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3
“····”
“····”
어색한 기류가 온천의 열기를 가르며 우릴 덮친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 난생 처음 해보는 야외 온천을 여성과 단둘이 하게 되리라곤 눈곱만큼도 예상하지 못 했고 예상치 못 한 상황이 빚어낸 난처함에 할 말을 잃은 입술은 습한 공기에도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난처함이 불쾌하다거나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성숙한 여성과 혼욕을 한다는 야릇한 상황이 낯뜨겁고 쑥스럽고 당황스러워 그러는 것일 뿐·
긴장감에 절로 넘어가는 침이 혹여나 입맛(?)을 다시는 음흉한 변태로 보일 것 같아 조심스럽고 오해를 피하기 위해 외면하고 있는 시선이 곁눈질을 위한 개수작으로 보이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그나저나·
‘우리 스승께서 온천욕을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군·’
중세시대는 역사적인 역병이 창궐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역병으로 인해 뜨거운 물에 몸을 씻는 걸 터부시여기던 시대이기도 했다·
열기로 인해 열린 모공으로 역병이 침투한다는 이유로써 말이다·
중근세에 가발이 성행했던 이유가 비위생적인 관계로 퍼진 매독으로 인해 피부 발진과 탈모가 생기며 그것을 숨기기 위함임을 향수가 성행했던 이유가 악독한 체취를 숨기기 위함이라고 하니 오죽하겠는가·
물론 그것은 현실에 입각한 과거의 역사일 뿐이었고 중세판타지물 특히 로맨스판타지물에 그 시대상을 접목하기엔 현대인의 위생 의식과 너무도 동떨어져 소설적 허용으로써 주요 등장인물들은 몸의 청결에 신경을 쓴다·
꾀죄죄하고 냄새나는 주인공들을 찬양해줄 독자는 없을 테니까·
로판물에서 남녀의 ‘목욕’을 통해 벌어지는 재미난 에피소드는 빠질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평소에도 온천욕을 좋아했었나봐?”
보통 이러한 낯뜨거운 상황은 여성들이 더욱 꺼려하고 불쾌해하기 마련인데 그러한 것들을 이겨낼 정도로 온천욕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건가 싶어 물었다·
음식도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하듯 온천욕을 경험했던 기억이 인내심을 이겨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남녀간의 혼욕이란 것을 레이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데·
“처음입니다·”
의외의 답이 들려왔다·
“처음?”
“네· 보기만 했었지· 몸을 담궈본 적은 처음입니다·”
앞서 얘기했듯 시대적 역사가 청결과 위생에 대해 무지했을 뿐이다·
로맨스판타지물·
소설 속 이 세계는 불을 이용해 뜨겁게 데운 물을 이용해 몸을 깨끗이 씻는다·
여의치 않을 땐 당연히 차가운 물에 씻기도 했고·
레이첼이 얘기한 처음이란 것은 자연 온천에 몸을 담궈본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군·”
“왜 그러십니까?”
“아· 뭐· 그냥 물어본 거야·”
“공자님은 처음이 아니신가 봅니다?”
레이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본 채 답을 해주었다·
“나도 처음이야·”
전생 현생 통틀어 처음 즐겨보는 온천·
전생에선 온천은커녕 집에 작은 욕조 하나 없었고 난방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해 온수보다 냉수로 씻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그런 내게 노천탕이란 것은 상상 속에서나 즐길 무릉도원과도 같은 곳·
현생에선 온천을 즐길 곳이 없어 이제야 접하게 된 것이었고 살갗을 따스히 감싸던 온기가 몸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그 속에 쌓인 노폐물들을 씻어내고 허해진 속을 어루만지는 것만 같은 느낌은 분명 무릉도원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황홀경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빗소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태아 시절 어머니 뱃속에서 듣던 소리와 비슷하여 좋아한다는 설이 있듯 따스한 양수 속을 유영하는 느낌이 이 온천과 비슷해 활홍경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러한 생명적 고찰이 스쳐가던 순간·
또 다시 의외의 답이 들려왔다·
“다행이군요· 첫 경····”
“응?”
그리고 그제야 레이첼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레이첼이 노천탕에 발끝을 담그던 순간부터 내 시선은 방향을 잃은 채 이곳저곳을 훑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제야 볼 수 있었다·
홍조가 깃든 레이첼의 얼굴을·
고된 훈련에도 얼큰하게 오른 취기에도 연한 붉은색 한번 깃들지 않던 무덤덤한 얼굴이 온천의 열기로 인해 붉게 물들어있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고 있을 온천의 열기에 꽤나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네 네?”
“다행이라고? 왜?”
“아··· 아닙니다· 흘려들어주십시오· 말이 헛나왔습니다·”
성격 자체가 늘 침착하고 무덤덤해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레이첼은 당연히 당황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것이 호위기사의 기본 덕목이라며 말이다·
말을 더듬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고 말을 더듬은 순간부터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늘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던 시선이 어긋나버린 것 또한 처음이었다·
내가 아닌 레이첼의 회피로 인해 마주하고 있던 시선이 어긋나버린 것은 말이다·
새빨갛게 물든 얼굴과 당황한 듯 잘근 깨무는 입술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수면 위를 내려다보는 동공이 방황하는 것까지·
흐트러짐 하나 당황한 기색 한번 보이지 않았던 철인 스승께서 보인 반응 중 가장 사람다운 것이었고 그래서일까·
제자로써 스승을 골려주고 싶다는 유치한 생각이 든 것도 처음이었다·
이 어색한 순간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좋은 요깃거리가 되어줄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다행이다 뒤에 첫 경? 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건 무슨 말이야?”
흐지부지 끝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분명 레이첼은 ‘첫 경’이라고 했고 뒤에 이어질 말들을 놀란 얼굴로 삼켰었다·
직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었고·
다행이다 는 무슨 뜻이며 뒤에 이어질 말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제껏 온천욕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던 레이첼이 외간 남자와의 혼욕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성급한 갈망이 있었던 건지 의아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요근래 보이고 있는 행동들이 다소 이상했다·
흐름 상 어울리지 않았던 대련 신청에 이어 압박 붕대를 푼 제 가슴팍으로 나를 의도적으로 끌어당겼고 아리엘의 향기가 난다면 몸을 섞었냐는 질문도 했었다·
그리곤 금욕에 관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를 거다 라는 의아한 답변도 남겼었고·
함께 한 지가 어언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그 반년간 하루도 떨어지지 않았던 터라 레이첼의 이상 반응들에 대해 알아채지 못 하는 게 이상할 터였다·
다만 그 반응들이 정확히 무엇을 꼬집는 것인지는 애매해 무어라 반응을 하지 않았었다·
설레발보다 더 무안한 것은 없는 법이니까·
의문스런 반응들에 이어 혼욕이란 의문스런 행적까지·
틈을 타 스승을 골리다보면 의문들을 해소할 건덕지가 건져지지 않을까 싶어 그리 능글맞게 물었고 잠시 뜸을 들이던 레이첼이 홍당무와 같은 얼굴로 답을 토해낸다·
“···첫 경사···· 아 아니! 첫 경우···? 아니·······”
하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 하는 레이첼·
수면 위로 고개를 푹 숙였지만 수면에 비친 레이첼의 입술은 제 역할을 해내지 못 하는 것을 탓하는 듯 잘근 씹혀있었다·
“첫 경사? 뭐 이런 작은 마을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 경사이긴 하지·”
“····”
“첫 경우? 뭐 이런 작은 마을에서 온천을 즐기는 건 확실히 드문 경우이긴 하지·”
“····”
이제껏 스승에게 깨지고 구르던 제자의 소소한 반란이랄까·
더욱이 냉혈철인처럼 냉정하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레이첼이 얼굴까지 붉혀가며 당황해하는 모습은 없던 장난 욕구도 불러일으킬 정도로 허술한 인간미가 있었다·
본래 완벽함 속에 깃든 허술함이 눈에 돋보이듯 감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건조하기만 했던 레이첼의 허술한 면에 사제 지간의 벽이 낮아지고 고용 관계가 말랑해지면서 유치한 장난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약을 올리듯 꼬투리를 잡으며 우스갯소리를 했고 레이첼 주변의 수면이 작은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마나의 진동이 빚어낸 파동이었다·
“····”
이쯤에서 제자의 반란을 그만두어야겠다 싶은 찰나·
“너무 뜨거워서 안되겠습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벌떡!
레이첼이 몸을 일으켰다·
수면이 굴곡진 몸결을 따라 솟구친다·
이어 그 솟구친 물결이 몸결을 따라 다시금 수면으로 떨어질 때 스승의 허술한 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을 갈고 닦은 검술과 호위술 이외엔 허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기도 했고·
여하튼·
“····”
인지부조화가 일 정도로 두 눈 앞에 나타난 것이 믿기지 않아 시선을 뗄 수가 없었고 흡사 그리스 신화의 여신이 강림한 것은 아닐까 싶은 아름다운 여체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전장을 호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백옥의 피부·
여인의 성숙함을 과시하는 두 개의 물방울·
물방울의 언덕 위에 만개한 두 개의 분홍빛 벚꽃·
단련된 육체가 뽐내는 건강한 아름다움·
그야말로 여신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육체미가 멋대로 시선을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레 레이첼···?”
신들의 목욕탕에 감히 몸을 담군 것이 노여움을 사 면수건이 녹아버린 것일까·
신들께서 제 영역에 침범한 가련한 중생들을 골리려 묶인 면수건을 풀어버린 걸까·
무엇이 되었든 지금 이 순간부터 사제 지간에 큰 폭풍이 예고됨은 피할 수 없는 일일 터였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본의 아닌 시선에 이상함을 감지한 레이첼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시선을 내렸고·
수면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한 장의 면수건을 볼 수 있었다·
곧이어·
레이첼의 비명이 뒤뜰 가득 울려퍼진다·
“꺄악—!”
그리고 그 비명은 원작 엘든의 기억까지 통틀어 처음으로 듣는 것이었다·
한 명의 기사가 내는 함성이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써 내는 수줍은 비명이었으니까·
“보 보지 마십시오—!”
으음·
어 어떡하지····
“나? 모 못 봤어!”
“네?! 못 봐서 아쉽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 안 봤어! 진짜로!”
이미 다 봐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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