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7
스트링 콰르텟· 바이올린1 바이올린2 비올라 첼로· 신디사이저로는 살리기 힘든 스트링 특유의 음색이 울려퍼지며 좌중을 압도한다· 뒤이어 들어오는 것은 브라스 트리오다· 트럼펫 트럼본 색소폰·
그 구성만 해도 평범한 밴드 세션의 구성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이지만 그 외에도 더 있는 세션· 리듬 기타 봉고와 콩가 같은 퍼커션 탬버린을 든 코러스 클래식 피아노 등· 작정하고 꾸린 것이 엿보이는 세션들의 등장과 그들이 뿜어내는 사운드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너를 만난 그 날의 내 마음은
마치 파도와도 같이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나아가게 만들어
그리고 [잿빛의 나날들]이 끝나자마자 예고없이 바로 시작되는 [이 거리를 뛰어넘어]· 한때 Group Sound의 인기를 이끌었던 봄 내음이 흠뻑 나는 사랑노래의 등장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냈다·
나는 이제 이 미묘한 거리를
너와 뛰어넘고 싶어
흔들리며 떠도는 이 마음을
너에게 선물하고 싶어
첫 곡 [잿빛의 나날들]·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에 처음은 잔잔하게 시작하는가 했던 관객들· 하지만 밴드와 세션들이 무대 중앙에서 펼치는 활기찬 연주는 사람들을 저절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자 여러분! 박수! 박수! 박수!”
거기에 더 불을 지핀 것은 절묘하게 곡을 주고받는 두 명의 보컬이었다· 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최이서였지만 관객들의 호응이 필요하다 싶을 땐 아주 자연스럽게 하수연에게로 보컬이 넘어간다· 그리고 호응 유도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또 자연스럽게 최이서에게 보컬이 넘어간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 같은 그런 묘기· 공연을 보다 보면 은근슬쩍 한두번씩 보여진 광경이긴 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처음·
[우리애들 보컬도 진짜 천재다]
[원래 저렇게 연습을 하는 건가?]
언제나 그 언제나
할머니 집에 가보면
빛바랜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벨몬트 유리병
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공연은 계속된다· 쉼 없이 몰아치는 음악· 쾌활하고 신나게· 관객들의 몰입을 단 한시도 끊어놓지 않겠다는 듯 관객들이 ‘저거 팔 괜찮나?’나 ‘체력 바닥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할 정도로·
생각이 나
그날 마셨던 액체는 바로
왠지 모르게 들어 있던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
하지만 그러면서도 연출은 지속적으로 변한다· 쾌활함이 유지되면서도 때로는 어두침침해지고 때로는 조명의 기둥이 관중석을 비춘다· 중앙제어를 통해 응원봉이 빛의 파도를 만들고 폭포수처럼 섬광이 흘러내려온다·
할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그 냉장고 안의 유리병을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세윤은 생각했다· 콘서트 티켓 가격은 결코 싼 돈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큰 마음 먹고 진짜 각오를 해야 지출할 수 있는 돈· 아마 그녀의 남동생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렇기 때문에 고민했다· ‘최애’를 보기 위해서 돈을 지출할 것인가? 돈을 아껴야 하는데· 물론 그런 결심 따위는 공연장 앞에 놓여 있는 굿즈들을 보고 바로 녹아버렸지만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엄청난 고민에 휩싸여있었다· 표를 취소하면 남매 합쳐 이십만원이 넘는 돈이 다시 생기고 굿즈로 인한 예상 외 지출도 없을 것이며 저녁에는 편하게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이나 할 수 있는데· 공연이야 누군가가 찍어 온 유튜브로 보면 되는 것이고·
‘오길 잘했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드는 생각은 만약 취소했더라면···그야말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하나 생겼을 것 같다는 거였다· 돈이야 벌면 되고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만 이 날의 이 공연은 두번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 * *
점점 무르익어가는 공연·
세면대의 칫솔
말라붙은 비누
물때가 낀 거울
그 속에서
“우리는!! 별이 되어 갈지도 몰라!!”
구겨신은 신발
우중충한 하늘
등교길의 버스
그 속에서
“우리는!! 별이 되어 갈지도 몰라!!”
초반만 해도 이서가 유도해야 했던 호응은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며 자동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표곡 중 하나인 [별이 되어가는 것]에 이르러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서가 관객석에 마이크를 넘기고 관객들이 그것을 받아 부르는 광경이 나올 정도·
“여러분 잠시 쉴까요?”
“아니요!!”
[별이 되어가는 것]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이서가 멘트를 쳤다· 잠시 쉬어가자는 제안에 거부하는 관객들· 난처한 듯 “여러분 저희도 힘들어요!”를 외치는 이서와 공연장 전체에 울리는 사람들의 웃음을 들으며 그는 피식 웃었다·
“자 여러분 오래 앉아 계셨으니까· 이제 공연의 마지막을 위해서 우리 한번 스트레칭을 해 보도록 합시다에요· 자 어깨를 피시고 척추도 곧게 세우시고· 턱도 집어넣으시고· 디스크 걸리면 몇천만원 날아간다고 하지 않나요? 저희가 여러분의 음악 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책임지겠습니다에요·”
SNS를 볼 때마다 ‘다에요 여고생’ 타령이 나오기에 일부러 쓴 ‘다에요’ 체에 환호성을 보내는 팬들· 일부러 썼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머리를 빙빙 꼬며 생각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솔직히 말해서 그는 몰랐다·
‘서명전’이었던 시절에는 어릴 때라면 모를까···나중에는 그냥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곡은 꽤나 잘 썼으니 진짜 떠서 콘서트가 가능할 것 같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왔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수연’이 된 뒤에는···물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의 실패 그리고 음악 시장의 현실· 그것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공연장을 빌리자고 주장할 때도 그랬다· 성장세는 좋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채우기 절대 불가능해보이는 좌석·
하지만 그는 왠지 모를 오기로 주장했다· ‘여기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공연장이고 나는 여기로 하고 싶다· 혹시 모르지 않느냐· 우리가 다 채울 수 있을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생각했다· 다 채우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한번이라도 공연을 서 보고 싶다· 그 무대에서 주인공이 된 상태로 관객들을 바라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매진이라는 형태로·
‘장충체육관·’
한국 최초의 돔 경기장·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 챔피언· 제 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좀 불명예스럽지만 유신 정권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까지· 그 외 수많은 행사와 경기들이 이 곳에서 열려왔다·
그리고 수많은 락스타 밴드들이 이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길 원했다· “장충에서 공연을 하는 것은 성공했다는 지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 중에 한명이었고·
“그럼 이제 하이라이트! 다들 알고 계실 바로 그 곡! 굳이 말씀 안 드려도 아시죠!”
“네!!”
손의 스트레칭을 다 끝냈는지 이서가 쾌활하게 외쳤다· 거기에 응답하는 관객들· 그리고 네 번의 드럼스틱 소리가 울려퍼지며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알 그 베이스 전주가 시작된다·
“느지막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
저멀리 하늘에 뭔가 떠 있네
아무리 쳐다봐도 알 수가 없는
종이학 원형도넛 그리고 공중정원···”
그리고 관객석에서 터져나오는 우렁찬 노랫소리에 그는 수십년 경력을 잃고 집중을 놓칠 뻔 했다· 한국인이 떼창으로 유명한 것은 그도 안다· 그도 한국인인 만큼 어떤 심정인지 아주 잘 아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뮤지션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예 다른 문제다· 이서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으로 잠시간 말을 잃은 채 베이스만 튕기고 있다가···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다시 한번 더!!”
“느지막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
저멀리 하늘에 뭔가 떠 있네
아무리 쳐다봐도 알 수가 없는
종이학 원형도넛 그리고 공중정원···”
말 하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곡·
“길을 나선 오늘의 날씨는
황금과 번개를 동반한
구름입니다
맑은지 흐린지 모르는 채
지도만 보고서 터벅터벅···”
장충체육관을 꽉 채운 5천명의 목소리·
이서가 작사하고 다른 아이들이 편곡에 참여했으며 그가 작곡한 곡·
몇십년이 넘는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광경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일이 지금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저 떠 있기만 한
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너를 향한 내 마음도
흘러가는 세월도
전부 모래 위에 휘청이며 넘어질테니···”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그는 서 있던 곳에서 벗어나 무대를 돌면서 관객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움직임에 노래를 부르면서도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리듬에 맞춰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면서· 마치 오늘이 그들의 가장 행복한 날인 것 마냥 끝없이 호응을 보낸다·
그 모습에 그는 한참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가졌던 꿈도 다 퇴색된 채로 그저 음악을 업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일· 전성기를 흘려보낸지 오래였던 락커의 세션 밴드 마스터로 일할 때의 이야기·
그는 소주를 두 병쯤 마시고 알콜에 절여진 상태로 그 락커에게 물었었다·
“도대체 돈도 안 되는 공연 왜 하는 거요? 그냥 집에서 배때지나 긁는 게 더 남겠구만·”
그때 그 락커는 대답했다·
“선생님 관객석 밑에 수천명이 이제 저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렇게 사람들이 전부 다 저만 쳐다보고 제 동작에 전부 다 반응해주는···그런 일을 겪어보면 다른 일 못 합니다·”
그때 그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세션이든 밴드든 무대에 서는 것은 똑같지 않은가 하는 그런 심정으로· 네가 뭐 별거냐 하는 그런 반감으로도·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더 많은 관객들이 있었던 페스티벌도 갔다·적긴 하지만 열성적으로 반응해주었던 다른 라이브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에야 그 말을 실감했다·
그야말로 그의 몸짓 하나 동작 하나· 그 모든 것에 반응해주고 즐거워하고 호응을 보내주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응원봉 하나의 불빛을 보내며 모두가 마음을 맞춰 노래를 부르며···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주인공’만을 바라보는 이 광경·
그가 너무도 원했던 광경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저 떠 있기만 한
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너를 향한 내 마음도
흘러가는 세월도
전부 모래 밑에 파묻혀 사라질테니
느릿한 걸음을 걸어 자리로 와서· 그는 고개를 떨군 채로 노래를 불렀다·
고개를 들면 누군가 알아볼 것 같아서·
떨리는 음정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의 감정을 덮어주길 기원하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라며 이뤄진 꿈에 대한 아무도 모를 이야기를 읊조렸다·
* * *
[공중정원]이 끝나고·
어두워진 무대·
어느날 네가 수많은 길들 중에
그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내가 너에게 과연
가지 말아야 한다 할 수 있을까
세트리스트에 미리 나와있던 노래 과오· [Invasion from Seoul 2024]에서 나왔던 수연의 과거를 상징하는 노래·
그리고 그 노래는 다큐멘터리 1화가 방영되고 수연의 과거가 어느정도 밝혀진 지금···너무나도 절실하게 사람들에게 와닿았다· 어떤 의미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으므로·
어느날 네가 수많은 길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후회한다 할지라도
나는 너에게 과연
가지 말았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내일의 너는 눈물을 닦지만
어제의 너는 아냐
내일의 너는 무릎을 꿇지만
어제의 너는 달라···”
후렴구에 흘러나오는 떼창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당시의 공연을 떠올리게 하는 그 분위기· 사람들은 나지막하게 읇조리며 응원봉을 좌우로 흔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을 울리게 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오늘의 너는 과연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마무리·
공연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박수· 밴드의 아이들과 세션들이 고개를 연신 숙여보였고 몇몇 아쉬운 사람들은 “한 곡 더! 한 곡 더!”를 외쳤다·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들어가시는 거 아쉽잖아요·”
“네!!!”
하지만 그 생각은 기분좋게 배신당했다·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는 수연· 뭔가 앵콜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우렁찬 환호로 대답하는 관객들·
“마지막 곡을 들려 드리기 이전에 들려드리고 싶은 곡 하나가 있는데요· 저희 곡은 아닌데 이런 날이 오면 꼭 한번 불러보고 싶었던 곡인데···혹시 괜찮을까요?”
“네!!!!!”
다시 한번 더 터지는 우렁찬 답변· 수연은 뭔가 쓰게 웃은 후 밴드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잠시 웅성이는 무대 위· 이서와 현아는 뭔가 세션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듯 무대를 내려가고 서하만이 자리를 잡았다·
다시금 꺼지는 조명·
단 하나만 남아 있는 스포트라이트는 무대 위 단 한 사람만을 내리쬔다·
하수연이다·
“보통 이런 곳에서 부르는 노래는 다들 잘 아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요· 이 곡은 다들 모르실 것 같은데···뭐 일단 해보겠습니다·”
신호 없이 갑자기 시작한 노래는···그들 Group Sound의 음악과는 정 반대의 느낌이다· 감정이 그다지 들어가지 않은 흥겨움· 그리고 세월이 느껴지는 멜로디·
“들어주세요· 서명전 ‘집 앞의 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