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7
“너무 오래된 곡 아닌가요?”
재훈은 그렇게 딴지를 걸었다· 수연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래도 뭔가 먹혀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방송을 다 믿을 수 없긴 하지만 방송상으로 나온 것만 볼 때···저 애는 그냥 표정만 저런 거지 실제로는 꽤나 유하고 약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가요·”
“오히려 이런 쪽으로 반전을 노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잔잔하고 느긋하게·”
살짝 비어있는 듯한 수연의 눈· 재훈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상대가 자신의 의견에 위축되도록·
물론 재훈 또한 자신이 제시한 곡이 그다지 이번 경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전을 노린다 잔잔하고 느긋하다···그냥 자신의 의견을 합리화하기 위한 헛소리일 뿐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가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자의적으로 벌이고 있는 일이다·
정확히는 재훈 자신이 속한 밴드 [Muzaku]와 [Velvet Monochrome]이 합동으로 내린 “피디놈 좆같으니까 이번 라운드에 깽판 한번 치자!”라는 결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피디새끼 개 좆같지 않냐?”
“그렇긴 하지·”
결정을 내렸던 날 저녁· Muzaku와 Velvet Monochrome의 멤버들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 이번 라운드를 헤쳐나가야 하는 대화였는데 술이 몇잔 들어가고 보니 “이딴 식으로 진행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라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술이 몇잔 더 돌고 나자 그들은 진지하게 이번 오디션을 깽판놓을 계획을 세웠다· 각 밴드의 리더들은 진지하게 오디션을 해서 합격 가능성을 좀 열어놓고 멤버들은 은근슬쩍 유망해보이는 다른 밴드에 들어가서 훼방을 놓는 식으로· 트롤 좀 하다가 안 될 거 같으면 점수 받고 될 거 같으면 훼방 놓고·
“그 그룹 사운드인가 하는 애들은 확실히 조져야하겠더라· 싸가지가 씨발~”
“악편도 안 받고 피디가 끼고도는거 보면 4명이서 피디한테 접대해줬을지도 모름 크킄ㅋ헣·”
“그 하수연인가 하는 애 얼굴은 그렇게 생겨가지고 존나 밀어붙이면 거절 못할 거 같지 않냐? 방송에서 그렇게 나오던데·”
“방송을 믿냐 씨이발롬아~”
“뭐가 있으니까 그렇게 나오는 거 아냐? 나는 뭐 있다는 거에 오만원 건다·”
그런 음담패설까지 늘어놓으며 그들은 다른 곳은 몰라도 ‘그룹 사운드’는 확실히 조지자는 것에 동의했다· 개별 밴드에는 크게 유감은 없었으나 최종보스라는 식으로 편집을 하며 싸고도는 피디에 대한 반감으로·
재훈의 말에 수연은 침묵하고 있었다· 재훈의 눈에는 그것이 갈등으로 보였다· 이 사람의 말을 따를까 그러지 말까 하는 갈등·
“제 생각은 그렇거든요· 충분히 반전의 매력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런 갈등을 끝낼 수 있도록 재훈은 한번 더 밀어주었다· 그의 의견을 선택하고 제대로 망할 수 있도록·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전혀 아닌 것 같은데요·”
아예 예상 외의 대답이었다· 무슨 소리 하냐는 듯 쳐다보는 수연· 재훈은 살짝 당황했다·
“잔잔한 무대를 하는 게···”
“혹시 우리가 패자부활전에서 유종의 미라도 남기는 공연이라도 하는 걸로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오디션 무대에서 슈게이징을 하자는 게 말이나 되는지· 어젯밤에 나는 가수다 시즌 1이라도 보셨나요·”
사정없이 비꼬아버리는 수연의 말에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멤버들· 하지만 수연은 ‘카메라가 있어서 더 세게 말 못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기세로 계속해서 재훈을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최소한 1:1 대결이라면 모를까· 줄세우기로 하는 공연이고 우리가 어느 순서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게다가 관객 점수도 중요한 부분인데 관객한테 옅은 인상을 주는 곡을 하겠다구요?”
“아니 잠시만요· 말을···”
“완성도 높은 곡이야 만들 수 있겠죠· 원래 원곡 자체가 완성도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 다른 밴드가 어떤 곡을 할지도 모르는데 앞에서 신나고 임팩트있게 공연을 한 다음 차례에 저렇게 잔잔하게 ‘완성도 있는’ 공연을 한다?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진짜 모르시고 그런 말 하시는 건가요· 혹시 밴드 공연이라는 걸 안 해보셨어요? 인기가 없다던가? 아니면 일부러 그러시는 건가· 돈이라도 받으셨나·”
“자자 이쪽 분도 그렇게 막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차갑디 차갑게 쏘아붙이는 수연의 말· 열살은 넘게 차이나는 고등학생에게 면전에서 대놓고 갈궈버리는 말을 들은 재훈·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본 멤버들이 급하게 대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끼어들었다·
“뭘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까부터 가만히 듣자듣자 하니까 계속해서 ‘잔잔한 게 좋다’ 이러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슨 카운팅 페이 공연이나 맨날 하고 앉아있는 아마추어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만 좀 해요 좀! 말이 너무 심하시네· 재훈씨 리더분도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거지 본의는 아닐테니까요· 네?”
‘어이가 없네·’
분위기가 조금 진정된 후 다수결로 진행된 투표에서 선정된 것은 명전의 ‘White Room’· 그 이후 리듬 기타는 잠시 담배를 피고 오겠다고 바깥으로 나가버렸고 다른 멤버들만 남아서 명전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 그렇게 화를 낼 필요가···”
“아니 웃기잖아요· 그냥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뿐이지 결국 경연 말아먹자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재훈의 선곡이 ‘꽤나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던 임시 밴드 멤버들이 움찔하는 사이 명전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다행히 만장일치가 아니라 다수결이라 뭐···어떻게든 된 것 같고· 일단 파트 분배랑 연습만 하면 되는데· 파트야 뭐 포지션대로 따라가면 되겠죠?”
“그럼 저 분은요?”
“협조 안하면 피디랑 이야기해서 제외하는 쪽으로 가죠 뭐· 굳이 데려갈 필요 있나· 뭐 한대 피고 와서 머리 좀 맑아지고 그러면 리듬기타 하면 될 것 같고·”
단호한 명전의 반응에 누군가가 “방송이랑 다르네·” 라고 중얼거렸다· 당연한 것 아닌가? 방송이고 그룹 사운드 애들이야 친구고 그러니까 사근사근하게 대한 것일 뿐·
명전과 별 인연도 없는데 말도 안 들어처먹고 실력도 지지리도 없는 놈들에게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이것은 ‘하수연’ 뿐만 아니라 ‘서명전’ 시절에도 그러했던 것이다· 명전은 실력이 좋기로 유명했지 인성이 좋기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 * *
합숙 첫날 밤이 끝나고 아침을 먹은 후 여성 숙소 앞 벤치에 모인 그룹 사운드 일원· 다들 아메리카노나 카페라떼를 먹고 있는 와중에 혼자 맥심 커피를 홀짝이는 수연·
그런 그녀를 보고 “그거 맛있어?” 라고 물은 후 이서가 중얼거렸다·
“영 별로야·”
“왜· 또 뭐가 별론데·”
“아니 그냥 다 별로임· 역시 우리끼리 하는 게 최고인 거 같아· 진짜로·”
“그거야 당연하겠지···”
Mystica의 보컬에게 선택받아 상당히 편한 상황의 서하· 하지만 그와 달리 이서는 꽤나 골치아픈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니 베이스는 근음만 치라는 거 있지· 자기는 베이스는 그냥 근음셔틀이라고 생각한대· 그래서 그럼 왜 나를 1라운드 픽으로 뽑았냐 그냥 아무 베이스나 뽑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그래도 비주얼이 필요해서 뽑았대· 미친 새끼 아냐?”
“야 이거 카메라가 다 찍고 있다고·”
“찍던가 말던가! 그 새끼가 먼저 그랬는데· 설마 피디가 내가 욕하는 거만 내보내고 그 새끼가 그런 건 안 내보내겠어?”
“그럴···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요···”
여러모로 불만을 늘어놓던 이서· 하지만 현아의 말에 “헉 그럼 좆된 거 아냐?” 라고 중얼거렸다·
“수연이 너희는 어떤데?”
“좀 긴가민가 하지·”
커피를 호쾌하게 들이키더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털썩 앉는 수연·
“어제 곡 정하는데 영 이상한 소리 하길래 면박 줬거든· 그런데 처음에는 막 씩씩거리면서 담배피러 갔다가 오고나서는 “제가 잘못한 것 같네요· 제대로 하겠습니다·” 이러는데·”
“잘 된 거 아닌가?”
“뭔가 묘하게 찜찜하단 말이지· 근데 또 시키니까 곧잘 해가지고 아예 빼지는 못할 것 같고···뺄 근거도 없고·”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끼는 수연· 현아는 그 모습을 보며 염려된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대비는 해 둬야 할 것 같아요···”
“대비? 대비라고 할 게 있나 싶긴한데···고민은 해 봐야지·”
“너희는 어떤데?”
불현듯 던져진 이서의 질문에 현아는 어제 밤의 일을 떠올렸다·
“곡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요?”
현아가 뽑힌 곳은 재즈 계열의 밴드였다· 나름 현아가 전문으로 하는 영역· 그 까닭에 현아는 꽤나 고득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회의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오디션에 들어가는데 편곡 하나 없이 가기는 좀·”
“무슨 말인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우리가 지금 편곡을 할 시간이 없어요· 그렇다고 뭐 편곡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지금 편곡 되는 사람 있긴 해요? 아니잖아·”
팀장이 지정한 곡은 다수결로 인해 부결된 상황· 그런데 문제는 팀장은 계속해서 재즈 계열의 음악을 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팀원들은 타협해서 “그럼 적당한 곡을 찾아보죠!” 라고까지 이야기를 했으나···
정작 아무런 생각 없이 팀원들을 뽑아놓은 팀장 덕에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밴드·
“개판이다 개판·”
격렬한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중얼거린 이야기· 현아는 그에 동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긴 해야 한다·
“그···솔직히···지금 싸우는 거 별로 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점점 높아지던 고성은 현아의 중얼거림에 멎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라는 식으로 쳐다보는 밴드 멤버들·
“제가 편곡을 할게요···여러분들은 그냥 따라만 와주시면 될 것 같은데···”
“아니 가능해요? 혼자 다 한다고?”
“죄송한데···잘 못하시면 가만히라도 좀···아니 죄송합니다···이렇게 말하려고 한게 아닌데···”
수연에게 옮았는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폭언·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 밴드 멤버에게 사과하며 현아는 생각했다·
‘그런데 못하면 가만히 있어야 하긴 해···’
“별 일 없었어요···그냥 잘 될 것 같은데···”
“그래? 다행이네·”
현아의 말에 이서는 싱글싱글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두 명이 삐걱삐걱대고는 있지만 나머지 두 명이 잘 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수연이가 힘을 더 내줘야 할 텐데· 저쪽이 안 되어버리면 우리는 망하는 거라·’
수연이의 실력 자체는 의심할 바가 없다· 하지만 이번 미션은 다른 사람들의 협조도 필요한 미션·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서는 고개를 저어 떨쳐버렸다·
어찌되었든 수연이라면 다 잘 해 줄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리더니까·
* * *
“오늘 미션은 뭐래?”
“몰라· 비공개니 뭐니 그러면서 막 호들갑을 떨던데·”
볼캡을 눌러 쓴 누군가의 말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투덜거렸다·
“뭐가 그렇게 비공개인지 모르겠어· 우리 애들 빼면 볼 애들도 없더만·”
그녀들은 최근 결성한 보이밴드 WEKIDS의 팬이었다· 정확히는 얼마 전 그녀들의 ‘최애’가 사회 1면에 오르는 바람에···막 환승을 결정한 팬들·
다들 그렇지만 원래 뭐든지 처음이 불타오르는 법이다· 이전 덕질 대상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새로 생긴 덕질 대상에 대한 흥미· 그 두개가 시너지를 불러일으켜 그녀 둘은 현재 WEKIDS가 참여하고 있다는 오디션 무대에까지 방청 신청을 넣었고···어떻게 하다보니 당첨이 되어 이까지 온 상태였다·
“아 자꾸 콧물난다· 휴지 없어?”
“나 없는데···”
“이거 쓰세요·”
비염 탓에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옆에서 건네진 구원의 손길· “아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슬쩍 쳐다본 상대는 2MAJOR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퇴물들 빠네···눈이 없나·’
약간 배은망덕한 생각이지만 마스크를 쓴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은혜는 은혜고 안목은 안목·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마음씨가 좋으니까 저렇게 퇴물들을 아직도 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진은 영 다른 애들 찍고 있는데?’
하지만 2MAJOR를 찍고 있다기에는 좀 카메라의 각도가 이상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는 카메라· 그 카메라의 끝에는 차가운 인상의 여자아이 한명이 서 있었다·
‘쟤가···뭐 우승후보라고 했던가?’
방청을 보기 위해서 재미도 없는 방송분을 꾸역꾸역 본 탓에 그녀는 사전 지식 정도는 있었다· 우승후보인 WEKIDS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그런 취급을 받는 밴드의 리더였던가· 별로 인성은 안 좋아 보이던데· 음악도 이상한 거 하고·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WEKIDS의 무대가 돌아오기 전까지 딴짓이나 좀 할 생각으로·
조금 뒤 핸드폰이고 뭐고 다 내던지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을 모른 채로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즘 자꾸 늦네요 ㅠㅠ 죄송합니다·
다음번에도 또 늦는다면 연참으로 사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늦지 않겠다는 뜻)
그리고 이번 주에는 일요일 연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작인방 외전도 써야되고 지금까지 진행된 오디션 편의 전개도 조금 손을 보고 싶어서요·
뭐 이러다가도 전개 손 안보고 일요일 연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내일 자고 일어나면 뭔가 결정이 될 것 같기도 하구요· 요즘 좀 상태가 오락가락합니다·
감사합니다·