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8
“····”
이른 아침·
이제 막 동이 트고 있는 어슴푸레한 아침 속에서 눈을 뜬 르미앙이 멀뚱히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기억을 잊어버리듯 붉은 만드라고라 뿌리를 달인 물을 마신 후 거역할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눈을 뜨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꿈조차 꿔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들었었고 왜인지 모를 개운함에 다소 당혹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보던 르미앙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
스스로 해낸 기상이 믿기지 않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손과 몸을 훑어본다·
가벼웠다·
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무거웠던 몸이 가벼이 일으켜졌고 움직임마다 아우성을 치던 근육들이 잠잠했다·
허하게 식어있던 속에는 묘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흐릿하게 느껴지던 몽롱하게 느껴지던 주변의 기척들이 선명히 느껴졌다·
“····”
붉은 만드라고라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식물임에도 기후와 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왕국 전역에서 자라는 탓에 ‘기적의 뿌리’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그 강력한 생명력으로 인해 약재 중 으뜸으로 꼽히고 있었다·
꺼진 기력을 되살리는 데에 특효인 약재였고 그것을 처음 먹어본 르미앙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만 해도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던 기력이 뿌리 하나에 이렇게까지 회복될 줄이야·
내친 김에 침대에서 빠져나와 우두커니 서보는 르미앙·
갓 태어난 짐승의 새끼처럼 후들거리던 다리가 제법 단단히 무게 중심을 지탱한다·
게다가·
꼬르륵-!
기력이 회복된 탓인지 실로 오랜 만에 허기가 느껴졌다·
굶고 굶어 배가 쓰라릴 때가 되어서야 오물을 삼켜냈었던 지난 날이었고 그렇게 허기란 것을 잊어버렸던 르미앙이 별안간 울린 울림에 배를 쓰다듬었다·
오래될수록 그 효능이 뛰어나다던데·
단 한번의 섭취만으로 기력이 회복된 것을 보면 꽤나 오래된 붉은 만드라고라였을 것 같았고 그렇기에 엘든과 아리엘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 같았다·
삶이 지독히도 모질어 죽음을 택해야 했던 죄인이 받기에 과분한 은혜·
민폐와 패악으로 얼룩진 인생이 받기에 부끄러운 은혜였고 받은 만큼 무언갈 해주고 싶었다·
이젠 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소중한 이를 희생시키고 만백성을 실망의 늪에 빠뜨릴 뻔 했던 인간이 기력을 회복한다는 것이 참으로 가증스럽고 파렴치한 짓이라 여겨졌지만 자신을 돌볼 의무가 없는 마을 경비대에게 자신을 인계했어도 될 일을 그러지 아니하고 직접 돕고 있는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스스로가 가증스럽고 파렴치하다고 해서 자신을 위해 위험까지 무릅쓰고 약재를 구해온 이들의 도움을 수포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마리엔과 했던 약속을 두 번이나 어기는 것과 같았고·
그렇게 방을 서성이던 르미앙이 이내 결심한듯 문을 열고 나선다·
며칠 간 그들과 함께 하며 듣기를 에리스 후작령으로 향하던 도중 우연히 자신을 발견했다 했다·
에리스 후작령으로 가려는 이유는 북부령 동쪽 지역의 몬스터 사냥 식도락 여행을 시작하기 위함이라 했었고·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인 법이었고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하는 것·
더군다나 자신에겐 그러한 재주가 있었으니까·
혼약대전 명부에 4명의 이름이 오른 순간부터 마리엔과 함께 몬스터 요리 특훈(?)에 들어갔었었다·
귀족들이라면 100이면 100·
혐오와 경멸을 담아낼 그 몬스터 요리로써 복수의 서막을 알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직접 요리 연습을 했었고 그때 깨닫게 되었었다·
요리라는 것에 타고난 재능과 감각이 있음을·
천성이 탐구와 연구에 타고나서 그런지 다양한 재료를 배합해 하나의 요리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썩 재밌었던 것이다·
딸각·
조용히 방문을 닫은 르미앙이 조용히 1층 주방으로 향한다·
이르디 이른 아침이라 숙소는 고요했다·
그렇게 주방에 도착한 르미앙이 손짓 하나 조심히 움직이며 재료들과 도구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먹음직스런 식재료와 쓸만한 도구들이 준비되어있다·
꼬르륵·
식재료를 보자 재차 울리는 허기진 고동·
굶주린 배가 서둘러 먹을 것을 채우라며 재촉을 해대지만 제 굶주림보다 은인들에게 한끼 대접하는 것을 우선시 하기로 한 르미앙이 소리 죽여 요리를 시작한다·
아직 칼을 드는 것이 힘들고 냄비를 옮기는 것이 벅차며 식재료를 다듬는 것이 고단스러웠지만 삶이 힘들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마리엔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도와주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응당 감내해야 할 수고라 여기며·
그렇게·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갈고 다듬었던 몬스터 요리 실력을 이제는 은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십분 발휘해보는 르미앙이었다·
**
《음! 이건 괜찮은데?》
《저 정말?!》
흠냐····
아리엘이 해줬던 몬스터 요리 중에 다이어 울프 앞다리 양념구이가 제일 맛있었지····
운명의 짝을 만나 원정대에서 이탈해버린 셰프 넬론이 만들어두었던 양념이 큰 몫을 한 거 같긴 하지마안····
츄르릅····
어 저 요리는····
《어떠신가요? 엘든 공자?》
족발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통족발·
비싼 값에 늘 먹방을 보며 대리만족만 해야 했던 족발이 보인다·
꿀꺽····
《기권의 진심을 오해하지 않을 테니 한입만 먹어볼래요?》
대공성에서 맛 보았던 붉은 롱거의 뒷다리구이····
한입만 먹어야 했던 것이 어찌나 아쉬웠는지 모를 몬스터 요리다····
기권 선언만 아니었다면····
게걸스레 먹어치웠을 맛있는 뒷다리구이····
츄릅·
츄르릅·
한입만 먹어야 해서 그런지 몰라도 혼약대전 첫 대면식 때 먹었던 맛을 능가하는 붉은 롱거 뒷다리구이를 만난 적이 없었지····
흠냐····
흠····
음···?
고소하고 담백한 육향이 난다····
왜인지 익숙한 육향····
번쩍!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화이트 스톰에 레이첼과의 뜻 모를 대련까지·
꽤나 피곤한 하루였고 저녁을 먹은 후 혼절하다시피 잠에 들어버린 터였다·
눈을 떠보니 화창하게 개인 아침이었고·
킁킁·
“···무슨 냄새지?”
꿈 속에서만 맡아지던 냄새인 줄 알았던 것이 기상 후에도 진하게 풍겨온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서 냄새가 흘러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꿀꺽·
절로 군침이 도는 고소하고도 담백한 냄새·
그것을 느낀 이는 비단 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철컥·
맞은편 침실에서 잠옷을 입은 아리엘이 눈을 비비적대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우린 동공 속에 같은 의문을 담아냈다·
“···뭐야?”
“주방에서 나는 냄새 같은데?”
“근데 누가?”
원정대의 요리는 아리엘이 담당해주고 있었다·
레이첼은 요리에 흥미가 없었고 렌들러 영감은 요리에 젬병이라 손을 대지 않았다·
즉 다른 누군가가 1층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일 터·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짐작은 되지만 그것이 믿기지 않았고 아리엘과 난 조심스레 1층으로 내려가보았다·
탁탁·
바스락·
계단을 내려갈수록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들·
분명 요리를 하고 있는 소리였고 무언가 조심스런 소리였다·
물건을 천천히 놓으며 생기는 느린 소음·
이따금씩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찾아오는 정적·
잠시 그렇게 모든 것을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이는 소리까지·
요리를 하고 있는 이는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있었고 그것이 2층에 잠들어있는 우리들을 깨우지 않기 위함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이윽고·
1층에 내려왔고 극강의 존재감을 뽐내는 음식 냄새가 우릴 반겼다·
그리고 가까이서 맡으니 육향이 익숙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건··· 붉은 롱거의 뒷다리 냄새인데?’
렌들러 영감이 그랬다·
다른 냄새는 잘 분간하지 못 하면서 몬스터 냄새는 기가 막히게 골라낸다고·
그 덕에 11월의 북부령에서도 먹을 거리가 떨어질 일은 없는 거 같다고 말이다·
그런 나의 후각에 걸린 건 붉은 롱거의 냄새였고 그렇잖아도 이곳으로 오며 붉은 롱거 몇 마리를 사냥해 식재료를 챙겨두었던 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곧·
아리엘과 함께 주방에 도착했고·
믿기 어려운 그리고 감격스러운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르미앙 윈터펠·
그녀가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 다름없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고 마비가 된 것처럼 경직되었던 몸도 뻣뻣하게나마 움직이고 있다·
그런 그녀가 큼지막한 붉은 롱거의 뒷다리구이를 식탁의 중앙에 올리다 우리와 마주치고 말았다·
“···!”
하마터면 요리를 식탁보에 엎지를 뻔한 르미앙이 놀란 얼굴로 급히 요리를 놓고는 급히 무언갈 적었다·
[미안· 최대한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내가 깨운 거야?]
따지고 보면 음식 냄새에 깬 것이니 르미앙이 깨운 것은 맞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많이 좋아졌어· 모두 덕분이야·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요리를 해봤는데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어·]
냄새만으로도 이미 그 맛이 훌륭하다 예상될 정도니 걱정은 스쳐갈 기우일 따름일 터다·
르미앙이 회복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맛이 어떠한지는 중요치 않았으니까·
짝!
“대-박! 이걸 에린시 아 아니! 대공녀님께서 준비하셨다고요? 몬스터 요리를 할 줄 아셨어요?!”
아리엘은 몬스터 요리 동지를 만난 것에 기뻐했고·
“회복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난 피해자가 되어야 했던 동지가 회복한 것에 기뻐했다·
그리고 잠시 후·
“허어! 소 소신 지금 뵙고 있는 이가 정녕 대공녀님이 맞으시옵니까?”
“깨어나셨군요·”
시끄러워진 1층에 잠에서 깬 렌들러 영감과 레이첼의 합류로 인해 제 3 북부대공녀께서 직접 차려준 아침 식사를 들 수 있었다·
[다들 정말 고마워요·]
붉은 롱거의 뒷다리를 들어 냅다 크게 한입 뜯었다·
“음···!”
6개월 전으로 돌아가는 듯한 그날의 맛·
기권 선언으로 한입 밖에 먹지 못 한 것이 그 이후로 같은 맛을 맛보지 못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단번에 날아가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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