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2
꽤나 멋지게 베이스를 잡아 든 아이는 시연용 스툴에 앉아 손을 잠시 풀더니 프렛리스 베이스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음악이라기보다는 뚱땅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치고 있는 곡 자체는 ZUTOMAYO의 잔기(残機) 인트로 같지만 영 음정이 맞지 않았다·
“소리가 이상한데·”
“뭔가 이거 엄청 힘드네· 소리도 잘 안나오고· 프렛이 없어서 그런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들· 베이스를 연주했던 아이는 자신만만하게 프렛리스에 도전을 해 놓고 소리가 이상하자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그는 그 아이의 실력에 꽤나 놀랐다·
‘치는 폼을 보면 프렛리스를 한번도 안 쳐본 애 같은데 뭔가 예사롭지 않네·’
프렛리스 베이스(Fletless bass)는 넥 중간에 박혀 있는 프렛이 없는 형태의 베이스를 말한다· 프렛이 없음으로써 좀 더 클래식한 소리를 낼 수 있지만 프렛이 없음으로써 훨씬 더 정확한 운지와 음정 감각을 요구하는 악기가 바로 프렛리스 베이스다·
그렇기에 저 아이가 저렇게 연주를 하는 것은 갈피를 못잡기보다는 오히려 대단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프렛리스를 처음 쳐 보면서도 그래도 뭔가 음악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내니까·
실제로 슬랩과 비브라토를 적절히 넣으면서 치는 폼을 보면 꽤나 베이스를 잘 치는 아이로 보였다· 소리가 잘 나지 않은 것도 프렛리스 베이스에 적응을 못했기 때문이겠지·
“それはフレットのないものなので、そうなんです。もともとそのような楽器です·”
“어···하이? 음? 뭐라는 거야?”
“그건 프렛리스라서 그렇다는데요· 원래 그런 악기래요·”
“오···아리가토 아리가토·”
키가 큰 아이는 그런 말을 한 후 베이스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뿔뿔히 흩어지며 악기를 막 보러 다니는 아이들· 그는 처음과는 달리 이 아이들에게서는 뭔가 큰 매출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개중 가장 이쁜 아이가 붉은 색 기타를 들고 왔을때 더욱 그러했다·
캔디 애플 레드의 57년 아메리칸 빈티지 리이슈의 펜더 스트랫·
그는 그 기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고 싶었다· 데이비드 길모어의 세컨 기타로 유명했던 모델이라던가 길모어는 EMG 픽업을 사용했다던가· 하지만 상대는 전혀 일본어를 못 알아듣는 것 같은 기색이라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랬다· 그가 일본어로 말해도 그저 무표정으로 듣기만 할 뿐이었기에·
‘뭔가 아깝네· 저런 기타를 집은 것 자체가 인연일텐데· 역사를 알고 치면 좀 더 살 생각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손짓발짓을 하는 여고생의 주문에 맞추어 시연용 세팅을 도와주었다· 자신이 톤을 맞춰 줄까 제스쳐로 물어보았으나 고개를 저은 후 대충 앰프를 만지작거리며 톤을 만드는 여고생·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정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Pink floyd의 후기 명곡 중 하나인 Sorrow의 솔로였기 때문이다· 앰프 하나로만 만들어낸 블루지한 톤 위에서 펼쳐지는 강렬한 연주·
딱 봐도 성인은 아니어보였다· 그가 보기에는 이런 기타보다는 오히려 남자애들과 친할 것 같이 생긴 외모· 혹은 아이돌 쪽으로 데뷔해서 K팝을 부른다거나 할 것 같은···그런 고등학교에서 인생의 청춘을 보내고 있을 게 뻔한 그런 외형의 아이·
하지만 그 아이의 손에서는 여자아이가 치고 있다고는 믿기 힘든 연륜이 느껴지고 있다· 한 음 한 음도 허투루 치거나 내버리지 않고 꼼꼼히 감정을 담아내는 대가의 영역에 다다른 것 같은 그런 연주·
약 2분 혹은 3분···그 정도의 연주가 펼쳐지는 동안 소리를 듣고 놀란 사장이 카운터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러다 연주가 끝나자 사장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박수를 쳤다· 작은 박수소리가 가게에 울렸다·
“驚くほどなんだけど···ギターはいつから弾いていたのか分かるかな?”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상대· 그는 사장에게 이야기했다·
“사장님 이 친구 한국인이에요· 일본어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어이쿠·”
난감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장· 얼마전부터 자신의 취미 밴드에 기타가 없다고 그러더니···보아하니 그 밴드에 기타로 채용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입맛을 다시는 사장을 두고는 그는 핸드폰의 번역기를 꺼냈다·
[그 기타는 펜더 57년 리이슈 스트랫입니다· 83년에 재복각된 모델이구요· 데이비드 길모어 씨가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죠· 캔디 애플 색깔이니 컬러도 동일합니다·]
그가 쓴 글을 보고는 자신도 핸드폰을 꺼내어 번역기를 키는 아이·
[가격은 얼마인가요?]
[50만엔입니다· 유명한 컬러이기도 하기 때문에 꽤나 비싼 제품이죠·]
그가 보여준 글을 보고는 망설이는 듯 팔짱을 끼는 아이· 그는 뭔가 줘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치 슬램덩크의 신발가게 주인이 하나미치(花道· 강백호의 원작 이름)에게 당시에도 가치가 천정부지로 높던 조던 1 브레드를 선물해줬듯이·
하지만 슬램덩크는 창작물이고 그가 맞이한 것은 현실이다· 50만엔짜리 기타를 냉큼 줘버리면 그는 몇달동안 숙주만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아이가 그와 연관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그럴 수는 없었다·
“왜 그러니? 괜찮은 악기 있어?”
“있는데 500만원 정도 하네요·”
“음···비싸긴 하다·”
아이가 이모인지 보호자인지 모를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살짝 어질러진 기물을 정리했다· 아까의 시연 소리를 듣고 가게에 기웃대는 사람들이 꽤나 늘어나 북적이는 가게·
그런 와중에 아까 프렛리스를 연주했던 아이가 다른 베이스를 가지고 내려오며 외쳤다·
“수연아! 나 이거 살래·”
“사면 되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 아이가 가지고 내려온 것은 리켄베커의 4001 모델이었다·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초기 모델· 연식이 오래 되어 하얀 색이 살짝 옅은 크림 색으로 변하기까지 한 왼손용 베이스·
“너 그거 원래 쓰는 베이스랑 톤이 좀 다를 걸· 펜더 프레시전 쓰다가 리켄베커 쓰면 어색할텐데·”
“톤이야 뭐 이펙터 먹이면 되지· 그보다 이거 엄청 이쁘지? 이 크림색이 진짜 이쁘다니까· 약간 아이폰 크림색 느낌·”
뚱해보이는 기타의 아이와 활기차게 싱글거리는 베이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못 알아듣겠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키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뭔가 의견을 구하는 듯 했다· 둘은 이런저런 소리를 하며 옥신각신하더니 이내 대화를 멈추고 그에게 번역기를 보여주었다·
[잠시 둘이서 연주를 해 봐도 될까요? 한번 맞춰볼 수 있을까 싶어서요]
“えーと···”
그냥 시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맞춰본다라· 그는 잠시 망설이다 사장에게 물어보았다· 사장은 흔쾌히 허락했고 그는 뭐 어떤 연주를 보여주려는지 궁금해하며 둘의 앰프 세팅을 도와주었다·
“어떤 곡 할 건데?”
“잔기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거 가드 때문에 슬랩이 안 되네· 그냥 무난한 거 해야 할 것 같은데·”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둘은 이내 잠시 리듬을 맞추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두번째로 놀랐다·
그리고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들어와 있던 관객들의 대부분이 두 여고생을 쳐다보았다·
감미로운 소리와 함께 시작된 곡· 음악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 이곡!”이라고 말할 것이고 서브컬쳐계에 지식이 있는 사람들 또한 “아니 이곡을?” 이라고 말할법한 바로 그 곡·
나지막하면서 아름다운 기타 소리로 시작하는 인트로·
그리고 피크와 손가락을 동시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피킹과 함께 쾌활한 멜로디가 시작되며 동시에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가 치고나온다· 왠지 [TO BE CONTINUED]라고 생긴 자막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느껴진다·
“I’ll be the roundabout~”
‘맙소사·’
기타를 맡은 아이의 보컬· 그는 첫 구절을 듣자마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을 찍어야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온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한국 여고생 2명이 갑자기 걸어들어와서 시연을 한답시고 둘이서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그게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에 유명한 서브컬쳐 밈 중 하나인 ‘Roundabout’일 확률· 그리고 이 둘이 미치도록 호흡이 잘 맞는데다가 연주까지 엄청 잘 할 확률·
그런 확률이 존재하기나 하겠는가?
이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면 가게 홍보가 엄청날 정도로 될 것은 매우 당연해보였다· 사장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급하게 촬영용 장비를 가져오며 그에게 눈짓을 했다· 어른에게 촬영 허가를 받으라는 듯·
The words will make you out ‘n’ out
I spent the day your way
“あの、すみませんが···”
“OK You can record that·”
매우 죄송한 자세로 다가갔지만 인솔자처럼 보이는 미녀는 싱글싱글 웃으며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빨리 녹화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감사함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는 빠르게 장비를 세팅하고 녹화를 시작했다·
Call it morning driving
through the sound
and In and out the valley
왠지 모르게 점장은 외부 스피커까지 작게 틀며 노래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그 소리에 이끌려 온 사람들은 이게 뭐냐는 듯 웃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듯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의 가운데에서 여고생 둘은 주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둘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일행으로 보이던 나머지 둘은 약간 심술이 난 표정이었지만·
* * *
“재밌었다·”
악기점에서 펼쳐졌던 웬 뜬금없는 연주를 마친 후· 저녁을 먹고 방에 모인 상태에서 뜬금없이 이서가 뱉은 말이었다· 상당히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진짜 재밌었던 모양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자기들만···그렇게 재밌게 연주하고· 우리는 세팅이 필요한 악기니까···내버려놓고·”
“그래· 드럼과 키보드는 배려도 안 해주는 거야? 사람도 아니라는 거? 우리는 설치형 악기라서 천민이라 이거지?”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왜 갑자기 그렇게 사람을 몰아가는 거야·”
투닥거리는 세 명· 명전은 한가롭게 남의 침대에 누워 세 명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이 사태에 누구 책임이 크냐?” 같은 헛소리나 하고 있다가 잠시 명전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
“할 거 없으면 잠이나 자· 나도 가서 자야겠다· 엄마랑 이야기나 하다가·”
“할 거 있거든· 내가 아까 방에서 막 찾아보다가 찾아냈거든·”
이서는 그렇게 이죽이더니 서랍을 뒤적거리다 뭔가를 보여주었다· 술이 우르르 들어가 있는 서랍· 야마자키 글렌리벳 잭다니엘···명전은 미성년자 숙박 방에 이런 게 왜 들어가 있는 건지 매우 궁금해졌다·
“우리 이거 한잔만 마셔보자·”
“네??”
“아까 서하 언니랑은 합의봤거든· 한잔씩만 마셔보자고·”
현아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 하지만 서하는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마치 범죄행위라도 벌이는 듯한 그런 동작·
“미성년자가 술 마시려고?”
명전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이서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너도 옛날에 마셨잖아· 한번에 막 소주 두세병씩 까고···”
논리정연한 반박· 명전은 그저 입을 다문 채로 일탈을 원하는 두 사람이 모의하는 것을 지켜보다가···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거 마셔봐야 별 맛도 안 나· 맛도 쓰기만 하고· 거기에다가 위스키니까 아마 니들은 바로 뻗을 걸·”
“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그럼 어른들은 왜 술을 퍼마시고 너도 예전에 왜 그렇게 먹었던 건데? 이게 뭔가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술을 먹는 게 아닐까?”
뭐라 말해도 들을 것 같지 않은 이서· 명전은 ‘니가 좀 말려봐라’ 라는 표정으로 서하를 쳐다보았지만 서하는 아닌 듯 하면서도 흥분된다는 표정으로 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글렀구만·’
“야· 내가 먹지 말라고는 안 할게· 그 대신 그거는 진짜 먹지 마라· 그거 까면 몇십만원 내야돼· 차라리 저기 냉장고 안의 맥주나 그런 걸 마셔·”
“그래? 니가 먹으라 했다?”
승낙을 받았다는 듯 신나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든 두 사람·
자신은 먹지 않겠다며 멀찍이 피신한 현아를 두고 언제 사왔는지 알 수 없는 새우깡(한국 과자가 도대체 왜 있는 건지 명전은 알 수가 없었다)을 테이블에 깐 채···
이서와 서하의 (불법) 음주 파티가 시작되었다···!
* * *
자기 전 혜인은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수연은 왜 안넘어오는지 궁금해 아이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끼익대며 살짝 열리는 방문· 그 틈 사이로 보이는 뭔가 죄 지은 듯한 현아의 표정·
“현아야 왜 그래?”
“어···그···”
“애들은 자니?”
“그게···”
영 이상해보이는 현아의 모습에 혜인은 살짝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에 딸려가며 “히에엑···” 하는 현아·
그리고 들어간 방· 별 문제는 없었으나 아이들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얘들 왜 이러니?”
“저기···냉장고에서 술···꺼내 마셨어요·”
어처구니 없는 현아의 대답· 혜인은 놀라 수연을 쳐다보았다· 아니 아이들 부모님이 자신을 믿고 맡겼는데 애들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그리고 수연이는 그걸 왜 안 말렸는가·
“수연아· 그럼 말렸어야지·”
“제가 어떻게 말려요· 저도 옛날에 한 일이 있는데· 뭐라 해도 안 들어가지고·”
그런 수연의 말에 혜인은 잠시 침묵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지금 상황을 보면 둘이서 맥주 500짜리 한캔조차 다 못 마신 채로 완전 헤롱대며 침몰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
그리고 그녀의 딸은 맥주 한캔이고 뭐고 소주를 병으로 들이부은 전적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어떻게 저 애들을 말릴 수 있겠는가· 자기도 안 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래도 뭐 이번에 한번 마셔봤으니 버릇 고치겠죠· 둘이서 한 캔도 못 마신거 보니까 뭐···이제 더이상 술 같은 건 입에도 안 대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는 수연을 보며 혜인은 이마를 짚었다· 술을 잘 아는 척 하고 있는 인생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의 딸은 미성년자다· 원래는 저렇게 한가롭게 ‘술 많이 마셔본 사람’의 태도를 취하고 있으면 안 된단 이야기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삽입곡
ZUTOMAYO – 残機(잔기)
Yes – Round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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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피소드용 표지 외주를 넣었습니다!
이서의 수영복 일러스트에요· 기존 이서의 일러스트 작가분이 이번에도 수고해주실 예정입니다·
바라건데 해수욕장 편과 타이밍이 맞물렸으면 좋겠습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요·
러프가 도착한 상태인데 한번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