
블런드와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바삐 움직이던 평가단의 펜대도 멈추었다·
그렇게 최종 후보자들 간의 첫 회동이 마무리가 되었다·
**
저벅저벅·
렌들러와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첫 회동이 끝났다·
생각보다 단조롭게 생각대로 불편하게·
소설 속 남주들과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테니까·
내게 테레사 수녀급의 인류애적인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3명 중 최종 승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을 넘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위대하신 북부대공께서 기권을 승인해 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며 빙의자된 도리는 했으니 흐름을 관찰하면 될 뿐이다·
힌트를 눈치채 반성을 하던지 눈치채고도 후회할 짓을 저지르던지 이 복수대전에서 살아남아 대공녀와 혼약을 맺던지·
전부 천명에 맡긴 채 나만의 미래를 그리면 될 터다·
문제는·
‘뭐부터 시작해야 하려나·’
느닷없이 중세시대로 끌려온 현대인은 무엇부터 해야 할까·
더군다나 가세가 기운 백작가의 귀공자가 되어버린 현대인은·
빙의된 캐릭터의 지식과 기억 덕에 글자 공부부터 시작해야 될 일은 없지만 기운 가세를 일으킬 방법을 찾는 건 역량 밖의 일이었다·
원작의 엘든 라펠리온께선 대공녀와의 혼약을 통해 가세를 일으키려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가세가 기울었다고 해도 백작가문이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 했으니 혼약대전에 매달릴 필요도 기운 가세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
‘우선은 후피집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게 관건이야·’
지금은 당면한 위기부터 넘기는 게 순서다·
물론 기권이 반려된다고 해서 위기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눈물의 후피집을 피할 방법은 더 있으니까·
가장 깔끔하며 가장 확실하며 가장 빠른 방법으로 기권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어서 쉬고 싶군·’
서둘러 방으로 향하고 있던 그때 별안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편에서 말이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노집사께서 냉큼 뒤로 돌아버린다·
·······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몇 걸음 내딛었다가 다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노집사께서 다시 뒤로 돌아버린다·
·······
옅게 떨리는 어깨 눈을 비비적대는 손 콧물이 그렁대는 소리까지·
“설마··· 우는 건가?”
렌들러가 고개를 저었다·
“허 허허· 그 그럴리가요·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 훌쩍· 습니다·”
“먼지가 코에도 들어갔나보군·”
“허허허· 머 먼지가 매섭군요·”
···훌쩍·
얄팍한 핑계로 무마하기엔 징후가 너무도 또렷했고 잠시 기다리고 있자 렌들러가 머뭇거리며 몸을 돌렸다·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로·
그리고 머쓱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주책이 심해지군요·”
“···뭐 사과할 것까지야·”
“회장에서 전하신 공자님의 말씀에 너무도 탄복하여 그만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아·
쌩뚱맞은 눈물의 이유가 그거였나·
후회캐 동료들에게 경고를 전하기 위해 그리 말했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노집사께 크나큰 감동을 드린 모양이다·
훌쩍·
렌들러가 그렁거리는 눈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볼을 붉히며 쑥스러워한다·
“소신 너무도 기뻐서 보이는 추태이니 그리 빤히 보지 말아주십시오· 부끄럽사옵니다·”
“····”
그렇잖아도 연로하신 노집사께서 소녀처럼 수줍어 하는 모습이 보기 껄끄러웠습니다 라는 말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보기 보다 눈물이 많은 캐릭터인 듯싶다·
자아성찰 한 번에 눈물을 보일 정도라니 선행 한 번 베풀었다간 대성통곡을 할 것만 같다·
‘어우· 조심해야겠는걸’
그리 생각하며 모퉁이를 돌기 위해 걸음을 내딛었는데·
“꺅!”
콰당!
빠르게 걸어오던 한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북부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메이드복을 입은 10대 중반의 시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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