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6
문득 떠오른 생각이지만 수연은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 작곡도 자신이 해 편곡도 자신이 해 나중에 녹음 단계 되면 녹음 진행도 자신이 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세션 녹음까지 우리 밴드원들이 한다면 콜라보로 진행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잠시 좀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래서 수연은 그렇게 말하기로 했다· 잠시 쉬는 사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콜라보로 진행하면 어떨까요?” 라고 의견을 제시하니 곡의 틀을 잡아가고 있던 직원 두명이 그 이야기를 듣고 살짝 굳었다·
“콜라보라고 하면···”
“이게 모양새가 결국 음 어떤 아이돌들이 이 곡을 사용할지는 모르지만···아무튼 저희 밴드가 트랙에 다 참여하는 그런 느낌인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럴 거면 그냥 콜라보 쪽으로 가는 게 서로 좋은게 아닌가 싶어서요·”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서로 좋은 거 아니겠는가 했던 수연과는 달리 두 직원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A&R팀의 차석은 동의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팀장은 영 부정적인 태도였다·
“뭐···일리 있는 이야기긴 한데요·”
“그러면?”
“그런데 콜라보라는 게 저희 선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인거다 보니까· 물론 제 권한에서 결정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이건 다른 회사랑 얽히고 홍보전략적인 부분도 있다보니 제가 뭐라고 말하기가 힘듭니다·”
“그건 그렇긴 하네요·”
수연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살짝 실망스럽긴 했다· 바로바로 결정해줄 수 있을 법 한데· 하지만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수연 자신이야 전생에는 그다지 큰 회사에 재직한 적도 없으며 주먹구구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절의 사람이었고 지금은 ‘좆소기업’의 주요 요건 중 하나인 가족기업에 소속되어 있으니 영혼의 나이가 얼마가 됐건 대기업의 의사결정과정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엔 어느 정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생각이 되는데요···”
“음···”
물론 A&R 팀장이 보기에도 충분히 좋은 기획이었다· Group Sound는 분명 떠오르는 신예· 걸그룹 보이그룹만큼 앨범을 팔지도 못하고 팬덤의 규모도 그만큼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장충 매진이라는 성과를 이뤄낸 ‘밴드’· 게다가 콜라보라고 하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A&R 팀장은 대기업의 의사결정과정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기에 부정적이었다· 결국은 사내 정치· 분명 자신들이 얻을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 좋은 일을 왜 해주냐’ 라는 말이 나오면 좌초될 것이 분명한 기획·
그렇기 때문에 팀장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아 글렀구만·’
그 대답을 듣고 수연은 생각했다· 대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나 통상적으로 사회에서 “고려해보겠습니다·” 라는 말은 곧 “말이나 해보겠습니다·” 또는 “안 하겠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라는 말과 같다·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으니 그냥 돌려 말하는 것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작업 들어갈까요?”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세 사람은 다시 곡 작업에 들어갔다· 어차피 회사 일이라는 게 하루이틀만에 결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팀장은 ‘그냥 이야기나 해 봐야지’ 정도로 수연은 ‘고 팀장님한테 말이나 해 봐야지’ 같은 느낌으로·
며칠 후·
“수연 님· 혹시 곡 작업 하러 가셨을 때 콜라보 이야기 하셨었나요?”
“아 그거·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그런 이야기 하긴 했는데 그쪽에서 영 반응이 없길래 뭐···팀장님한테 한번 이야기나 해 달라고 말을 하려다가 깜빡해버렸네요·”
그 날 그 이후로도 워낙 일을 많이 하는 바람에 콜라보 관련 이야기를 고 팀장에게 하는 걸 잊어먹어버린 수연이었다· 그렇지만 “고려해보겠습니다·” 같은 대답이 나왔으니 기억을 하기도 힘들었을 거라고 수연은 자기 자신에게 변명을 했다· 어차피 안 될 거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 하는 마음으로·
“음···근데 방금 연락이 왔는데 협의하면서 진행해보자고 하던데요?”
“엥·”
* * *
아우로라(Aurora)· 크림 엔터테인먼트(Cream Entertainment)가 내세우고 있는 오로라라고 읽는 것이 맞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발음의···‘4세대 걸그룹’· 성적으로 줄 세우기 좋아하고 모든 것을 티어로 정리하고 싶어하는 한국인의 관점에 따르면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서 2티어 1~2위 정도가 될만한 그런 갓 3년차 아이돌·
하지만 그것은 인터넷에서 내가 좀 잘 아는 사람이다 헛기침하며 줄세우기 평론가질하는 사람들의 관점· 실제로는 초동 50만장에 월드 투어까지 성공시킨 그룹이었다· 국내 콘서트 또한 장충체육관 매진이라는 성과까지 거두기도 했으니 꽤나 팬덤이 탄탄한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매진이라고 해서 5천석을 팔았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의 앞길이 밝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멤버 중 한명이 아이돌 그룹에서 특히 이쁘기로 소문난 그런 그룹이었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 외에는 그다지 특색이 없는 그룹이라는 이야기도 된다···가 정유영 과장이 말해준 이야기였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가요?”
수연은 사상 처음으로 정유영 과장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믿기 힘든 이야기 아닌가· 몇십만장을 팔아치운 그룹이 대중성이 없고 특색이 없다? 농담은 그만해줬으면 좋겠는데·
“물론 제 분석이긴 하지만! 다 근거 있는 이야기라구요! 이런 자료를 보시면···”
그렇게 말하며 정유영이 수연에게 내민 자료는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이 주루룩 적힌 분석 보고서였다· 수연은 그걸 대충 훑어 넘기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대형 기획사 출신이라고 했었던가·
“정 과장님은 어디에서 근무하셨다고 하셨죠? 전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 저는 뮤플 출신이에요! 뮤직플래닛·”
뮤플이라· 수연이 ‘서명전’ 시절에도 들어봤던 이름하야 ‘4대 기획사’ 중 하나 아닌가· 정유영 과장이 허당스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일을 상당히 잘 하는 것은 아마 그런 출신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자료도 아마 그때 만들어졌던 거겠지·
“아무튼 일단 제가 받은 연락은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해보자’ 라는 거였습니다· 항상 하는 그런 겉치례보다는 조금 더 진심이 담긴 그런 느낌이었구요· 계약조건 협의 좀 하고 괜찮다 싶으면 그대로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고경민 팀장의 이야기에 수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뭐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긴 했다· Group Sound에 쓸 곡은 따로 가지고 있고 지금 이 곡은 그냥 남는 곡일 뿐이니까· 그걸 가지고 콜라보를 해서 밴드 홍보에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고 잘 안 풀려서 그냥 곡을 판매하는 쪽으로 넘어가도 돈 벌어서 좋고·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 * *
“너희 EP 진행되던 건 곡 바뀔 것 같다·”
“네??”
모처럼 스케줄이 없는 날· 하린과 아우로라 멤버들은 숙소에서 할 일 없이 볕을 쬐며 장마간에 쌓인 몸의 곰팡이를 털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로 오라더니 오자마자 매니지 실장이 한 이야기가 바로 저 이야기·
분명 얼마전까지만 해도 꽤나 괜찮은 곡으로 픽스가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던 하린이었다· 전곡을 다 들어보진 못했지만 타이틀곡만 들어봐도 그녀가 좋아하는 그런 시티팝쪽 계열의 곡이라 기대가 많이 되었었는데·
“갑자기요?”
“그래 뭐· 사실 컨펌이 된 건 아닌데 그런 쪽으로 바뀔 것 같다고 하네·”
“뭐야···다 된 거 아니었어?”
“의상이나 컨셉도 다 잡아놓고는···”
하린의 뒤에서 웅성대는 4명· 하린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머리를 긁었다· 저렇게 말해도 이 애들이 목소리를 내진 않겠지·
“갑자기 이렇게 바뀌면···저희도 좀···”
“너희가 힘든게 뭐가 있어· 결국 다 회사가 결정하는 건데·”
“그래도 그 컨셉 저희도 골랐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결국 결정은 위에서 하는 거야· 나한테 말해봐야 소용 없다· 나도 좀 어이가 없긴 하고·”
그렇게 말하며 실장은 “박팀장 그 새끼···” 라고 중얼거렸다· 박 팀장님이라고 하면 A&R 팀의 그 분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쪽에서 컨셉이 변경된 건가·
“그리고 이건 그거랑 관계된 부분인데 이번 EP는 콜라보 컨셉으로 가게 될 것 같다·”
“네?? 콜라보요?? 누구랑요??”
“난 몰라· 그거도 A&R에서 밀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럴거면 그냥 지들이 프로듀싱 하지 뭐하러 우리 두는 건지 시발년·”
매니저 실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막 튀어나오는 멤버들의 말들· “콜라보??” “별론데···” “무슨 근라보야···” “근라보가 뭐야?” 등· 이것들은 아까 말 안 하고 뭐 했나 싶긴 했지만 하린은 목소리를 높이려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맨날 있어왔던 일이니까·
“그런데 콜라보면 누구랑 하는 거지? 다른 회사 애들이랑 하나?”
“근데 그럴 거면 EP 자체를 콜라보 컨셉으로 간다고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설마 힙찔이들 아냐? 나 걔들 개 싫은데· 맨날 돈자랑만 하고· 할머니가 AK47 맞고 죽었다나 뭐라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수련아 너 인터넷 좀 그만해· 자꾸 핸드폰 가지고 이상한 거 보고 있으니까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너 버블에도 계속 이상한 소리 하는 거 아니지?”
“저···전혀~”
삐질거리는 멤버 중 한명의 얼굴을 보고 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애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아우로라의 앞길은 글쎄·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밝지 않았다· 음반이야 꽤나 잘 팔렸고 투어 성적도 좋았지만 단지 그 뿐· 그녀만한 인지도를 가진 멤버들도 없었고 멤버들 또한 그녀 뒤에 숨어서 조잘거리기만 할 뿐 뭔가 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물론 그 모습이 귀엽기는 했지만 비즈니스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곡 좋아보이길래 거기에 기대를 많이 했던 건데···’
그녀가 생각하기에 대중성을 한방에 잡을 수 있는 그런 타이틀곡· 게다가 곡의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도 않아 맨날 인터넷 악플러들이 이야기하는 ‘아우로라 라이브 수준 lol’ 같은 소리를 잠재워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가 무산되다니·
‘어떤 곡일까·’
하린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건너를 응시했다· 아이들이 표정 풀어준답시고 그녀의 볼을 막 매만지고 있었지만 대응할 기분도 떼어낼 기분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놈···아니 사람 그룹일까· 뭐 하는 새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걔들이 없었으면 콜라보도 진행 안 됐을 거고 이번 곡도 그대로 갔을텐데· 인지도 없거나 곡 안 좋거나 아무튼 별 거 아니기만 해봐· 진짜 대표님 만나서 이대로는 못해먹겠다고 드러누워야지·’
직장인이라면 매일 하는 공상·
‘아니 그 전에 만나자마자 바로 각 보고 꼽 주면 그 쪽에서 취소를 좀 해주지 않을까? 열받아서?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막 그렇게 하면 이제 그 사람들이 쟤들이랑 일 못하겠다! 이러면서 파기하고 갈지도 몰라· 근데 그러면 이제 막 나 혼내러 올수도 있나? 아 그럼 이제 그때 못해먹겠다고 드러누우면 되겠다·’
하린은 어느새 대표 사무실 앞에서 드러누운 자신과 그런 자신을 일으키기 위해 어르고 달래주는 대표 그리고 아우로라의 가치를 깨달은 다음 미안하다며 펑펑 우는 A&R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막 선물을 사다바치는 매니저 팀장과 1호 매니저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언니 또 저런다·”
“냅둬· 스트레스 풀 데도 있어야지·”
그리고 그런 하린의 모습을 보며 아우로라의 멤버들이 쯧쯧거렸다· 항상 똑부러진 언니긴 한데 가끔 저럴 때가 있단 말이지···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린이 계획을 세웠던 ‘만나자마자 꼽을 줘서 콜라보를 취소하게 만들기’ 같은 계획은 성립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린부터가···
“헉!! 그룹사운드!! 그분 맞죠!! 수련아 저분 진짜 그분이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진짜지? 맞지?”
“맞으니까 언니 좀 진정해·”
“어···네 맞습니다· 그룹사운드 하수연입니다· 반갑습니다···요·”
“와 미쳤다· 다에요까지!! 수연 언니! 싸인해주면 안 돼요? 진짜진짜진짜!”
콜라보 협의를 위해서 수연이 들어서자마자 하린이 보인 폭발적인 반응· 어찌나 갑작스러운지 수연의 말투조차 원래대로 돌아갔다가 ‘다시는 쓰지 않겠다’ 라며 봉인해두었던 흑염룡 ‘다에요 여고생’까지 풀려버린 상황·
“저보다 나이 많지 않으십니까?”
“뭔 소리에요! 이쁘고 멋지고 아무튼 그러면 다 언니! 제발! 나 진짜 사진 한장만! 저 한정 훈장도 있어요! 라이브 못가서 번개장터에서 샀어요!”
수연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도대체 이게 뭔지· 사람들 다 있는데 다 큰 처녀가 저런 꼴이라니·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저 사람은 오늘 밤에 이불 좀 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