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입단속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낯이 익은 그러나 처음 보는 시녀에게 섬뜩한 살인 경고(?)를 날리고선 홀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감동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노집사께서 실망할까 싶어 은밀히 전했었다·
방금의 도움이 귀찮은 풍문이 되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상냥하게 얘기할까 싶었지만 모름지기 단속은 엄중해야 하는 법이다·
‘착한 쓰레기쯤은 상관없겠지·’
어린 시녀를 손수 책임지는 것이 옳겠지만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계급 사회의 폐해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 또한 옳을 터였다·
의무실에 시녀를 친히 데려가 비겁자 혹은 위선자 따위의 오명을 쌓느니 미안하지만 노집사장께 어린 소녀를 위탁하는 게 백 번이고 옳은 결정인 것이다·
악명은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때가 있지만 오명은 그저 오물일 뿐이니까·
오명을 얻을 바에야 악명을 짊어지는 게 나았다·
어쨌든 지금은·
‘어서 침대에 눕고 싶다·’
빙의 직후부터 후피집 탈주 선언 후회캐들과의 회동 그리고 왜인지 낯이 익은 시녀와의 충돌까지 피곤한 하루다·
[제 남편이 되고 싶다면 무릎 꿇고 애원해 보세요·]라는 여성향 후피집물을 읽다가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빙의되어있었다·
그것도 후피집이 시작되기 직전으로·
여타 빙의자들처럼 세계에 녹아들 시간도 사태를 면밀히 파악할 시간도 없었다·
피곤할 수밖에 없는 하루였다·
‘그나저나·’
대체 누가 나를 빙의시킨 걸까·
솔직히 빙의당한 건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것이 조금 두렵긴 하지만 현생에 미련이 없었던 내겐 오히려 달가운 일이었다·
문제는 ‘어디 좆돼봐라·’ 식으로 빙의당한 것·
어느 악신께 원한이라도 산 걸까 아니면 전능하신 소설작가님께 노여움을 산 걸까 싶었지만 가늠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진 것 없는 이가 누릴 평범한 삶이었고 이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리 없는 평범한 삶이었다·
‘뭐 빙의물보면 빙의자는 평범한 소시민이 국룰이긴 하다만·’
저벅저벅·
시답잖은 상념에 빠진 채 걷기를 10분쯤 어느덧 최종 후보들이 기거하는 별채가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대공성의 서쪽에 있는 곳으로 4명의 후보들을 위한 4개의 단독주택이 있었는데 경비가 삼엄했다·
근위병이 출입구와 담벼락 주변으로 24시간 서있었고 출입은 오로지 기거하는 가문인만 가능했다·
최종 후보와 그 가문에서 차출된 집사와 시종들만 가능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은밀한 담합과 결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최종 후보자 간 사적인 교류를 하기 위해선 ‘평가단 동행’이 규칙이었는데 규칙을 위반한 채 만남을 가졌다간 경고를 받게 되며 누적될수록 최종 우승에선 멀어지게 된다·
하여 기거하는 별채마다 대공가의 근위병이 경비와 감시를 겸하고 있는 것이었다·
별채란 사적인 공간이자 휴식처·
그 내부까지 감시할 수는 없기에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미연의 방지책을 두는 것이다·
물론 고작 근위병의 통제로 방지가 되겠냐 할 수 있지만 인간이란 결국 짐승의 본능을 가진 지성체이기에 목책을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보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던 난 적잖이 놀라야 했다·
“···보좌관?”
라펠리온 백작가를 위한 네 번째 별채로 들어서자마자 대공가의 중앙보좌관 겔우드가 보인 까닭이었다·
“아 오셨군요· 늦으셨습니다· 엘든 공자·”
대면한지 반나절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저 고리타분한 얼굴이 이토록 반가운 것은 그가 약속한 ‘답’을 가지고 왔기 때문일 터·
대공과 보좌관과 백작가 공자는 사회적 위치가 엇비슷할 뿐 공식 서열은 백작가 공자가 한참 위다·
답을 전하기 위해 나를 호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라펠리온 가문의 구역까지 직접 행차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고 그건 ‘답’일 확률이 높았다·
제발·
내일 아침이면 대공성이 아닌 라펠리온 백작가가 있는 북부령 남쪽으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인사를 받았다·
“공무로 바쁘실 보좌관께서 직접 행차하실 줄은 몰랐군요·”
“하하· 당연히 와야지요· 후보님들과의 자리는 어떠셨는지요?”
알고 있을 거다·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 모든 말을·
혼약대전의 책임자는 평가단이 착용한 마법 아티팩트를 통해 상황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말이다·
게다가 겔우드는 통찰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무료편수 중반부에 묘사됐었다·
세간에는 밝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제국의 황실 책사였던 어머니와 고룡 사이에서 태어난 이였다·
그런 그에겐 속내를 감추려는 것보단 그대로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그의 출신과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어쭙잖은 은닉은 그에게 기만으로 보여 호기심을 자극할 거다·
뭐·
‘진심을 얘기해도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겠지만·’
무슨 대답을 하든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기정사실일 터기에 느꼈던 감상을 적당히 둘러서 전하기로 했다·
“피곤한 자리였습니다·”
겔우드가 흥미로운 눈초리로 웃었다·
“하하 피곤한 자리였다라·”
그리곤 별채 현관으로 정중히 손짓하며 말했다·
“그럼 가면서 얘기하실까요?”
**
겔우드를 따라 일명 ‘주인의 층’이라 불리는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의 방문에 탈주각이 날카롭게 섰나 라는 기대를 품을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 반대일 확률이 높았다·
기권이 승인됐으면 뜸을 들일 필요가 없을 터다·
구태여 걸음을 해놓고 뜸을 들이는 것은 얘기가 길어진다는 것이고 상대가 원하는 답이 도출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과 같았다·
‘···플랜 B를 발동해야겠군·’
물론 기권 선언이 반려되었을 때의 계획도 수립했었기에 탄식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가장 쉽고 빠른 탈주가 실패했을 뿐·
계단의 상층부에 오르자 침묵을 고수하던 겔우드가 입을 열었다·
“어째 식사는 입에 맞으셨는지요· 대공가에서 대접한 첫 식사였을지언데 말입니다·”
“훌륭했습니다· 매일 먹고 싶을 정도로요·”
“하하· 기권을 철회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그럴리가·
황실요리사가 매일 식사를 차려준다 하더라도 내가 저지르지 않은 업보로 여주인공께 복수를 당하는 건 사양이다·
대답 대신 미소를 짓자 겔우드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묻지 않으시는군요?”
“약속하신 ‘답’에 대해서 말입니까?”
“예·”
어느덧 꼭대기 층에 올랐다·
일반 시종들은 함부로 오를 수 없는 오직 가문의 집사장과 간택받은 시종 몇만이 오를 수 있는 층에 도달한 것이고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없음을 뜻했다·
궁금하긴 했다·
대체 어떠한 ‘답’이기에 이리도 뜸을 들이는 건지·
밥도 뜸을 오래 들이면 맛이 없어지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운을 띄우지 않은 건 겔우드란 현자급 캐릭터가 뜸을 들이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급할 거 있겠습니까·”
“하하 참으로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분명 제가 아는 라펠리온 백작가의 독자께선 성미가 급해 의문을 참지 못 할 터인데요·”
···애석하게도 이준우란 현대인께선 인내력이 강한 걸 어쩌겠는가·
없이 사는 자는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빙의했다고 해서 엘든이란 개망나니 캐릭터로 위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개망나니로 살고 싶지도 않았고 위장을 위해 열연을 펼치고 싶지도 않았다·
“인내심을 길러보려 합니다·”
투박히 던진 답에 옆에서 걷던 겔우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응하지 않았다·
꾸역꾸역 앞만 보고 걸었다·
겔우드의 눈에 신묘한 힘이 담겨 있음을 아는 자는 피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호오 소원하신 대로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겁니까?”
꼭대기 층에 올랐음에도 이제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없음에도 겔우드는 답을 아낀 채 걷고 있었다·
3층으로 이뤄진 별채의 3층엔 별채 주인의 침소 대접 준비를 하는 다용도실 시종들이 상주하는 대기실 용모를 단장할 수 있는 장식방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뿐이었다·
“다 왔습니다·”
겔우드의 걸음이 드디어 멈췄다·
응접실이라 적힌 문 앞에서·
동시에 불길한 낌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답을 드린다고 했었지요·”
“그렇습니다만·”
겔우드가 응접실 문을 열며 안쪽을 가리켰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가 말입니까·”
선뜻 들어서지 못 한 채 그리 물었고 고리타분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을 때 불길한 낌새는 확신이 되어 나를 감쌌다·
“기권 선언에 대한 ‘답’이십니다·”
내부를 조심스레 들여다 보았다·
소파에 한 여인이 앉아있다·
가면을 쓴 채로·
**
엘든이 기권 선언에 대한 대답을 응접한 시각·
제 2 대공성의 상층부에 도열한 수많은 방들 중 한 곳에서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가씨~!”
모시는 이를 찾는 목소리·
늦은 복귀에 모시는 이께서 걱정을 할까 싶어 급하게 도착한 시녀의 목소리였다·
“아가씨~? 어디 계세요~!”
들려와야 할 응답이 없다·
이 시간이면 늘 그랬듯 침대 머리맡에 앉아 책을 보고 있어야 할 아가씨께서 보이질 않는다·
“흐응 어디 가셨지?”
시녀가 복도로 나왔다·
층 전체가 베일에 싸인 제 3 북부대공녀를 위한 곳이며 허가된 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왕래가 불가능한 봉쇄된 층이었다·
그렇기에 고요했다·
“연구실에 계시나···?”
하루 종일 마법 연금술 연구를 하고도 잠들기 전까지 또 탐구서를 읽는 아가씨였기에 시녀가 연구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목발을 짚으며·
엘든에게 섬짓한 경고를 들었던 어린 시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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