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6
이서가 급습으로 정신공격을 하긴 했지만 명전은 결국 그 물건을 샀다· 아주 먼 옛날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물건은 이제 그것밖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조차 이제는 어렴풋이밖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 돌아가신 것에 슬픔보다는 그저 좋은 곳에 가시라 곧 나도 가겠다···하는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결국 한번쯤은 어린 시절을 그려워하기 마련이다· 명전 또한 사람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진짜 그거 사게?”
···자꾸 옆에서 공격해대는 이서를 보면 그냥 다 때려치고 싶었지만· 정작 발화자는 아무런 의도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 더 짜증났다·
“아니 살 수도 있지·”
“좀 너무 낡아보이는데···집에 가서 꼭 빨아· 요즘 빈대가 많다잖아· 혹시 모르지·”
추억을 곧 빈대로 만들어버리는 무자비한 여고생의 발언· 명전은 이서에게 다가가 옆구리에 정권을 질러넣고는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자 계산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혜인이 입을 열었다·
“수연아· 너도 뭐 찾았니?”
“네·”
명전이 보여준 인형을 본 혜인은 추억에 잠긴 눈길로 살짝 침묵하다 말했다·
“확실히 요즘 레트로한 게 유행하긴 하나보네· 엄마 어릴 때 봤던 만화인데 그때도 이미 이 만화는 좀 오래됐었거든·”
“···엄마도 아세요?”
“응· 그래도 엄마가 어릴 때는 만화를 좀 봤단다· 현아 정도는 아니지만· 그때도 상당히 오래 된 만화였어·”
추억이네~ 하는 혜인의 말· 하지만 명전은 불시에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 놈들이 진짜·
하지만 반격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상대는 사실 때린 것이 아니니까· 명전이 혼자 공격당하고 혼자 열받을 뿐이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갑자기 화내면 그냥 미친 사람 취급 받을 뿐이다· 그는 아직 청춘의 상징 낭랑18세조차 되지 않은 여자 고등학생이다· 느닷없이 나이로 공격해도 문제 없는 오히려 나이로 공격하는게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다···
* * *
“여기 있습니다· 이외에 더 필요하신 물건 있으실까요?”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와 함께 악기를 내 주는 점원· 명전은 스트랫을 받아들었고 이서는 “이거 혹시 빼 줄 수···디스· 디스 아웃· 테익 디스 아웃· 캔···캔유?” 같은 소리를 하며 리켄배커의 픽업 커버를 떼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나도 기타 할 걸·”
현아와 서하는 좀 아쉬워하는 기색이나 어쩔 수 없었다· 무겁긴 해도 어찌되었든 핸드캐리가 되는 베이스와 기타와는 달리 키보드와 드럼은 핸드캐리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구매는 했지만 항공택배로 부쳐주기로 했기에 한국에 가서야 받을 수 있는 상황·
“그런데 우리 생각해보면·”
“응?”
“굳이 이거 지금 살 필요가 있었나· 가는 날 사는 게 낫지 않았을까? 들고 다니는 거 피곤할텐데·”
문득 명전의 뇌리에 든 생각· 구매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이제 에노시마랑 하코네를 가야 할 텐데· 그동안 계속 이 악기를 가지고 다녀야 할 것 아닌가· 그 생각에 명전은 자신도 그냥 항공택배로 부쳐달라고 할까 갈등을 했다· 굳이 이 스트랫이 필수인 것도 아니라서·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러네· 마지막 날 샀으면 그냥 들고 가도 되는 거긴 했네·”
베이스 개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이서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뭐 들고 다니면서 연습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여행에서 연습까지야···”
명전과 이서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현아는 살짝 고민하는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러다 둘의 이야기가 끝나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그녀·
“제가 생각해봤는데···”
“응·”
“버스킹···을 하는 건 어떨까요···?”
“버스킹?”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현아· “일본이 버스킹으로 유명한 나라기도 하고 시부야가 또 버스킹의 성지잖아요·” 같은 말들이 이어진다· “괜찮은 것 같은데?” 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서·
하지만 명전은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버스킹이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문제였다·
“아니 우리 장비가 없잖아· 앰프도 없고 배터리도 없고·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되지·”
“아 그러네·”
버스킹이라고 하면 기타 하나만 들고 어디 거리에 앉아서 띠리링 치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정규 공연만큼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장비가 많이 필요하다·
명전이 국내에서 버스킹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혜인이 장비를 실어다줬기 때문이었다· 어쿠스틱을 쳐도 앰프가 필요한데 일렉기타와 베이스는 어떠할까·
“게다가 키보드와 드럼도 못 치잖아· 결국 우리 둘만 버스킹을 하자는 건데 그럴 바에는 혼자 하든가 안 하지· 네 명이 모여서 밴드인데 두 명만 하면 큰 의미 없잖아·”
그런 명전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명전을 껴안는 서하· 그리고 엉거주춤 다가오는 현아와 이서· 갑자기 벌어진 포옹 세례에 싱글벙글 웃으며 혜인이 사진을 찍는 사이 떨어진 현아가 입을 열었다·
“그 대여를 하는 건 어떨까요···”
“대여?”
“그럼 또 키보드랑 드럼이 문제가 있지 않나? 앰프는 작은 거 대여해서 들고간다 쳐도···”
현아의 말에 명전은 다시 한번 부정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그도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만큼 동참하고 싶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지 않은가· 이럴 땐 딴지를 거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의 말에 고심을 하는 밴드원들· 그러던 와중 서하가 말을 던졌다·
“···여기 사람들에게 부탁해보는 건 어때?”
“저희야 뭐 괜찮죠· 오히려 부탁을 드리고 싶은 입장인데요·”
“그런가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점원· 현아는 돌아서서 가능할 것 같다는 사인을 보냈다· 좋아하는 밴드원들의 반응 사이로 이어지는 점원의 말·
“원래라면 저희가 뭐 버스킹 장비 대여 같은 건 안 해드리긴 하거든요·”
“네? 그럼 어째서···”
“그런데 어제 영상 하나 찍고 가셨잖아요· 그게 저희 악기점 유튜브에 올렸는데 하루만에 조회수가 만이 넘었더라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 그거 보고 왔다는 손님도 한두분 계셨고· 꽤나 홍보가 된 거 같아서·”
조회수 1만이면 그렇게 큰 수치는 아니다· 그룹 사운드의 평소 조회수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수치· 그러나 이 악기점의 유튜브는 그만큼의 조회수를 기록한 적이 없었기에 한번 더 특수를 노리고 장비를 빌려주겠다는 것으로 보였다·
“어 그럼 저희가 구매해서 맡긴 키보드나 드럼 같은 것들도···”
“네 가능합니다· 그런데 일단 금액적인 부분은 좀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구요···”
* * *
적당한 금액에서 협상을 마친 뒤· 악기점의 점원은 가게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차를 타고 그들을 시부야로 데려다주며 몇가지 이야기를 했다· 주로 버스킹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일본에서 버스킹을 하시려면 버스킹 라이센스가 있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경찰이 여기서는 버스킹을 할 수 없다고 쫒아냅니다·”
그러면서 점원은 몇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식 버스킹 라이센스는 매년 몇번 밖에 시험을 보지 않는다는 것· 올해 쳐도 당장 나오는 게 아니라 다음 해에 나온다는 것· 그러므로 시부야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허가로 쫒겨다니면서 공연을 한다는 것·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하나요? 지금 이거 다 펼쳐놓고 하게 되면···”
“완전 중심지는 아니고 저희가 좀 잘 알고 있는 스팟이 있어요· 그쪽 경찰도 저희가 좀 알구요· 거기서 공연하면 그래도 한 3~40분 정도는 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상은 무리겠지만요·”
그런 점원의 말과 달리 점원이 그들을 내려준 것은 번듯한 번화가였다· 어느 사람이 이미 먼저 공연을 하고 있는 곳· 점원과 현아가 그쪽으로 가 협상을 하고 있는 동안 명전은 이놈의 더위는 가실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동인구가 넘쳐나 공연을 하면 충분히 주목을 받을 만한 곳·
‘일본에서 버스킹을 하게 되다니 참 살다 보면 별 일도 다 있구만·’
명전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이야기를 끝낸 현아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한 10분 쯤 후에 끝난대요·” 라는 말을 들어보면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쌓아올려지는 드럼· 적절한 각도로 세팅되는 앰프와 키보드· 명전은 기타에 선을 꽂으며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다· 방금 전 이전 타임 버스커가 공연을 끝내고 간 뒤로부터 그들에게 꽂히는 기대 섞인 시선·
‘비주얼적으로 좀 기대할만 하기도 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그냥 버스커 한명이 공연 준비 하느라 주섬주섬 뭔가를 세팅하고 있다면 그 풍경은 절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고생 4명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네명이 모두 이쁜 아이들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약속이 있는 사람들조차 “쟤들 뭐 하는지 보자·” 라며 발길을 멈추지 않을까? 실제로도 그런 느낌이었고·
“세팅 다 되었습니다!”
점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버스킹용 작은 앰프 3대· 간이로 세팅된 드럼과 신디사이저 키보드· 버스킹 관련 노하우가 있는 모양인지 점원은 작은 믹서에 요리조리 앰프와 마이크를 연결해 세팅을 마쳤다· 4가지 악기 모두 정상적으로 사운드가 나오는 상태·
“뭐야 이 사람들 언제 다 왔지?”
이서의 중얼거림에 명전은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이서의 말처럼 노래 한번 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다·
“글쎄 뭐· 나 같아도 얘들이 도대체 뭘 하는지 좀 궁금하긴 할 것 같은데·”
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혜인 쪽을 쳐다보았다· 현지에서 구매한 카메라를 세팅하다가 OK 사인을 보내는 혜인·
“어떤 곡 갈 거야?”
이서의 질문에 명전은 기타를 촤르륵 튕기며 말했다·
“글쎄· 지금 우리 비주얼은 걸즈밴드 느낌 아닌가· 기대를 배신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일단 가벼운 곡 부터 할까?”
“그것도···괜찮을 것 같은데요···”
“사일렌트 사이렌이나 즛토마요나 아도 아무튼 뭐 그런 쪽의 가벼운 계열이 좋을지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 그 이야기를 끊으며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뱉은 것은 서하였다·
“아니 내 생각에는 좀 더 테크니컬하고 화려한 곡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 아무래도 일본인들이 그런 쪽을 좀 좋아하니까·”
그 말에 명전은 잠시 고민했다· 꽤나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전 매력도 좀 노릴 수 있고·”
그리고 그 말을 듣자 명전은 자신이 어떤 곡을 쳐야 할지 감이 왔다· 아이들이 따라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같이 몇번 쳐 보긴 했던 최근에도 좀 쳤던 곡·
“기대감을 배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이서의 말에 명전은 피식 웃었다· 그럴 만 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런 류의 곡을 연주할 그런 타입의 밴드는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이 바로 ‘그룹 사운드’ 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신생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랑을 받아오는 것이기도 했다·
“가 보자·”
드럼 스틱의 신호가 시작되며 삼삼오오 모인 관객들이 “오오오~” 하는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시작된 곡은 처음에는 나른하다· 혹자는 서정적이라고 할 지도 모르고 끈적이는 연주라고도 묘사할 수도 있다· 이게 맞나···하는 눈치를 보내는 대다수의 관객 사이로 곡을 알아본 것인지 살짝 흥분한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 여러모로 약간은 지루한 파트·
“뭐야···”
“걸즈 밴드 아니었어?”
“무슨 곡이지·”
처음의 기대감은 살짝 식은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타의 음정이 올라가는 그리고 점점 멜로디가 다이나믹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오오오오···하는 낮은 소리가 관객들에게서 새어나오기 시작하고·
이윽고 폭발한다·
수연의 기타에서 쏟아져나오는 디스토션 솔로· 아까와는 정 반대의 분위기로 진행되는 쏜살같은 속주·
“우와···뭐야?”
다들 연주에 집중한 즈음· 누군가가 흘린 외마디 소리는 관객들의 심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연주는 더 격렬해진다· 바이브레이션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기타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주법· 여고생 밴드에게서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운드가 그들을 휘몰아 덮쳐간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한 것은···기타가 부서지고 튜닝이 다 튀어버릴 정도의 아밍으로 인해 생겨난 믿지 못할 정도의 굉음· 마치 F1 레이스카가 질주하는 듯한 사운드와 함께···
폭풍과도 같은 태핑이 시작된다·
“흐어억-”
상상을 초월하는 손놀림의 속도에 누군가가 숨을 들이쉰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기타를 잡지 않은 채 맨손으로 흉내만 내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태핑·
그리고 한 템포 쉬었다가 한 번 더 폭풍우가 몰아친다· 이 정도면 끝났겠지 하며 열렬한 박수를 보내려 준비했던 관객들이 눈을 번쩍 떴다· 사람들의 군집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몰려들던 관객들은 여고생이 펼치는 믿지 못할 연주 기술에 숨소리조차 참은 채 경악하는 와중·
“Tender Surrender···”
있는 것이라곤 주변에서 들려오는 길거리의 소음· 그리고 밴드의 연주만이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입에서 흘린 곡명이 조그맣게 맴돌다 사라질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삽입곡
Steve Vai – Tender Surre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