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9
잠시 생각할 게 있다며 20분 정도 휴식을 선언한 피디· 다들 잠시 바깥 산책이라도 하러 간 사이 명전은 공원 벤치에 앉아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은 왜 그랬지·’
그는 블루스에 대해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블루스를 폄하하는 걸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전의 삶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삶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지적한 적은 없었다· 이전의 삶에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방금 전에 명전이 저질렀던 일은 명전의 긴 인생 속에서도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은 이전 생의 습관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 때는 항상 주머니 안에 이런 짧은 휴식시간을 효과적으로 때울 수 있는 기물이 있었으니까· 지금 그걸 사용했다간 또 논란이니 뭐니 그런 소리를 들을 테지만·
‘뭐 오늘 녹화가 좀 그랬으니까···’
명전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녹화에 와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방긋방긋 웃기만 했으니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별 일은 아니었다·
* * *
“어떤 곡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1등은 거의 확정 아닐까요?”
“와! 완전 사기야· 저분 가수 아니에요? 가수죠? 가수 맞네·”
“가수 나와도 상관없는 프로그램 아닌가?”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출연진과 잠시 짬이 난 사이 장비를 정비하고 있는 촬영팀· 가은은 그 광경을 보며 수연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캐릭터가 존재하는지 가은은 정말로 의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류의 애인 걸까?’
가은은 잠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후 납득이 가는 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주위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 친구 따라 게임을 시작한다거나 형제 따라 뭔가를 시작한다거나·
수연은 그렇게 막 남들에게 흔들릴 타입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이 학폭에 가까운 애들이어서 그런 쪽으로 양아치 같은 삶을 살았고 그러다 좋은 스승을 만나서 기타를 배우며 스승의 영향을 받아 저런 식으로 변해버렸다···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꼰대스러움’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본연의 귀여움이 수연에게는 있었다·
그것도 그냥 귀여운 것이 아니라 임팩트 있게 귀엽고 짧고 굵게 귀엽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쇼츠나 릴스 같은 것으로 짧은 형태의 컨텐츠를 소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에는·
은은한 귀여움 빌드업이 필요한 귀여움은 그런 매체로 전파시킬 수 없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도 저런 차가운 외모의 아이가 혀를 반쯤 씹으면서 “말입···녜요!”라던가 “니에요!” “다에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바로 귀엽다는 소리부터 하겠지·
‘나이에 맞지 않게 ‘꼰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모습을 절제하려고 하며 부끄러워하는 여고생···이게 어떻게 안 팔리겠냐고·’
‘꼰대질’ 또한 쇼츠 같은 콘텐츠로 만들기 쉽다· 그냥 몇초 안에 ‘나때는 말이야~’ 식으로 막 중얼거리는 형태의 콘텐츠를 만들면 되니까· ‘귀여움’과 ‘꼰대’ 두 방향의 콘텐츠는 서로 다른 성향의 시청자를 끌어모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방송을 보면 ‘꼰대’스러운 부분과 시너지를 이루는 ‘귀여움’· 1+1은 2가 되지 않고 3이 되고 4가 되고 10이 된다· 사람들은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조합의 시너지에 빠져들 수 밖에 없을 터·
‘하지만···’
가은은 고민했다· 두 요소는 분명 사람들에게 호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냥 젊은 애가 꼬장 피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그런 적대감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거기까지 그녀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가은은 정태영 피디 팀에 소속된 서브 채널 프로그램의 피디였지 출연자들의 매니저나 소속사의 직원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동시에 가은은 ‘하수연’이라는 소녀의 팬이었다· 그렇기에 가은은 수연의 비호감도가 높아지는 상황을 막고 싶었다·
“그럼 다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가 촬영 시작을 알리는 말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답을 하나 찾았다· 바로 수연의 실력을 방송에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무런 가감 없이 보정도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하면 아무리 불만이 많은 시청자라도 진정할 수 밖에 없으리라· 불만을 터트릴 시간에 화면을 봐야 될 테니까·
* * *
“그럼 새로 갈까요?”
“그렇게 하시죠· 아시는 곡이 없으니까···”
유나는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블루스가 낡은 장르고 뭐고 간에 일단 아는 곡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블루스를 부를 수 있겠는가· 곡을 배워가면서 부르기도 그렇고·
그 이후로는 막힘없이 촬영이 쭉 진행됐다· 이전까지는 단 한마디도 못하던 수연도 꽤나 말을 잘 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장면도 많이 만들었고·
예를 들면···
“1990년대 노래입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맞춰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라고요!”
“20년대 노래는 자신 있는데 30년 전 노래는 아무래도 못 맞춤·”
“뭔진 몰라도 이거 맞추는 사람 있으면 내가 밥 굶는다 진짜· 90년대 노래를 어떻게 맞춰요?”
“이거 부활 3집 소나기죠· 93년 김재기 씨가 불렀던 노래·”
경악하는 출연진의 표정을 뒤로한 채 여유롭게 반찬을 챙기거나·
“우리나라 락 그룹 보컬 5명 이름!”
“어 민 민경훈?”
“신중현 김창완 전인권 배철수 조하문·”
“조하문이 누구에요??”
“그 Magma 보컬이죠· 해야 불렀던·”
“여자친구?”
“해야가···어떤 노래인가요?”
“그거 모르십니까· 해야 떠라 해야 떠라 말갛게 해야 솟아라···눈물 같은 골짜기에 서러운 달밤은 싫어·”
“전혀 모르겠는데요·”
출연진이 전혀 모르는 음악을 말하며 (최연장자였던 촬영감독조차 “그런 노래가 있다고?”같은 소리를 했다) 왜 이걸 모르냐는 듯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식으로·
‘진짜 독특한 애네·’
외형만으로 보면 걸그룹 노래 틀어놓고 연습실에서 땀 뻘뻘 흘리며 춤 연습할 것 같은 아이인데 하는 말을 들어보면 완전 노인네나 마찬가지· 게다가 “왜 이걸 모르시는지 제가 이해가 안 되는다에요·” 같은 말투는 그냥 방송 좀 탈려고 컨셉 잡는 애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게 만들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포크네요·”
수연이 룰렛을 돌려 나온 장르는 포크· 나이를 생각하면 꽤나 어려운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거침없이 길가로 나아가 자리를 잡은 후 노래를 불렀다·
“와 진짜 잘한다·”
“수연 님이 락 밴드 보컬이라고 했죠?”
“역시 진짜 가수는 다르네·”
“다은 씨도 가수잖아욯흐허헣흐흐”
부를 수 있는 곡은 총 3곡· 촬영임을 밝히고 모금 상자를 두는 까닭에 일부러 돈을 주지 않거나 장난을 치는 사람이 많아 다른 출연자들은 얼마 모금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타 하나만을 스피커에 꽂은 채 노래를 부르는 수연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매력적인 노래는···분명 촬영 카메라가 그들을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섭외조차 되지 않은 행인들을 무수하게 멈춰세웠다·
* * *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꽤나 나이 든 할머니가 수연에게 다가섰다· 수연은 살짝 미소짓는 얼굴로 행인들의 박수에 답하다 할머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신청곡 하나 됩니까?”
“네? 음···”
가은은 순간 당황했다· 전혀 기획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녹화 중에는 어떤 일이든 다 벌어질 수 있으니 대책을 세워 놓으라던 태영 피디님의 말이 있었는데 이런 소리였구나·
“제가 아는 곡이라면 가능합니다·”
“아 그래요· 그래도 이건 알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며 곡의 제목을 말하는 할머니·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마이크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이거 완전 리얼인데! 그림 나오는데 제발 수연양이 아는 노래였으면·’
가은은 그렇게 손을 잡고 기도했다· 딱 봐도 그림이 나오는 장면 아닌가· 행인들을 감동시키는 소녀에게 길을 걸어가던 할머니가 자신이 젊은 시절 듣던 노래를 신청한다· 그리고 그 노래를 그대로 불러주는 소녀···할머니는 젊은 시절의 기억에 눈물짓는다·
조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괴력 있는 그림이다· 물론 그게 그대로 되기만 한다면·
“아는 노래군요·”
“젊은 아가씨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아? 대단하네·”
이어폰을 통해 전달되는 말소리에 가은은 내심 주먹을 쥐고 기뻐했다· 이제 수연이 제대로 부르기만 하면 된다· 아니 수연이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 해도···어떻게든 편집으로 살릴 수 있으니 일단 부르기만 하면 된다· 후시더빙이라던지 오토튠이라던지 방법은 많다·
“계속 녹화할까요?”
“찍어요· 아웃으로 하나 인으로 하나· 맨 처음 들어와서 부탁하는 씬 그림은 있죠?”
“네 찍었습니다·”
스태프 중 한명의 이야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수연과 할머니에게 집중했다· 아까 모인 후 흩어지지 않고 조금씩 늘어나는 행인들 속에서 수연은 나지막히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어떤 노래를 연주하는지도 모르게 마구잡이로·
하지만 그 기타 소리는 어느새 정렬되어 하나의 음이 되고 리듬이 되고 멜로디가 된다· 가은이 어디서 한번 들어본 멜로디라고 생각할 때쯤 수연이 입을 열었다·
비가 내리면 음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이 떨쳐질까
비가 내리면 음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오래된 곡이 나올 것이라고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신청한 곡인만큼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고· 수연이 그 곡을 알기만 해도 좋고 부를 수 있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게 가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가·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음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고작해야 고등학교 2학년· 내년에 3학년에 될 아이다· 저 노래의 주인이 이미 죽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남겨진 시기 그런 시기보다도 조금 더 뒤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수연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수연은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가·
바람이 불면 음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이 떨쳐질까
바람이 불면 음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인도에는 더이상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 기나긴 동굴 안에서 나가기 위해 빛을 좇는 사람들처럼 길가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는 행인들을 어느새 군중 속으로 합류시켰다· 그런 행인들 사이에서 곡을 신청했던 할머니는 반쯤 울음을 참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닌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이어지는 애드리브는 현란하지 않다· 어떤 보컬의 기술 같은 것은 들어가지 않은 단순한 고음의 애드리브·
하지만 그런 투박함·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왠지 모르게
“편지를 써···!”
잘 정제되고 설계된 감정보다 훨씬 더 사람들에게 가 닿았다· 결국 막지 못하고 떨어지는 할머니의 눈물· 왠지 모르게 킁킁대며 눈물을 참는 사람들의 앞으로 할머니는 걸어가 수연의 손을 붙잡고 몇마디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카메라로 촬영한 가은의 심정은 단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었다·
“대박났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삽입곡
김광석 –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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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늦는 것 같네요· 근 시일내에 하루쯤 휴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