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0
“내일이 귀국날인가?”
“응·”
수도 없이 몰려드는 난파남의 공세를 버텨내며 해수욕을 끝마치고· 호텔에 와서 저녁밥을 먹고·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올라 앉은 객실의 침대는 침대에 올라간지 1분밖에 되지 않는 현아를 잠에 처박을 정도로 푹신했다·
“벌써 자게?”
“어···으···아니 아니에요···”
서하의 말에 굼실굼실거리며 부스스 일어나 가부좌를 트는 현아· 명전은 객실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여름 바다 위로 빛나는 달· 그 밑으로는 하얀 색 달꼬리가 찰랑거리는 바다에 넘실거리며 부서져가고 있다·
“아니 진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내일이 귀국날이네· 우리 그동안 뭐 했지?”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이서· 명전은 가만히 그들이 이번 여행동안 한 일을 꼽아보았다· 악기를 사고· 아키하바라인가를 가고· 메이드 카페인가도 가 보고· 나카노인가도 가 보고· 라이브클럽도 가 보고· 버스킹도 하고· 수영도 하고·
“뭘 별로 한 게 없어· 엄청 많구만·”
명전의 말에 분노하는 이서· “여행 같은 걸 했어야 된다고!” 라고 날뛰는 것을 보면서 명전은 얘는 진짜 지치지도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며칠동안 제일 팔팔하게 걸어다니고 사진 찍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뭘 더 ‘여행 같은 걸’ 해야 된다는 건지·
“귀국하면 이제 뭐 하지?”
그렇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명전의 귀에 들어온 서하의 말· 그는 그 말에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글쎄 뭘 하게 될까·
“일단 밴드 활동은 할 수 없겠고·”
“···왜?”
명전이 그렇게 서하에게 대답하자 이서가 눈이 동그래진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 청천벽력이라도 들은 듯 한 표정에 명전은 살짝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억 안 나냐? 이번 여행 끝나고 현아 입시 들어가잖아· 밴드 할 틈이 어딨어·”
“···아~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헛소리 하고 있네·”
“아니거든· 기억하고 있거든·”
“기억하고 있는 애가 왜 그런 표정을 지어·”
“그냥 놀란 척 했던 거거든·”
이죽거리는 이서· 점점 하는 꼴이 유치해진다고 생각하며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당분간은 밴드 활동은 중지· 연습···도 뭐 단체 연습은 못 하겠지· 입시 일정은 언제까지야?”
“어···수시로 갈 거니까 대충 수능 전 까지는···”
“그럼 그때까진 아무것도 못 하겠네· 좋네· 휴식기 가지고· 맨날 쉬게 해달라고 그랬잖아· 이 참에 좀 쉬어·”
현아의 대답· 명전은 이 참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생각했다·
깨어난 다음 얼마 안 되어서 밴드를 결성했고 그 다음부터는 휴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적이 없다· 이 몸에서 깨어난지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시점이니 슬 명전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밴드원들을 위해서나 어찌되었든 쉬어가는 타이밍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글쎄···현아 입시가 끝날 때 까지는 쉬어야겠지·”
그 말에 으아아악! 하는 괴성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이서· 매일 연습 할 때 마다 “제발 좀 쉬게 해줘!” 라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 답게 온 몸으로 격렬하게 기쁨을 표출하는 모습·
“진짜 거짓말 아니지? 나 쉬어도 되는 거지? 평일 밤이나 주말이나 그럴 때 갑자기 전화와서 “야· 도망가지 말고 나와서 연습해라·” 라고 말 안 할 거지?”
“···그런 말도 했어?”
“아니 쟤가 자꾸 도망을 가니까·”
이서의 말에 살짝 질린 듯한 서하의 표정· 하지만 명전은 억울했다· 연습에 도망가는 놈이 이상한 놈이지 연습 나오라고 독촉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독촉···! 독촉 수준이 아니잖아! 얘 진짜 독하다니까· 우리 엄마한테도 전화 걸어서 “안녕하세요· 저는 이서 친구 하수연이라고 합니다· 이서가 연습을 빼먹고 도망을 갔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라고 말했다니까!”
“니가 도망을 안 쳤어야지·”
“그래도 부모님한테까지 전화하는 건 좀 그렇다···”
“애초에 도망을 안 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뭐 대단한 거 시킨 것도 아니고· 하루에 6시간밖에 연습을 안 하는데 그게 뭐가 힘들어·”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명전의 입에서 코끼리가 나오기라도 한 듯 반응했다· 뒤 쪽에서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현아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는 발언·
하지만 명전은 아주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당연하다· 명전이 한창 연습을 할 시절에는 하루에 12시간 14시간씩 기타를 튕겼다· 밥 먹고 기타만 치다가 밥 먹고 기타만 치다가 밥 먹고 기타 치다 자고· 어떤 테크닉을 연습해야 하는데 잘 안 될 때는 커피를 들이부으면서 무수면으로 그 테크닉만 연습하기도 했던 것이 명전이었다·
그런 명전의 시각에서 볼 때 지금 밴드의 아이들은 죄다 의지박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하루에 6시간 연습해서 뭘 하겠단 말인가· 기초의 기초밖에 배울 수 없는 시간인 것을···
꾸벅꾸벅 졸던 현아는 결국 버티지 못했는지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남은 것은 세 사람· 끝나가는 여행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셋은 나지막한 소리로 조곤조곤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뭘?”
“입시나 진로나 뭐나···”
그런 명전의 물음에 턱을 잠시 쓰다듬은 서하· 짧은 고민이 이어진 후 서하가 대답했다·
“글쎄· 나는 대학에는 흥미가 없어서· 아마 그동안은 나도 좀 쉬지 않을까? 연습도 좀 하고···아마 교회 밴드가 이번에 대회 나간다고 해서 거기 나가볼 것 같기도 하고·”
“언니 교회 다녔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서· 하지만 명전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드럼은 집에 둘 곳도 없는 악기다· 대체 어디에서 드럼을 잡아보고 연습을 해보고 했겠는가·
“안 믿어· 그냥 교회 밴드부에 있는 거지·”
“안 믿는데 그게 되는 거야?”
이서는 동성 친구가 “나 사실 레즈비언이었어·” 라고 한 말을 들은 것 마냥 반응했다·
“밴드부에 드럼을 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는데 뭐· 옛날에나 좀 다녔지 이제는 드럼 칠때랑 개인 연습 할 때 외에는 안 가·”
살짝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는 서하· 명전은 머리를 꼬고는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궁금했던 것을 이서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나?”
그 질문에 이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별 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별 생각 없는데·”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 말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별 생각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인생에 기회가 많다 한들 십대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헛되이 보낸 세월을 돌이키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돌이키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음악쪽으로 가보겠다던가· 예대를 가본다던가· 뭐 그런 진로에 대한 결정이 슬슬 있어야 될 시점 아니야?”
“어떻게든 되겠지 뭐·”
“너도 혹시 요즘 유행한다는 그 욜로족인가 뭔가 그거냐?”
그런 생각을 담아 진지하게 던진 질문· 그러나 그 질문에도 ‘별 생각 없다’ 라고 대답하는 이서에게 명전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욜로가 무슨 요즘 유행이야· 한참 지났지· 너 늙은이야?”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의도 없는)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은 공격· 명전은 고통스러워하며 분을 삭혔다· 반격할 방법도 없는 공격만큼 억울한 것도 없는 법이었다·
* * *
며칠에 걸친 장대한 일본 여행을 끝내고· 명전은 우선 집에 와서 늘어지게 잠부터 잤다· 아무리 해외 호텔이니 숙소니 하는 곳이 좋다 한들 집 만한 곳이 없었기에·
“수연아· 밥 먹자·”
“네·”
그리고 눈을 뜨니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어느새 차려져 있는 밥· 명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밥을 한술 떴다· 일주일만에 들어가는 ‘엄마 밥’은 여전히 맛있었다·
“그럼 이제 방학동안 뭐 할거니?”
“글쎄요···딱히 생각해본 건 없어서·”
어제 이서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명전 또한 계획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어떻게든 되겠지’ 가 아니라 ‘그냥 밴드 하면 되지’ 라서 좀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일단 당분간 좀 쉴 거 같아요· 현아가 예대 입시 들어간다고 해서·”
“벌써? 하긴 그럴 때긴 하네···수연이 너는 예대 생각 없니?”
“저요? 별 생각 없긴 한데·”
혜인의 질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말에 살짝 생각에 빠져든 혜인·
명전이 ‘예대’에 대해서 아주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학벌’은 강력한 무기 중 하나로 작동하며 그것은 예술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니까· 하다 못해 똑같은 기타 뜯는 줄쟁이라도 대학 나온 줄쟁이의 단가가 고졸 줄쟁이보다 더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전이 예대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이유는·
‘가서 배울 게 없는데 뭘 배워·’
결국 간판이니 학벌이니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게 먹힐 급’에서 먹힌다는 것일 뿐· 명전처럼 이미 일거리를 딸 수 있고 맡기고 싶은 사람들이 허다한 기타리스트에게···그런 ‘간판’은 그다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하수연’의 입시 문제로 고민에 빠져든 혜인을 두고 명전은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어디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볼까·’
여행을 다니는 동안 그는 인터넷에 발길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여행에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당장 눈 앞에 할 것들이 널려있는데 굳이 인터넷에 들어가서 세상의 온갖 쓸데 없고 해로운 것들을 직시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슨 인터넷 모니터링을 해야 하는 환경도 아닌데·
그런 까닭에 명전은 의식적으로 계속해오던 커뮤니티 탐사를 잠시 중단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으니 이제 다시 커뮤니티를 돌아다닐 차례였다· 젊은이들의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오늘도 정말 쓰잘데기 없는 짓들이나 하면서 혐오와 증오를 불태우고 있구나···”
대형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니며 명전은 최근 화두로 올라온 AI에 대해서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헐뜯기만 하고 있는데 이런 세상에서 태어난 AI는 과연 어떤 형태일 것인가· 그냥 맥락 없이 다른 사람들한테 욕이나 하는 그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늙은이 다운 시선으로 커뮤니티를 바라보고 있던 명전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인기 글 하나였다·
[일본 악기팔이 수준·mp4]
올라온지 며칠 됐지만 상당히 많은 댓글이 달려 있는 글· 평상시라면 무난한 제목에 클릭조차 하지 않았을 글이지만 천개가 넘어가는 댓글은 그런 무난한 제목조차 흥미롭게 느껴지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리고 눌러본 글에는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악기점 내부에서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는 상당한 실력의 여성 2인조· 그리고 그 연주를 가게 밖에서 혹은 안에서 들으면서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
그 밑에는 속칭 ‘짤’이라고 하는 형태로 사진들이 편집되어 있었다· 화제의 가게에 찾아가보았다는 유튜버· 그날 꽤나 악기를 많이 팔았고 그 이후로도 매상이 많이 늘었다며 웃고 있는 점원·
그 점원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명전은 화면을 위쪽으로 올려 여자 2명의 연주 영상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리켄베커 4001 베이스와 펜더 84 리이슈 캔디 애플 스트랫·
‘아니 이거···’
영상에 나오고 있는 것은 불과 얼마전에 명전과 이서가 들렀던 그 장소다· 지금 명전의 옆에 놓여 있는 84 리이슈 스트랫을 산 악기점· 그리고 영상에 나오고 있는 2명은 당연하게도 명전과 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