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6
죽음마저 얼려버릴 듯 싸늘해진 대전·
엘든이 나선 그 대전에 르미앙과 데론 블런드가 남아있었다·
아니·
남겨져있었다·
비참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르미앙이 힘겨이 일어선다·
한번·
크게 휘청였고 급히 원탁을 짚음으로써 재차 쓰러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
오른손으로 원탁을 짚은 채 제 왼손을 펴서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엘든의 따귀를 때렸던 손이었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여전하다·
얼얼한 통증도 여전하다·
처참한 심정도 여전했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해본 적 없던 깨끗한 손은 그런 이질적이고 더러운 감각을 전하고 있었다·
그토록 닮기 싫었던 것을 닮아버린 손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을 행해버린 손이 역겹고 증오스러웠다·
꽈악·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제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물이 배어나오도록 힘껏 주먹을 쥐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목에 핏대가 섰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면서까지 주먹을 억세게 쥐었다·
손을 펴보았다·
짓눌린 살가죽에 붉은 즙이 솟아오르고 있다·
“···피·”
멍하니 중얼거리는 르미앙·
엘든의 뺨에 난 상처에도 같은 것이 방울졌었다·
따귀를 때린 것으로 모자라 그의 피를 보았었다·
물론 에린시아로써 당한 것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처이고 핏물이지만 신념이 무너진 절망은 단 한번의 생채기만으로도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다·
손을 내렸다·
고개를 맥 없이 꺾어 들었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화려하고도 밝은 빛을 내뿜고 있다·
피식·
실소가 나왔다·
지금쯤 저 샹들리에의 빛보다 더 반짝일 순간을 만끽해야 할지언데 지금쯤 허망한 실소가 아닌 통쾌한 미소를 지어야 할지언데 내뱉는 건 허망한 실소였으며 만끽하고 있는 건 지독한 회한 뿐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어째서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긴 걸까·
어째서 자신으로 인해 더 이상 비참해지지 말기를 바란다는 걸까·
자격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과분한 바람을 가지겠다는 걸까·
그리고 대체 왜 그 바람들이 진심인 것 같을까·
“행복···이라····”
맹한 얼굴로 엘든의 바람을 곱씹은 르미앙이 데론과 블런드를 내려다보았다·
히죽·
에린시아와 엇비슷한 얼굴을 한 그 비루한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제 비참한 처지를 대변하는 듯한 둘의 꼴이 우스웠다·
얄미운 벼룩 한마리에 집착하다 마굿간을 통째로 태워버리고 있는 자신의 꼴이 미련해 마리엔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상처도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꼴이 우스워·
그리고·
엘든에게 건넨 청혼에 미약한 진심이 담겨있었던 것이 실로 황당해 그리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또각또각·
르미앙이 핏물이 묻은 왼손으로 원탁을 쓸며 데론과 블런드에게 다가갔다·
“너희들은 정말 좋겠어·”
까무러칠 적막 속에 나직히 울려퍼지는 르미앙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데론과 블런드의 얼굴엔 에린시아의 것과 같은 절망이 깃든다·
“예 예···?”
“좋을 수밖에 없잖아· 이로써 용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2배로 늘었으니까·”
르미앙이 무릎을 꿇고 있는 둘의 앞에 섰다·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처럼 영롱했던 푸른빛 눈동자가 그 빛을 잃어 검푸르러졌고 그 물길을 잃어 정처없이 망망대해를 떠돈다·
잃어버린 빛 대신 어둑한 상실과 회한이 깔렸다·
잃어버린 길엔 짙은 해무가 깔려 한치 앞이 보이질 않는다·
모든 것을 잃은 눈동자가 바닥을 짚고 있는 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게걸스레 음식을 집어먹느라 더러워진 손을·
그들의 추악한 인성만큼이나 추해진 손을·
늘 그랬었지·
제발 손만은 밟지 말라고·
공부해야 하니까·
연구해야 하니까·
기록해야 하니까·
손만은 밟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너희들은 그 애원조차 조롱거리로 삼을 뿐이었지·
또각·
“너희들은 얼마나 잘 참는지 한번 볼까? 잘 참는 자가 오늘 대면식의 승자가 될 거야·”
한걸음 다가선 르미앙이 블런드의 손등을 구두 뒷굽으로 즈려밟았다·
뾰족한 구두 뒷굽이 무자비하게 손등을 파고든다·
“끄으으아아악···!”
블런드가 굽혀지는 오징어마냥 온몸을 처절히 비틀며 괴로워했다·
미꾸라지 한마리를 잡으려다 맑았던 연못을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린 자신을 채찍질하듯 더욱 세게 짓눌렀다·
“제 제발···! 너무 아픕니다아아악-!”
발을 들었다·
움푹 파인 손등이 보였다·
옆으로 옮겼다·
공포에 질린 주동자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인 데론의 얼굴이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절박히 건넨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던 혼약대전에서도 처절히 건넨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친 엘든에 대한 원망을 담아 데론의 손등을 세게 짓밟았다·
“끄으으으읍···!!”
부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그들과 다르다는 신념·
그들처럼 폭력을 휘두르지 않겠다는 신념·
단 한번의 따귀와 함께 박살나버린 자신의 신념을 짓밟듯 데론의 손등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르미앙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걱정 마·
이 복수 끝에 난 행복해질 거니까·
네가 해낸 바람을 비웃듯 누구보다 행복해질 거니까·
어디 한번 도망쳐봐·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희망이 품을 벌리고 있을지 후회가 기다리고 있을지 이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볼 거니까·
“끄으읍···!!”
어디 한번 끝까지 도망쳐봐·
내가 너를 놓칠 것 같아?
**
모든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빛과 어둠으로써 낮과 구분되는 밤은 나름의 규칙을 통해 오늘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시작한다·
낮에 하지 못 한 일들이 암행되는 밤은 폭력과 약탈의 시간이기도 했고 미신을 추종하는 이들에겐 공포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일부 지역에선 위험한 어둠 속에서 제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통금령이란 공적인 억압을 시행하기도 했다·
안식과 불안·
그 양면의 날을 통해 내일을 도모하는 것이 밤이었고 겔우드는 불안을 통해 내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파국으로 치닫은 혼약대전의 내일은 산전수전을 겪으며 위기에 무뎌진 노인조차 불안을 겪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엘든 공자가 그 밤을 걸어 제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겔우드는 불안이 현실이 되어 닥친 것만 같았다·
손에 쥐어진 것들과 뺨에 그려진 것은 불안을 넘어 불길함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손에 쥐어진 것들이 탁자에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쪽지가 펼쳐졌다·
내정자를 우려하는 질문에 그저 응원하는 마음만 담았을 뿐이라던 쪽지는 우려를 넘어 2차 평가전의 비밀을 담는 규칙 위반을 저지르고 있었다·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마나레코드 하나가 올려졌다·
세 명의 후보가 한 명의 후보에게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규칙 위반이 담겨있었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나레코드 하나가 올려졌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며 우려를 표명했던 그 감시자가 꼬리를 밟힌 것이 담겨있었다·
공식적으로 판정단이란 족쇄를 치워놓고 비공식적으로 비밀 감시를 행한 윤리 위반이 담겨있던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공녀님께서 남기신 상처입니다·”
최종 후보에게 한 명의 인격체에게 폭력을 휘두른 윤리 위반이 전해져 왔을 때 겔우드는 윈터펠 대공가를 대신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물론 에린시아를 가해한 정황이 의심되는 이에게 가해진 손찌검 하나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가 가진 정황들은 가문의 전통이자 북부령 최대 축제에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했기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는 최종 평가전이 시작되기 전에 공식적으로 기권을 선언한 기권자였으니까·
기권자를 억류할 조항이 없음에도 대공녀의 고집이 그를 억류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그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은 3명의 후보가 2명이 됨을 공식 승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엘든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몇 가지 조항들이 적혀 있는 그 끝에 인장란이 있는 종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옅은 미소를 지은 엘든이 겔우드의 책상 위에 놓인 윈터펠 대공의 인장을 보았다·
“서로가 바라는 이상(理想)입니다·”
저지르지도 않은 원죄에서의 사면·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원죄에 대한 사죄·
부당한 억류와 억울한 억압에서의 해방·
그것을 대가로 약조한 것을 이행할 의무·
하루아침에 악인이 된 빙의자가 최선을 다했던 도리·
인간이 인간으로써 살아가기 위한 권리·
낭만과 안식을 쫓아갈 자유인의 의지·
그리고·
후피집에서의 정정당당한 탈주·
그 모든 것을 담아낸 종이였고 참으로 오래 기다린 바람의 성취였다·
다음날·
7일 남은 혼약대전의 공개 일정이 일신상의 이유로 전면 비공개 일정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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