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3
‘어으 골아파·’
그는 머리를 싸잡으며 다음 달 부킹 스케줄을 훑어보았다· 점장이 특히 주목하라고 했었던 밴드 몇몇과 이름 값 있는 녀석들 몇몇· 그리고 어제 밤에 만났던 밴드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스케줄 표·
‘그래도 이런 맛이 있어야 또 부킹 매니저 하지···돈도 얼마 안 주는거·’
어제 만났던 밴드는 뭐라고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아무 말 없이 술 사주고 아는 여자애도 한명 소개시켜주고·
거기에 그는 “형만 믿어· 다 서로 좋자고 하는 거지· 안 그래?” 라는 말을 했었다· 한 자리 정도는 넣을 수 있는 그런 위치였기 때문에·
‘상부상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이런 게 상부상조지···’
그냥 데모 테이프 몇개 보내고 마는 그런 밴드는 굳이 라이브하우스에 출연시킬 필요가 없다· 절실하지 않다는 이야기 아닌가· 더 절실한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더 절실한가는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달려있다·
그러니 그에게 직접 와서 출연을 부탁하는 밴드를 챙겨주는 것은 부킹 매니저를 넘어 일본의 음악을 지탱하는 사람 중 한명으로서 어찌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조금 부수입을 얻긴 하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이 부킹 매니저라는 직업은 그다지 돈도 안 되는데· 조금 챙겨간다고 해서 손해볼 사람도 없다·
[스케줄표 올려줄게]
[니들은 진짜 내 덕 본거다]
[감사합니다 타나카 선배님!!]
[그래]
[감사하면 인사 많이 오고]
“나카무라!!”
“네!!”
휴대폰을 조작해 라인을 보내며 바깥에 대고 외치니 젊은 스태프 한명이 후다닥 들어왔다· 그는 부킹 스케줄을 적은 서류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사장님한테 가져다 드리고 와·”
“뭔가요?”
“임마 부킹 스케줄이지 딱 보면 모르냐! 빨리 가져다 드리고 와·”
“아 아 근데···”
“아 근데 뭐!”
안 그래도 숙취 때문에 골 아파 죽겠는데· 이 놈은 또 뭐때문에 이러는 건지· 그는 눈을 번뜩 뜨며 스태프를 노려보았다· 쭈글쭈글해지면서도 힘겹게 입을 여는 나카무라·
“그런데 사장님이···”
“사장님이 뭐!”
“아까 오시면서 이번 달 스케줄표 좀 신경써서 작성하라고 데모 트랙들 다 들어보라고 타나카 매니저님한테 말하라고···이번 달에 소문을 들으셨대요· 거물 밴드가 일본 진출 할거라고···”
“뭐? 뭔 거물 밴드! 나 참·”
그는 투덜대며 이마를 짚었다· 무슨 놈의 거물 밴드· 르네 뮈레가 분명 유명한 라이브하우스는 맞지만 그놈의 ‘거물 밴드’가 르네 뮈레까지 올 이유는 없었다· 뭐하러 이 곳에 오는가? 입장 인원이 300명도 안 되는 곳인데·
그렇기에 그는 관자놀이를 한번 짓누르고는 컴퓨터를 켰다·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해버리기에는 나카무라 이 녀석이 보고 있으니까· 그냥 대충 훑는 시늉이나 하면 되겠지·
그랬던 그의 생각은 메일함을 연지 몇분만에 개박살이 났다· 나카무라의 입에 의해·
“어···쟤 쟤들!!”
“뭐?”
나카무라가 가리키고 있는 모니터 한 구석· 쓰여 있는 영어는 Group Sound·
“그···그룹 사운드!”
“그룹 사운드? 그룹 사운드가 뭔데?”
“모···모르세요?”
눈을 크게 치뜨고 왜 그걸 모르냐는 듯 반응하는 나카무라· 타나카는 이놈이 왜 이러나 싶었다· Group Sound···얼마전에 이시카와 녀석이 들어본 것 같다 운운했던 그런 이름인 것 같은데·
“얘들 한국에서 진짜 인기 많은 밴드잖아요! 한국 아이돌들 급이라고 하던데!”
“뭐? 뭔 소리야?”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나카무라는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한국의 부도칸급인 공연장을 매진시켰다 아이돌 천하인 한국에서 음반을 몇만장은 팔았다 등···밴드 음악 불모지인 한국에서 나타난 초신성같은 밴드라는 설명도· 그런 이야기에 타나카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사장이 말했던 그 거물 밴드인가 뭔가 하는 그게···?’
최근에 음악을 듣는 것을 게을리했던 결과가 이렇게 와버리는 걸까· 그는 목소리를 살짝 떨며 물었다·
“곡 곡은 어떤데?”
“곡도 엄청 좋아요· 저도 들어봤어요·”
“뭐?”
“한번 들어보세요!”
나카무라의 말에 그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노래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라이브하우스에 있는 약간 낡은 스피커로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만큼 좋은 음악· 지금까지 들었던 데모 테이프를 보내오는 그런 밴드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
‘큰일났다·’
그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리스트에 들어간 밴드 중 절반은 당연히 들어갈 네임밸류를 가진 밴드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당연히 들어가야 할 실력이고·
빈 자리가 하나 있다면 어젯 밤 그에게 술을 사주었던 그 녀석들인데· 그런데 이미 출연할 거라고 이야기까지 해 놨는데 지금와서 무르기에는 자존심이···
“나카무라· 모른 척 해·”
“네?”
“모른 척 해· 그냥 우리는 못봤던 거야·”
“네?? 왜···?”
“그런 게 있어 임마! 너 일 그만하고 싶냐? 그냥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 알겠어?”
그는 그렇게 나카무라를 윽박지르고는 스케줄표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신이 직접 사장에게 보여주고 데모테잎 뭐 그런 거 없었다고 하는게···
“데모 받은 거 명단 좀 보자·”
“네?”
“네는 무슨 네야· 나카무라 명단 좀 가져와봐라· 분명히 지금쯤 넘어왔을 거란 말이지· 우리 쪽에 곡 보냈을 수도 있어·”
타나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후다닥 나가버린 나카무라· 그 모습에 살짝 얼어붙은 타나카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사장· 그 눈초리는 명단의 어느 한 구석을 보자마자 불타올랐다·
“타나카 너 뭐하는 놈인데? 여기 떡하니 그룹 사운드라고 적혀 있는데 얘들을 안 올려? 너 그러고도 음악 듣는 놈이야?”
“아니 사장님···”
“야이 새끼야· 너 이거 브라이드 이 놈들 저번에 부킹 시켰는데 영 아니었던 놈들이잖아? 그런데 또 왜 부르냐? 너 뭐 받았지?”
“사장님 그게 아니라···”
“듣기 싫어· 빨리 나가 이 새꺄!”
축 처진 어깨로 나간 타나카· 사장은 한숨을 푹 쉬더니 나카무라가 가지고 온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아! 네! 라이브 하우스 르네 뮈레 점장 사사키 켄이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블 에코사운드 정 유영 과장님 되십니까? ···아 네 저희가 정말 늦게 연락을 드렸는데 죄송합니다· 네· 아니 그게 아니고···”
* * *
며칠 전 라이브 하우스 ‘르네 뮈레’의 다음달 스케줄 표가 발표된 이후로·
도쿄 인디 씬···아니 일본의 인디 씬은 한동안 떠들썩했다· 르네 뮈레에 출연하는 밴드의 네임밸류 때문에·
– 구루사(グルサ 그룹 사운드의 약어) 르네 뮈레에서 공연한다는데
ㄴ 진짜냐
ㄴ 스케줄표 봄 진짜임
– 구루사가 누군데?
ㄴ Group Sound 한국 밴드고 노래는 http://you~ 이런 것들 있음
ㄴ 진짜냐고···엄청 좋잖아···
ㄴ 조회수 뭔데? 이거 진짜야? 얘들 아이돌 밴드인가?
ㄴ 놀랍게도 정통 밴드임 애들 얼굴은 아이돌같지만
– 나 이 하수연이라는 애 엄청 취향이다
ㄴ 그 애가 취향 아닌 사람이 있을까?
– 양일 2만석 매진? 부도칸 사이즈 아냐 이거? 이런 밴드가 왜 라이브하우스?
ㄴ 근본인 라이브하우스에서 하겠다는 건가 엄청 호의적이게 되는데
– 일데(イルデ 일본 데뷔)가 라이브하우스인 밴드라니 뭔가 겸손해보여서 엄청 좋다
Group Sound의 위상은 한국에서는 더이상 높아질 곳이 없을 만큼 높아진 상태였지만···그 위상이 일본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은 밴드 강국이기 때문에·
자국에 이미 뛰어난 밴드들이 있는데 굳이 밴드 불모지인 한국에서 오는 밴드에 대해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을까· 그냥 뛰어난 밴드 하나로 취급하면 된다는 것이 일본 팬들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딱히 설문조사 같은 건 돌지 않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한국에서 성공한 밴드’의 자세를 취하고 들어올때까지의 이야기·
– 아무리 돌아갈 수 있다지만 자국의 기반을 내던지고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 엄청 감동스러운 느낌· 일본 밴드들은 과연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헝그리 정신’ 이라는 게 있어· 잔뜩 배불러서 도전 같은 걸 하지 않는 일본에 비하면 모든 걸 필사적으로 한다는 느낌· 저 밴드만 해도 그래· 그냥 콘서트 하러 오면 2~3천석은 그냥 채울만한 밴드로 보이는데· 힘들게 라이브하우스를 돈다는 건 그만큼 일본 음악 문화를 존중한다는 그런 생각으로 보여·
– 한류 아이돌들이 일본을 물들이고 있는 이유가 뭐야? 저 애들은 청소년기부터 필사적으로 하나의 길만을 위해 달려가고 있어· 일본 아이돌은? 그냥 그 일을 장난처럼 생각할 뿐이지· 저 밴드도 봐· 고등학생때부터 모든걸 다 바쳐서 밴드를 했고 그렇게 성공했는데· 지금은 라이브하우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걸 보라고·
자신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고 불호를 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게 외국인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일본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게다가 Group Sound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일본인들이 환장하는 그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는’ 그런 서사와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런 Group Sound의 행동에 환호를 보내며···르네 뮈레 공연과 그 후기를·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Group Sound의 일본 활동을 기다렸다·
정유영 과장의 [레이블 에코사운드]의 노림수가 정확히 맞아들어가는 순간이었다·
* * *
“혹시 현장판매 안 하나요?”
“지금 표 없어요?”
“남는 표 있나요?”
“안 합니다· 다 매진됐습니다! 입장하시는 분들 표 보여주세요!”
라이브 당일 르네 뮈레 입구· 스태프들을 잡고 필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고 잔뜩 늘어선 줄을 찍는 사람도 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근처에서 갸웃대는 사람도 있고 들어가지 못해 낙담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 너무 많은데·”
“그러게· 이거 표 구하는 것도 쉽지가 않더라· 무슨 라이브 하우스 표가 순식간에 매진이 되냐·”
승리자인 그는 그런 광경을 보며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등진 채로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지하로 걸어내려갔다· 내려간 지하에는 이미 꽉 차버린 사람들· 더 인원을 집어넣었다가는 쾌적한 음악 감상이 힘들 것 같은 그런 상황·
“레몬사와 2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인파를 뚫고 들어가 카운터에서 레몬사와를 주문한다· 플로어 쪽에서는 어떻게든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눈치싸움 몸싸움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 그는 레몬사와를 홀짝이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여기 좁으니까 굳이 앞자리까지 가서 볼 필요는 없지 않아?”
“그래도 아티스트의 첫 공연을 맨 앞자리에서 본다는 건···일종의 경험이자 훈장 아닐까· 그런 느낌인데·”
그런 친구의 말에 그는 약간 이해가 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결국 ‘처음’이라는 것의 문제인가· 하지만 굳이 앞자리를 택하지 않아도···그는 처음에 와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높은 확률로 위대해질 밴드의 처음에 자리잡고 있다·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잠시 대기해주세요~!”
레몬사와를 반쯤 마시자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잘 마셨습니다·” 하고 레몬사와를 밀어주고는 등을 돌려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꺼지고 무대가 깜깜해진다·
건물 내에서 빛나는 것이라곤 그가 등지고 있는 바 카운터 뿐·
그 어둠에 조금씩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하나둘씩 나타난다· 카메라의 방향은 전부 무대를 향하고 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뒤에서 들려오는 카운터 안의 식기 치우는 소리 뿐·
거기에 네 쌍의 발 소리가 더해졌을 때 사람들의 긴장감과 기대감은 극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이 어둠이 점점 익숙해지고 이제는 실루엣이 보일 법 할 때···
약한 조명을 받으며 은은하게 밝아지는 무대· 불빛을 등지고 선 네 명·
환호성이 터져나오기 직전 맨 앞에 서 있던 여자아이가 느릿하게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 동작은 마치 기침을 틀어막듯 급격하게 라이브하우스를 조용해지게 했다·
잠시 맴도는 침묵 속에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것은···나지막한 인삿말·
“こんばんは。はじめまして。グループサウンドです。”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룹 사운드입니다·)
그리고 저 먼 곳에서 천천히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다가와버린 기차처럼···
“それでは、コンサートを始めます。`
(그럼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그들 앞에 멈춰서 공연을 즐기기를 강권하는 드럼의 필인·
Group Sound의 일본 첫 공연이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